Frankfurt에 살면서 (9)

황만섭

산책

매일 산책하는 6.4km의 길목에는 간혹 나무 가지들이 떨어져 있는 걸 본다. 난 그걸 다 치우면서 산책한다.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엔 더 많은 나뭇가지들이 떨어져 있고, 그런 날은 더 바쁘게 움직인다. 그러다 보니 내가 지나가는 6.4km구간에는 떨어져 있는 나뭇가지가 없다.

나무 가지는 지나가는 사람 모두에게 장애물이 된다. 유모차를 밀고 지나가는 젊은 엄마들에게도,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과 걷는 사람들에게도 불편을 준다. 나뭇가지를 주우면서 난 오늘도 조그마한 선행을 했다며 속으로 웃는다. 우린 살면서 1일1선이라는 말을 수없이 들으면서 살아왔고, 그러한 글귀 또한 읽었던 기억이 많다.

나뭇가지 줍는다고 몸을 꾸부렸다 폈다 반복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온몸 운동이 되어 건강에도 좋고, 누군가를 위해 좋은 일을 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즐거워진다. 마음이 즐거워지면 자연스레 자신의 얼굴이 예뻐진다. 이건 일석이조다. 남는 장사임이 분명하다. 옛날에 나를 알았던 사람들은 지금의 나를 몰라볼 것이다. 그만큼 내 얼굴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내가 나를 보고도 몰라보는 진풍경이 벌어진다. 이건 프랑크푸르트에 사는 황 키호테(황만섭)가 코로나정국에 고생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서 띄우는 웃음보따리다. 70보다는 80에 더 가까운 사람이 얼굴이 예뻐져 보았자 그게 그거다. 나무목판이 쇠 목판이 될 가능성은 없다.

내가 어렸을 적에 처음으로 1일1선이라는 글귀를 보았을 때 “아니, 각자 자신들이 살기도 바쁜 세상에 언제 남을 위해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있을까?” 막연하게 생각했다. 저런 이야기는 아마 특별한 사람들의 이야기 일 거라고 여겼다. 또 언젠가 페스탈로치의 이야기를 접했을 때도 그랬다. “페스탈로치는 아마 특별한 사람이라서 훌륭한 행동을 했을 것이다”라고 지레짐작했을 뿐이다.

나 자신이 나이가 먹고 속이 조금씩 들어가면서 서서히 인간이 되어 가기 시작했고, 언제 부터인가 나 자신도 조그마한 선행을 시도해 보니 그게 그렇게 어렵고 힘든 일이 아니었다. 이상한 것은 남을 위해 뭔가 조그마한 선행을 하다 보면 내게 돌아오는 기쁨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이다.

당시 패스탈로치가 길가에서 열심히 주머니에 담고 있던 것은 깨어진 유리 조각이었다. 행여 애들이 놀면서 다칠까 봐 그는 그걸 치우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나 살면서 크고 작은 선행을 끊임없이 계속해야 이 세상이 좋아진다. 아니 이 세상이 덜 나빠진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지금 엄청난 쓰레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이 지구는 우리들이 사랑하는 손자들이 계속해서 살아가야 할 소중한 생활공간이다. 우리들이 조심스럽게 사용해야 한다. 물 한 방울, 세제 한 방울도 적게 사용해서 쓰레기가 적게 나오도록 노력해야 한다. 나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버릴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에는 40가구가 살고 있다. 그들 중 상당수가 종이와 플라스틱을 구분하지 않고 함부로 버리는 사람들이 있다.

난 함부로 버린 그 쓰레기를 볼 때마다 그들이 쓰레기를 구분할 능력이 없는 바보들 인지? 아니면 분류하기가 귀찮아서 함부로 버리는 게으름뱅이들 인지 헷갈린다. 나는 그들을 몹시 미워한다. 저런 인간들을 낳고도 미역국을 먹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역사산책: 서재필 박사 이야기

어느 날 서울에 있는 독립문과 똑같은 독립문이 전남 보성에 세워졌다는 신문보도가 눈에 들어왔다. 왜 하필 보성에다가 (전남 보성군 용암리 가내마을) 독립문을 세웠을까? 궁금했다. 이야기는 이러했다.

가내마을은 성주 이씨 집성촌이다. ‘다정가’로 유명한 이조년(1269-1343)의 고향마을로 유명한 이 조그마한 마을엔 근래에 박사만 27명을 배출한 박사마을로도 유명하다. 이조년은 5형제중 다섯째로 형들의 이름부터가 특이하다. 이백년, 이천년, 이만년, 이억년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그의 형들이다. 그리고 다섯째인 자신의 이름이 이조년이다. 다정가는“이화에 월백하고로 시작해 다정도 병인 양하여 잠 못 들어하노라”로 불리는 유명한 가사말이다. 가사내용을 자세히 보면 “하얀 배꽃에 달이 밝게 비치고, 은하수가 흐르는 깊은 밤에, 꽃가지에 깃든 봄의 정서를, 두견새가 알고 저리 울겠냐 만은, 다정다감한 나는 그것이 병인 양하여 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이조년의 증손자 이직(1361~1431)은 ‘까마귀 검다 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 소냐, 겉 희고 속 검은 이는 너 뿐인가 하노라’는 이직의 시다. 이직의 14대손 이기대의 5녀가 서광언과 혼인했다.

서광언의 선조들은 3명의 정승과 3명의 대제학을 배출한 명문가다. 후에 서광언이 동복현감으로 있을 때 서광언의 부인은 친정 집인 가내마을에 와서 몸을 풀었다. 그때 낳은 아이가 바로 서재필(1864~1951) 박사다. 그렇게 해서 서재필에게는 자기 외갓집이 그의 생가가 되었다.

청나라에 의존하는 척족 중심의 세력들을 향해 자주, 자강을 외치며 갑신정변(혁명)을 꾀했으나 갑신정변은 3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갑신정변은 1884년 김옥균, 홍명식, 윤치호, 박영효 등이 시도한 개혁혁명이다. 서재필은 일본으로 망명했고 부모형제, 부인, 아들까지 죽임을 당하는 멸문지화를 당했다.

서재필 박사는 갑오개혁으로 역적의 죄명이 벗겨지자 12년 만에 귀국해 독립협회를 결성하고 한글로 쓰여진 독립신문(1896~1899)을 창간해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도록 노력했고, 중국사신들에게 굽실거리며 영접했던 사대외교의 상징이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이제 그와 똑 같은 독립문이 전남 보성군 가내마을 그의 생가 앞에 세워졌다는 기쁜 소식이다. 반가운 일이다.

서재필 박사는 1898년 미국으로 갔다가 광복 후에 다시 ‘미 군정청’ 고문으로 한국에 돌아와 1년여 동안 일했다. 이승만을 싫어했던 하지는 인품이 훌륭했던 서재필 박사가 이승만을 제치고 대통령을 해줄 것을 은근히 기대했고, 여론도 그를 대통령이 되어줄 것을 희망했지만, 그는 대통령을 할 생각이 없다며 고사했다는 당시의 신문이 전하고 있다.

뒷날 그는 “한국사람들은 단결을 할 줄 모른다”는 말을 깊은 한숨과 함께 남긴 후 미국으로 건너가 펜실베니아에서 병원을 운영하다가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나의 하루살이

글 제목을 ‘하루살이’로 정한 이유는 하루하루를 내 생의 전부로 여기고 고마운 마음으로 아껴서 소중하게 살겠다는 각오를 하면서부터다. 그냥 인생전체를 별생각 없이 열심히 일만하고 살다가 언젠가부터 나에게도 인생졸업장을 받을 날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직감을 한 후 초조함이 밀려왔다.

나는 평소에 인생은 그저 열심히 일하고 노력하면서 부지런하게만 살면 되는 것인 줄로 알았다. 생각 없이 의미 없이 사는 동안에 세월이 흘러가버렸다는 사실을 몰랐다. 하루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미쳐 생각하지 안 했고 실감하지도 못했다. 그냥 정신없이 바쁘게 뛰어만 온 것 같다.

지금부터는 오늘 현재 내가 어딘가 아픈데 없이 하루를 산다는 것이 “보석 같이 빛나는 귀중한 하루”라는 것을 확실하게 인지하고 하루살이(하루생활) 를 저녁잠자리에 들기 전에 점검하는 손익계산을 한 후 잠자리에 들기로 마음먹었다.

내 나이는 이미 막노동을 할 나이도 지났고, 막가 파로 살기에도 오래 전에 이미 청춘을 보낸 사람으로서 지금은 거의 ‘젊은 늙은이’ 모습을 하고 있다. 나 같은 사람은 양로원에 가도 담배심부름이나 할 정도의 사람으로 늙은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젊은이도 아닌 어정쩡한 경계에 서있다.

그래서 하루살이라는 말은 막노동과 막가 파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젊어서야 내가 남에게 시비를 걸기도 했고, 상대가 나에게 시비를 걸어오기도 했지만, 지금은 다 지나간 옛이야기다. 지금은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 신세나 도움 없이 건강한 삶을 살면서, 나 자신도 고통받지 않고 말년을 지내다가 영광스러운 인생졸업장을 받을 수 있을까 하는 일념 뿐이다. 오직 그것만이 나의 소망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네덜란드와 스위스 이 두 나라를 부러워한다. 이 두 나라에서는 인생을 건강하게 살다가, 건강이 나빠져 힘들게 될 때에는 미련 없이 떠날 수 있는 권리를 법이 허용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산책과 맨손체조, 그리고 머리에 들어가지도 않는 대도 애를 쓰면서 여러 가지 책을 보는 이유도 건강을 지키고 치매 예방을 하기 위해서다. 절대로 오래오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다. 건강하게 살다가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을 때 웃으면서 떠나고 싶다. 난 지금 그걸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참조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사전, 나무위키 오마이뉴스

1212호 14면, 2021년 3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