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와 정체성

류현옥

지난 1월 20일 미국의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국회의사당 카피톨에서 제46대 미대통령 조 바이든의 취임식이 있었다. 전 세계를 총괄하는 권력의 전당에서 어두웠던 트럼프 대통령의 시대에 막을 고하는 전환점으로 미국정부는 물론 전 세계가 큰 숨을 내쉬고 새 시대로 이끌어 갈 바이든대통령 정부의 출범을 경축하는 행사였다.

이날을 장식한 22살의 젊은 흑인 여시인 아만다 고오맨(Amanda Gorman)는 자작 축시를 통해 분열된 미국사회의 단합과 인종차별의 퇴치를 호소했다. 노란 외투를 입고 여러 갈래로 땋아 묶어 올린 검은 머리 위에 마치 왕관처럼 붉은색으로 빛나는 머리 테를 하고 나온 흑인 미녀의 출현은 새 미국의 정치방향을 예고하는 듯했다.

대통령취임식의 축시 낭송은 지켜온 전통으로서, 최연소 여성 시인이 낭독함으로서 신선한 새 정치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의미를 세계에 알리는 것이다.

그녀는 마이크를 향해 자작시를 낭송하면서 두 손으로 자신과 하객들을 지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시를 낭독하며 온 몸을 동원하여 마치 연극하듯 청중을 매혹시켰다. 그녀는 언어장애가 있다고 하는데도 철저한 훈련으로 이를 극복하여 마치 완성된 노래처럼 이 시를 낭독했다.

바이든대통령의 취임연설에 뒤이어 그녀와는 달리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레이디 가가(Lady Gaga)가 등장하여 축가를, 제니퍼 로페즈(Jennifer Lopez)는 미국 국가를 불렀는데, 축시를 읽는 아만다의 퍼포먼스는 이 세 사람을 무색하게 했다고 독일주간지에서 썼을 정도다.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할 이날의 이벤트에 참석한 취임식 하객들은 물론 TV 화면을 통해 지켜본 전세계인들을 매혹시켰다. 그녀는 “바이든대통령 내외분과 해리스 부통령 내외분 그리고 미국시민과 세계인 여러분(”Mr. President, Dr. Biden, Madam Vice President, Mr. Emhoff, Bürger Amerikas und der ganzen Welt,”)으로 낭송을 시작함으로써 미국 국민에 한정시키지 않고 전 세계인을 포함하여 세상을 향해 부르짖었다.

<우리가 기어 올라가는 언덕(Der Hügel, den wir erklimmen)>이라는 제목으로 전 대통령의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어둠의 골짜기에서 밝은 햇볕이 내리비치는 언덕 위로 오름으로써 미국의 존재를 세계에 나타내자는 구호를 시로 묘사했다.

비평적인 독일신문에서는 이 시는 축시로 간주될 시문학이 아니라 정치와 시를 뒤섞은 것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그로부터 두 달이지난 후 아만다 고어맨의 축시를 번역하는 과정에서 전 세계적으로 파문이 일어났다. 이는 흑인 여성이 지은 시를 백인 여성이 번역을 할 수 있느냐는 의문으로 시작하였다. 독일에서는 이미 세 명의 여성 번역가가 번역을 한 후였다.

노예의 후손으로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흑인 여성의 언어로 표현한 시를 다른 사회적 환경에서 자란 백인여성이 어떠한 시어로 그녀 특유의 의미 깊은 언어를 이입하여 다른 말의 세계에 전달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에서 발단되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아만다 고어맨의 시를 백인 여성이 번역을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는 기사가 실리자 번역 청탁을 받은 백인여성번역가는 계약을 스스로 취소했다. 스페인에서는 이미 결정된 번역청탁을 맡은 백인 남성과의 번역계약을 철회했다.

독일어로 번역하는 어려움은 언어 자체에서 이미 성의 정확한 구별과 예민한 표현을 요구하는 부사의 관계로 여론이 분분했다. 일방적으로 말하는 ‘노예의 후손’이라는 표현과‚ ‘여자 노예의 손녀’라는 표현의 차이 하나를 두고 토론했다. 이 작은 늬앙스를 간과하는 것은 차별대우의 근원으로 내용은 물론 어감의 차이에 대한 의문이었다. 우선 피상적으로 노예의 후손으로 태어나 거친 인종차별의 미국사회에서 홀어머니의 밑에서 자라며 경험한 시인의 심층을 표현한 무게가 다른 언어를 번역하여 이해할 수 없음을 강조한 것이다.

젊은 흑인 여시인이 말하는 단어의 의미 즉 ‘단일성’, ‘희망’, ’빛‘, ‘다양성’ ‘신빙성‘이 과연 백인 여성들이 같은 의미로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다.

독일의 나치테러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유대인 여성철학가 한나 아렌트(Hanna Ahrendt)의 전기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만다 축시의 번역에 대한 여론을 지지하는 예로 들 수 있다. 쉽게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는 이야기다.

2차대전이 끝나고 전 인류가 전쟁상처의 회복 중에 있을 때의 이야기다.

<히틀러를 어떻게 처벌하는 것이 좋을까?>의 제목으로 전 미국의 학생들이 참석할 수 있는 백일장이 실시되었다. 흑인 여자고등학생이 일등상을 받았고 그 상금으로는 하바드대학의 입학은 물론 전학비가 장학금으로 수여되었다.

흑인 여학생의 수필 내용은 “히틀러를 미국으로 데리고 와서 검은 흑인 피부로 씌워 평생을 흑인으로써 미국에 살게함으로써 여생을 통해 흑인들이 당하는 인간차별로 처벌해야한다”는 것이었다.

흑인이 받으며 사는 미국사회의 인종차별의 그 범위와 강도를 6백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전범자의 죄에 대한 대가로 표현한 것이다. 같은 나라, 같은 정치구조, 같은 사회에서 태어나 동시대에 사는 백인 소녀가 이 흑인 소녀의 제안을 이해했을까 의문스럽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성인으로 이곳에 와서 살면서 생각없는 언행으로 상처를 입히는 독일인들을 이해하려 애쓰며 살아왔다. 50년을 살면서 지금까지 때때로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들으면서도 마음속의 분개를 의식화하여 외부로 나타내지 못한 점이 적지 않다.

외할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운 어머니는 자신의 딸로 태어난 나의 이름을 심사숙고하여 의미 있는 한자의 뜻과 어울리게 부를 때도 듣기 좋게 해서 내 이름을 지었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50년을 이곳에 살면서 내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여 부르는 사람은 드물고, 심지어 친지들 중에도 11개의 알파벳을 기억하고 정확하게 내 이름을 쓰는 사람은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그런가하면, 간호사 부족의 비상상태를 해결하기위해 불려온 한국에서 온 동료들의 이름이 어렵다하여 독일 이름으로 변경하여 부른 예가 적지 않다.

예를 들면 10명의 간호사 중 한 명의 한국 간호사가 섞였을 경우 한국 간호사는 당연히 9명의 독일 간호사 이름을 배우고 익혀 불러야 했음에도 단 한 사람 섞인 한국 간호사 이름을 배워 불러줄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독일인들도 우리 선조들 못지않게 이름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소설가는 작품 속의 주인공 이름을 심사숙고 하여 골라서 쓴다. 그들도 평생을 통해 불리게 될 이름의 뜻과 어원을 따져서 태어난 아이의 이름을 정한다는 것도 50년을 이 곳에 살면서 알게 되었다.

이름은 한 인간의 정체성을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외국인이 같은 과를 졸업하고 오히려 나은 성적의 이력서를 보냈을 때도 독일이름이 아닌 데에서 탈락이 된다고 종종 신문에서 보도된 바 있다.

이름이 우선 얼굴과 이력서 내용에 앞서 점수를 깎는다. 인종차별의 단계는 여기에서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어맨 시 번역의 토론은 표출되지 않고 뭉쳐있던 한인이민자들의 아픔이 이곳에서 태어나 독일 시민이 된 우리 2세 들에게 유산으로 전해지지 않을까!

새로운 기우가 가슴을 조인다!

1221호 14면, 2021년 6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