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연재] 해로 (Kultursensible Altenhilfe HeRo e.V.)

31회 : 나 죽으면 입혀주오

“팀장님, 죄송하지만 우리 어머니 방의 옷장 안쪽에 제가 수의를 넣어 두었는데 좀 찾아봐 주시겠어요?”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목소리에는 한없는 송구스러움이 담겨있다.

요양원에 계신 Y 할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멀리 떨어져 사는 자식들은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였고 어머니가 계신 베를린으로 한걸음에 달려오지도 못하였다. 코로나로 모든 여행이 제한된 때여서 당일도 익일도 항공권을 구할 수가 없다고 했다. 더욱이 할머니가 계시던 요양원에서는 자체 규정이라며 고인의 시신을 24시간 이내에 운구해 나가라고 요구했다.

유가족은 급한 사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사단법인 <해로>에 장의사와 연락을 비롯한 여러 가지 사후 절차를 현지에서 도와줄 것을 청하게 되었다. 그중 하나가 어머니가 생전에 보관하고 계셨던 수의를 찾아 장의사에게 전달해달라는 것.

베를린에서 혼자 사시던 Y 할머니는 이렇게 될 것을 미리 예견하고 계셨던 것일까? 연락하고 사는 자식들이 있으니 엄밀한 의미의 ‘독거노인’은 아니었음에도 본인이 사후 입을 옷과 묻힐 장지까지 직접 미리 준비해 두셨다. 아니 수의는 본인이 아니라 고인의 친정어머니가 마련해 주셨다.

파독 간호사로 먼 나라로 가서 타향살이하는 딸내미가 늘 눈에 밟히셨던 것일까? ‘수의를 미리 지어두면 장수한다’는 속설이 있으니 미리 준비하는 것이 해가 될 것은 없고, 일반적이지는 않지만, 엄마가 딸에게 물론 선물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86세 할머니의 친어머니가 살아생전에 준비하신 것이라니 수의는 정말 정말 오래된 것이었다.

올 수 있는 유족이 없으니 장의사가 올 시간에 맞춰 Y 할머니가 계신 방으로 내가 나갔다. 평소처럼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계신 모습이 마치 주무시는 것 같다. 금방이라도 깨어 일어나 “왔냐?”하고 말을 거실 것 같았다. 평안하신 모습이 큰 위로가 될 것 같아서 사진을 찍어 유가족에게 보내었다. 유품 중에 예루살렘 성지순례 때 사 오신 십자가를 벽에서 떼어 고인과 함께 관에 넣어드렸다. 장의사가 할머니를 모시고 나간 후 나는 혼자 남아 빈방을 정리하였다. 옷장을 하나하나 비우다 보니 제일 안쪽에서 보따리가 하나 나왔다. 보따리 바깥쪽에는 ‘사망, 입힐 옷’이라고 쓰여 있다.

할머니의 짐을 다 싸서 차에 싣고 수의를 장의사에게 먼저 전달해 주려고 출발하였는데 중간에 문득 ‘독일 장의사가 과연 한국식 수의를 제대로 입힐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차의 방향을 급히 <해로> 사무실 쪽으로 틀었다. 장의사에게 한복 입히는 요령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어떤 수의인지 살펴보아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보따리를 풀자 수의 사이사이에 들어 있는 좀약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옷을 상하지 않게 잘 보관하려 애쓰셨던 고인의 정성이 엿보였다. 그러나 보따리 속에 오랜 세월 동안 꽁꽁 싸여있던 옷은 꼬깃꼬깃 구겨져 있었다. ‘만약 확인하지 않고 보따리 채 장의사에게 전달했었더라면 큰 낭패였겠네’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고인이 마지막 가시는 길에 구겨진 옷을 입혀드릴 수 없다는 당위성은 둘째치고 무엇보다 한국의 수의를 난생처음 볼 독일인 장의사에게 구겨진 수의를 내밀 수 없다는 한국인의 자존심이 내 손에 다리미를 쥐게 했다. 장의사에게 전화를 걸어 수의를 다른 날에 전달해 주기로 하고 보따리를 들고 집으로 왔다.

수의는 특이하게 풀 먹인 명주로 되어 있었다. 하얀 치마저고리와 원색 두루마기의 주름을 하나하나 펴 다리며 그동안 Y 할머니와 함께 나눈 추억들을 머리 속에 꺼내 펼쳤다. 유달리 당신이 돌아가실 때에 대한 걱정이 많으셨던 분. 베를린 한인 성당 옆 묘지에 파독 한인 묘역을 조성한다는 소식에 제일 먼저 묘 1기를 예약하셨는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뒤늦게 베를린에 도착한 유가족이 가장 고인에게 감사했던 부분이었다.

어머니가 안 계시니 베를린에 다른 연고자도 없고, 낯선 곳에서 큰 수고를 따로 들이지 않고도 유족이 묘지와 붙은 성당에서 장례 예식으로 무난하게 치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장례를 미리 준비한 Y 할머니를 보며 나도 깨닫는 바가 많았다. 자신의 죽음을 외면하기보다는 누구에게나 언젠가 닥칠 일로 생각하고 쿨하게 미리 준비해두는 것이 좋아 보였다. 장례 보험(Bestattungsvorsorge) 중에 장례 예치금 계좌(Treuhandkonto)라는 것이 있는데 이 금액은 위탁한 후 장례 이외의 목적으로는 그 누구도 손을 댈 수 없다고 하니 누구나 한 번쯤 수의나 장지를 준비하며 고려해볼 만한 제도인 것 같다.

이정미/ 해로 호스피스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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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4호 16면, 2021년 6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