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연재] 해로 (Kultursensible Altenhilfe HeRo e.V.)

34회: 보고 싶은 고향

오늘은 영숙 할머니 댁의 빨래를 도와드리는 날. 할머니 댁을 방문하는 자원봉사자가 여름휴가를 떠난 터라 내가 대타를 뛰는 날이다. 남편과 이혼하고 혼자 사시는 영숙 할머니의 독방 아파트에는 세탁기를 들여놓을 공간이 없다. 다행히 건물 지하에 동전 세탁기가 있어서 할머니는 그곳을 이용하신다.

공용이라 예약해 둔 시간에만 세탁을 할 수 있다는 제한이 있지만, 그럭저럭 사용에 어려움은 없다. 빨랫감을 들고 오르락내리락하는 일이 여든이 넘은 할머니에게 힘에 부칠 뿐. 그래서 사단법인 <해로>의 일상생활 도우미가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빨래를 도와드리고 있다.

나는 지하의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서둘러 욕실 청소를 끝내고 영숙 할머니와 나란히 앉아 빵을 꺼내 들었다. 나는 도시락 빵, 할머니는 냉장고에서 꺼낸 청어 절임을 얹은 빵.

“난 한국에 있을 때부터 빵을 잘 먹었어. 간호장교여서 군대에서 밥이 나오니 어쩌다 집에서 먹을 때는 간단하게 빵을 먹었지.”

“청어 절임을 좋아하시나 봐요. 저는 구운 청어는 먹어도 독일식으로 절인 청어는 잘 못 먹어요.”

“나는 돼지고기를 잘 못 먹어. 햄을 그래서 안 먹어요. 우리 집은 원래 돼지고기를 안 먹었어. 아버지가 동네 소를 잡는 날에 쇠고기를 궤짝으로 사서 실어 오시면 그걸 삶아서 썰어 먹었지요. 황해도에서는 고기를 주로 삶아서 먹어요.”

이북 출신의 영숙 할머니는 어느새 어린 시절 얘기를 꺼내 놓으신다.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고등교육까지 마친 아버지는 약사로서 약국을 경영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해방이 되자 공산당이 와서 아버지 고향의 땅을 모조리 몰수해 갔고 육이오가 터져 난리를 피해 고향으로 간 아버지는 고향 집의 살림살이가 예전만큼 넉넉하지 않음을 보게 되셨다.

영숙 할머니까지 4남매를 포함한 여섯 개의 입이 얹혀사는 것이 미안해진 아버지는 돈을 벌러 다시 약국이 있는 진남포(현 남포특별시)로 돌아왔다고 한다. 맏딸인 영숙 할머니만 아버지를 따라 돌아왔는데 당시 중학생이었기에 학교가 다시 열리기를 기다리며 낮에는 늘 약국 옆에 있는 중국집에 가서 밥을 먹었다고 하셨다.

이미 시내에는 사람이 줄어들었고 이윽고 북상했던 UN군이 중공군에 밀려서 남으로 내려갔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공산군이 곧 들이닥칠 것 같아지자 아버지는 딸의 손을 잡고 부랴부랴 부둣가로 달려가셨는데 이미 큰 배는 하나도 없어서 어렵게 작은 배에 끼어 올라 인천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고 한다. 매서운 바닷바람이 몰아치는 12월 말이었다.

아버지는 도움을 청할 지인을 찾아 서울로 갔으나 1.4 후퇴의 혼란 속에서 지인을 만나는 것이 여의치가 않자 아버지는 피난길 행렬에 딸을 떠나보내며 자전거를 타고 금방 따라갈 테니 오산에서 만나자고 하셨단다.

13살의 영숙이는 부모도 없이 아는 아저씨를 따라 무작정 걸어서 오산까지 갔는데 길가에는 아무도 치우지 않은 시체가 종종 눈에 띄었고 그것을 보며 ‚아버지를 혹시라도 못 만나게 되면 혼자서 어떻게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다행히 아버지를 만나 부산으로 내려갔단다. 고모가 부산 경찰서로 발령을 받은 고모부를 따라 해방 전부터 부산에서 살고 계셨는데 정확한 주소를 몰라 부산에 도착하자 아버지는 무작정 국제시장으로 가셨다고 한다. 급히 진남포를 떠날 때는 잠시 피해있다가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올 생각이었지 부산까지 갈 계획이 아니었었다. 요즘처럼 지인의 연락처를 전화기에 저장하여 휴대하던 시절도 아니어서 고모에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시장통 어귀에 도착한 아버지는 딸에게 ‚그 자리에서 꼼작 말고 혹시 고모가 있는지 잘 보라‘고 이르시곤 일거리를 찾으러 어디론가 가버리셨다. 고모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아서 고모를 못 알아볼까 봐 걱정을 하는 어린 영숙에게 누군가 툭 치며 말을 걸었다.

“네 영숙이 아니니?“

고향 말씨로 말을 거는 사람을 자세히 보니 고모였다. 이북에서 온 피난민이 몰려오자 고모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매일 국제시장으로 나와 보셨고 그렇게 극적으로 고모를 만난 영숙이와 아버지는 부산에서 터를 잡고 계속 살았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는 고향의 어머니와 동생들을 만나지 못하였다. 그렇게 70년이 흘렀다.

먼 유럽에 와서 살면서도 비행기만 타면 언제든 고국으로 날아갈 수 있고 스마트폰을 켜면 실시간으로 한국의 친지나 친구들과 연락이 되는데 떠나온 고향을 두 번 다시는 가 보지도 못하고 헤어진 가족과 연락도 할 수 없는 실향민과 탈북민의 아픔이 영숙 할머니를 통하여 오롯이 다가왔다. 한반도에서 평화로이 남북이 서로 오갈 수 있는 그날을 기다려본다.

1230호 16면, 2021년 8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