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야기-(13)

황만섭

하와이 마지막 여왕 릴리우오칼라니(Liliʻuokalani)

미국은 대량생산으로 쏟아져 나오는 상품들을 팔아야 하는 해외시장이 필요했고, 값싼 원료를 다시 들여와야 하는 해외영토도 필요했다. 힘이 생긴 미국은 오만해졌고, 1875년 미국자본이 하와이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하와이 협정으로 설탕수입에 특혜를 주다가, 1890년 매킨리 법으로 수입특혜를 없애자, 하와이 여왕 릴리우오칼라니가 반발하면서 미국과 반목이 시작되자, 마침 하와이에 정박 중이던 미 해군함대 수병 150여 명이 간단하게 여왕을 몰아내고 하와이를 미국 땅으로 합병해버렸다.

1895년 쿠바가 에스파냐로부터 독립을 요구하는 전쟁이 터졌다. 독립전쟁은 3년간 계속되었고, 미국은 1898년 초, 메인 호를 파견했고, 2월 중순경, 메인 호 내에서 생긴 폭발로 인해 수십 명의 미군수병이 죽자, 에스파냐의 소행이라며 전쟁을 시작했다. 6개월간의 전쟁에서 미국은 대승을 거두었다. (그 뒤, 1976년의 조사에서 메인 호의 폭발은 에스파냐의 소행이 아니라, 보일러실 폭발로 확인됐다) 쿠바에서 했던 에스파냐와의 전쟁은 식은죽 먹기였다. 그 전쟁을 ‘소풍과도 같은 전쟁’이었다고 역사는 기록했다. 어린이와 어른과의 싸움처럼 콧노래를 부르면서 했던 이 전쟁에서 이긴 미국은 전리품으로 푸에르토리코, 괌, 사모아, 필리핀 등이 넝쿨째 굴러들어왔다. 1898년 12월 파리조약에서 미국은 2.000만 달러에 에스파냐로부터 필리핀을 할양 받는다는 계약서를 썼다.

그걸 본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장악에 시비를 걸자, 1905년 일본의 가쓰라 수상과 미국의 태프트 국무장관 사이에 필리핀은 미국이 갖고, 한반도는 일본이 갖는다는 밀약을 했다. 부끄러운 줄 모르는 뻔뻔한 도둑질이 거리낌 없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은 계속해서 먹을거리를 찾고 있었다. 당시 미국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파나마운하였고, 컬럼비아와 협상은 난항을 겪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파나마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이에 미국은 즉각 개입하여 컬럼비아 군의 접근을 막고, 파나마독립을 도와주었다. 그 대가로 파나마운하 개발권을 얻어내어, 1914년 8월 15일 파나마운하를 개통함으로써 남아메리카 4만km를 돌지 않고도 손쉽게 태평양과 대서양 넘나들 수 있는 미국함대의 물길을 열었다. 미국은 이제 날개를 하나 더 달게 되었고,

지구는 미국을 위해서 스스로 돌기 시작했다. 1911년 멕시코에서 쿠데타가 일어나자, 미국의 오만함은 제국주의와 패권주의의 마각을 드러냈다. 1914년 멕시코 정부가 반미성격을 분명하게 드러내자, 미국이 멕시코에 군대를 파견했지만, 미국이 무서워 누구도 멕시코를 도와주는 나라가 없었고, 군대를 보내지 말라고 말리는 나라도 없었다. 무서운 세력이 나타나 폭력을 휘둘러도 모두 다 멍하게 쳐다 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양한 민족이 모여 사는 미국 내의 사정도 빈번히 일어나는 인종간의 갈등으로 조용할 날이 없었다. 서로 다른 민족을 차별하는 비아냥거림이 넘쳐났다. 이태리 출신 이민자들을 Web(웹)이라고 놀려댔고, 유대인출신 이민자들을 Kike(카이크)라고 비아냥거렸다. 미국에는 인종마다 조롱 받고 놀림 당할 만한 언어들이 넘쳐났다. 세상이 시끄럽기는 어디나 비슷했다.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가 가브릴로가 쏜 총에 암살당하는 사건으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고, 독일, 이태리가 오스트리아 편을 들고 나왔다. 이에 맞서 프랑스, 영국, 러시아가 동맹을 맺고 세르비아 편에 섰고, 뒤이어 터키와 불가리아도 전쟁에 참여했다. 프랑스와 영국은 세계구석구석을 돌며 식민지확보에 열중했고, 이제 침략할 땅이 별로 보이지 않자, 동유럽이나 중동 어디엔가에서 힘자랑을 하고 싶었던 차에 전쟁이 터진 것이다. 러시아도 일거리(전쟁)를 찾고 있었다. 독일은 통일(1871)을 늦게 하는 바람에 식민지 확보에 시간이 없었고, 이태리 왕국도 늦은 국내통일(1870)로 새로운 땅 확보가 여의치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 등장한 무서운 첨단살상무기는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엄청난 피해를 가져왔다. 솜(Somme) 전투에서 하루 동안에 1만 9천명이 죽고, 부상자가 4만 1천여 명이 생겨났다. 마른(Marne) 전투와 베르됭(Verdun) 전투에서도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 900만 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전쟁이 5년이나 걸릴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제1차 세계전쟁 중에 재미를 본 나라는 미국과 일본뿐이었다. 전쟁이 격렬해질수록 미국의 수출은 엄청나게 늘어났다. “전쟁시작 전에 2등 국가였던 미국이, 전쟁이 끝나고 보니 1등 국가로 변해있었다”아시아에서는 일본이 전쟁호경기를 누리며, 아시아나라 하나하나 침략을 통해 야금야금 먹어 치우느라 해가 지고 달이 뜨는 줄 모르는 재미에 빠져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1912년 미국의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이 태프트와 루스벨트로 분열되는 바람에 민주당의 윌슨(1856-1924)이 당선되었다. 남북전쟁 후, 처음으로 남부출신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상. 하원까지 민주당이 과반수를 차지함으로써 축제분위기에 싸였다. 윌슨은 ‘새로운 자유(New Freedom)’을 외치면서 서민, 노동자를 보호한다고 떠들었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의 길을 걸었고, 인종이 섞이면 안 된다며, 입으로는 민족자결주의를 외치면서 실제로는 멕시코에 내정간섭을 했으며, 도덕외교를 외치면서 폭력외교를 펼치고 있었다.

미국은 또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천명했지만, 뒤에서는 프랑스와 영국을 도왔다. 미국인들은 영국인들의 후손들이었고, 프랑스는 미국의 독립전쟁을 많이 도왔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이에 화가 난 독일은 미국 배를 공격해 124명의 미국인이 죽었지만, 미국은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뒤에 하고 숨어 돈 버는 대만 열중했다. 1917년 2월, 독일의 외무부장관이 멕시코에 암호편지를 보내 ‘만약 멕시코가 이번 전쟁에서 미국을 공격해주면, 1848년 미국에 빼앗긴 캘리포니아,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 뉴멕시코 땅을 찾아주겠다’고 적었다. 거의 미국 국토의 3분 1에 해당되는 엄청난 면적이었다.

당시 미국여론은 전쟁에 참여해야 된다고 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또다시 3척의 미국 배가 독일군의 공격으로 침몰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막 재선취임을 마친 윌슨은 1917년 4월 드디어 ‘참전’을 선언했다. 당시 미국의 군사력은 별로였지만, 모병을 통해 엄청난 군사력을 갖게 되었고, 미국이 합류함으로 전쟁의 양상이 달라졌다. 그 해(1917) 2월과 10월에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났다. 전승국이 된 월슨은 비밀외교 폐지, 민족자결주의 등 14개의 조항을 발표했다. 전승국들은 파리회의를 개최해 전후 문제를 논의코자 했으나, 프랑스의회가 윌슨의 파리방문을 반대했다. 윌슨은 파리방문을 강행했고, 파리에서 열렬한 환영을 통해 그가 영웅대접을 받았다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 참조 : 먼 나라 이웃나라,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사전 참조

2019년 9월 27일, 1140호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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