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4)

교포신문사는 3.1운동 100주년과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을 맞아 8회에 걸쳐 특집 면을 준비한다. 이번 기획 특집에서는 먼저 3.1운동의 전반을 살펴보며, 3.1운동이 우리 민족사에 차지하고 있는 의미를 되짚어 보며, 3.1운동의 결실인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과정을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편집자 주

 

(4) 3.1운동의 방법론에 관하여

-「비폭력」에 관한 고찰

3·1운동의 방법에 있어서의 가장 큰 특징은「비폭력」방법을 택하여 평화적 시위의 방법으로 운동을 전개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3·1운동 직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3·1운동이 비폭력 방법을 택했기 때문에 독립의 즉각 쟁취에 실패했다고 비판하는 견해가 존속해 왔다.

왜 3·1운동에서 초기 조직자들은 구태여 비폭력 방법을 택하게 되었는가?

독립운동에 있어서의 폭력과 비폭력은 투쟁방법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에 그 자체에 의해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 당시 독립운동의 객관적 조건과 주체적 조건에 비추어 그 효율성과 적합도를 측정해서 평가하는 것이다. 한국의 국권회복운동가, 독립운동가들은 한말의 법 운동, 애국계몽 운동이나 신민회의 독립전쟁 전략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폭력방법의 중요성도 잘 인식하고 있었으며 양자의 배합 방법도 잘 알고 있었다.

3·1운동 당시의 객관적 조건을 먼저 당시(1918년 12월말 현재) 일제의 국내 독립 운동에 대한 탄압 역량과 관련시켜 보면 일제는 정규군 2개 사단과 진해와 영흥만에 해군 및 중 포병대대 등 약2만3천명의 잘 무장된 정규군 병력을 전국에 거미줄 같은 책임분담지역 배치 망을 만들어 완전히 그 무력 지배하에 넣어 탄압하였다.

일제는 여기에 다시 일본 헌병으로 하여금 일반 한국 민간인들에 대한 사법 경찰행정을 담당케 하는 소위 헌병경찰 제도를 만들어 13,380명의 헌법 경찰을 전국 1,861개 주둔소에 배치하여 한국인을 탄압하였다. 일제는 이밖에 다시 조선 총독부 관리 21,312명에게도 극복과 같은 제복을 입히고 칼을 차게 하여 탄압 무력으로 만들었다.

또한 일제는 한국에 거류중인 일본인 34만명(1918년 말 현재) 중에서 일부를 무장시켜 2만 3384정의 총기를 휴대케 하였다.

일제는 이렇게 4중으로 약 81,076명의 무장대를 전국에 거미줄같이 풀어놓고 헌병 경찰에 한국인에 대해서는 재판없이 3개월 이내의 징역에 처할 수 있는 사법특권을 주어 언행만 불손해도 일제 헌병 경찰이 재판없이 한국인을 투옥하고 태형을 가할 수 있는 탄압체제를 만들어 놓고 총검으로 잔혹 무비한 식민지 무단통치를 자행하고 있었다.

한편 독립운동의 주체적 조건을 무장과 관련시켜 보면 한국인은 일제에 의하여 “완전무장해제” 당하여 독립운동을 위한 폭력의 준비는커녕 일제에 대항할 최소한의 무기도 갖고 있지 못하였다. 일제는 이미 구한 말 군대 해산 직후인 1907년 9월 3일 의병운동을 탄압하기 위해「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제정·공포해서 한국인의 총기·화약의 휴대나 운반을 법률로 철저히 금하고 위반자를 투옥했다.

1910년 이후에는 이 단속법을 더욱 강화해서 집행하고 이를 조금이라도 위반하는 경우에는 가혹한 고문과 형벌을 가하였다. 그러므로 일제하 한국 국내에서 한국 민족은 철저하게 「완전무장 해제」당한 상태에 있었다. 박은식은 이를 정확하게 표현하여『한국인들이 일제의 탄압으로 촌철도 갖지 못했다』고 기록하였다.

3·1운동의 초기 조직자들이 이러한 객관적 및 주체적 조건 속에서 대규모 독립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폭력과 비폭력의 독립운동 중에서 어떠한 운동 방법을 택했어야 할 것인가? 촌철도 갖지 못한 한국민족이 완전 무장한 일제의 강대한 무력을 작동하지 못하도록 묶어두고 일제에 강타를 가하려면 비폭력 방법이 가장 효율적이고 적합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당시의 조건에 비추어 볼 때 만일 3·1운동의 초기 조직자들이 민중에게 폭력방법을 요청했더라면 3·1운동은 민중에 의해 자발적으로 전국에 파급되어 1700만명의 국민 중에서 202만 여명이 봉기한 대규모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파고다 공원과 기타 요소에 일본군 몇 개 중대나 몇 개 대대만 투입해도 진압되는 소규모 폭동으로 끝나고 말았을 것임은 명백히 알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당시의 국제적 조건을 보면, 한국 민족이 기다리던 기회는 전쟁이 아니라 「평화회담」의 형태로 왔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19년 1월18일부터 파리에서 세계 평화 회담이 열리고 여기서 독일 등 패전국 식민지의 처리와 재분할 문제가 논의되게 되자 「평화 회담이 기회」로 포착된 것이었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평화적 비폭력 운동도 매우 큰 효과를. 낼 수 있는 방법이 되는 것이었다. 비폭력 방법 중에서는 시위방법이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일부 논자들은 3·1운동의 초기 조직자들이 만주의 독립군과 연계를 가져 무장폭력 운동을 도입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기도하지만 이것은 역사적 사실의 선후가 뒤바뀐 것이다. 3·1운동 직전에는 만주에 무장을 제대로 갖춘 독립군 부대가 없었으며 도리어 3·1운동의 성과로 이에 고취되어 3·1운동 직후부터 급속히 독립군 부대들이 조직되어 발전되었다.

-「조기조직 단계」와「대중운동 단계」에 관한 고찰

또한 일부 논자들이 3·1운동에 있어서「33인의 민족대표」와「대중」을 대립관계로 보아 33인을 부정적으로 평가해서 폄하하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 다른 것이며 또한 3·1운동을 민족대표 중심으로 보아「대중」을 경시하고 3·1운동을 대중운동으로 보는 견해를 불온시 하는 것도 역사적 사실과 다른 것이다. 3·1운동은「조기조직 단계」와「대중운동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초기 조직 단계에서 3·1운동봉기를 기획하고 준비하고 초기에 조직화하여 봉기에 점화한 것은 33인의 민족대표였다.

그러나 3월1일 오후2시 이후의 대중 운동 단계에서는 33인의 민족대표들은 일제 경찰에 연행되어 독자적 역할이 없고 이번에는 대중이 전면에 나서 지도부의 지도없이 전국 방방곡곡에서 자기 지방의 3·1운동을 기획하고 조직하여 만세시위 운동을 전개해 결국은 3·1운동을 전국적인 대규모 민중 독립운동으로 발전시켰다. 3·1운동에서 만일 초기 조직단계의 민족대표의 역할이 없었으면 그때 점화가 되지 않았으며 반면에 민중운동 단계에서 그 점화를 이어받아 민중의 역할이 없었으면 대규모의 전국적·전민족적 3·1운동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33인의「민족대표」와「대중」은 상호 대립적 관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 관계에 있었다.

이 사실을 더욱 확고하게 증명하는 것은 민족 대표들 자신이 3·1운동을「대중운동」으로 전개하려고 한 사실에서 재확인된다. 초기 조직자들은 1월20일경에 3·1운동 방법의 세 가지 원칙으로서 ①대중화 ② 일원화 ③비폭력에 합의했었다.

이것을 번역하면 「이원화」는「민족대 연합전선」의 형성,「비폭력」은 문자 그대로 비폭력시위, 그리고「대중화」는 바로「민중 운동화」를 의미한 것이었다. 즉 3·1운동의 민중운동으로의 전개는 민족대표들에 의해 초기조직단계에서부터 추구된 것이었다.

3·1운동을 본질적으로 대중독립 운동으로 볼 때 어떠한 대중이 참가했는가 그 계층별 참가의 내용이 문제가 된다. 3·1운동에는 신분과 계급, 남녀노소, 지역과 당파 등을 초월하여 전 민족이 참가하였다. 3·1운동은 전민족적 독립 운동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을 동태적으로 파악하기 위하여 통계를 통해 참가 계층별로 나누어 보면, 농민층이 59·3%, 지식인층이 21·0%, 시민층(상인층 및 광공업 자본가 층)이 12·6%, 노동자층이 3·7%, 기타 무직이 3·4%의 비중을 차지하였다.

3·1운동에의 참가 계층의 내부 구조와 역할을 더욱 더 동태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선도부대-주력부대-참여부대」라는 분석 모형을 적용해 보면 선도부대의 역할을 한 것은 지식인층이었고, 참여 부대의 역할을 한 것은 시민 층과 노동자층이었으며, 주력부대의 역할을 한 것은 농민층이었다.

주로 종교인·학생·교사 등으로 구성된 지식인층은 교회와 학교를 주요 근거지로 하여 3·1운동을 선도하면서 선전문·지하신문·격문 등의 작성과 배포, 독립선언서 배포, 대중의 조직화와 동원, 태극기 제작, 독립운동 봉기의 선전 연설, 독립선언의 단행, 시위의 선도, 가두투쟁 등의 활동을 헌신적으로 수행했다.

한편 주력부대로서의 농민층은「마을」과「장터」를 주요근거지로 하여 주로 독립운동 조직화, 태극기 제작, 만세시위, 봉화 시위, 농악대 시위, 일제 헌병 경찰주재소 습격, 일제 면사무소 습격과 접수 등의 활동으로 3·1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농민층은 국권을 빼앗긴 이외에도 일제의 소위「토지조사 사업」에 의한 가혹한 식민지 착취를 집중적으로 당한 계층이어서 자주독립을 쟁취하지 않으면 하루도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체험을 통해 절감했으므로 3·1운동에서 가장 전투적으로 일제를 공격하여 일제를 강타하였다.

특히 주목할 것은 농민층이 5일마다 열리는 정기 장시의「장날」과「장터」를 매우 적절히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전국 각 지방에서 5일마다 정기장시가 열리게 되는데 이것은 5일을 주기로 하여 전국 방방곡곡이 고리를 만들어 순환하면서 다수의 농민을 한곳에 집합시켜 대화와 정보의 교환을 성취케 하는 조직이었다. 따라서 농민층이 주력부대로서 독립시위 운동에 참가하여「장날」과「장터」를 활용해 주기만 하면 특별한 비밀조직이 없어도 독립만세 시위운동은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파급되어 봉기할 수 있는 것이었다.

3·1운동에서 시민 층과 노동자층도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선도 부대인 지식층과 참여부대인 노동자층·시민 층의 중요한 활동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주력부대인 농민층이「장날」을 택하여「장터」에 모여 대대적인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과감하게 전개하고 일제에 전투적으로 항전하지 않았으면 3·1운동은 역사를 변혁시킨 전국 방방곡곡의 자발적인 대규모 독립운동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주목해 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더욱 주목하고 유의해야 할 것은 3·1운동은 전 민족의 모든 계층이 신분과 계층을 초월하여「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향해 대동 단결하여 봉기한 전민족적 독립운동이라는 사실이다.

2019년 2월 1일, 1109호 14-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