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속에서의 독립운동을 찾아 (2)

이극로 선생과 유덕고려학우회

교포신문사는 3.1운동 100주년,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를 맞아, “독일 속의 독립운동을 찾아”라는 제목으로 기획기사를 10월 한 달 총 4회 연재한다.   “독일 속의 독립운동을 찾아” 기획기사는 국내 언론은 물론이고, 독일 및 유럽 동포언론을 망라해서도 최초로 시도하는 기획기사로서, 100년전 독일에 거주했던 한인들이 조국 독립을 위한 다양한 활동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도 함께 조망해 본다.  -편집자 주
 
이극로 선생: 한글학자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

한글학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이극로(1893~1978)선생은 해방후 월북한 이유로 일반인들에게는 다소 생소한 인물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국내에서 개봉된 영화 ‘말모이’에서 윤계상 배우가 열연한 주인공의 실제 모델이기도 하다.

이극로선생은 1920년 상하이 동제대학(同濟大學) 예과를 졸업한 후,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였다.

1929년 귀국, 이후 한글학자로 많은 활동을 한다. 오늘날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맡아 사전편찬 작업과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한글 맞춤법 통일안 작성에 핵심 역할을 맡았다. 조선어학회에서 꽤나 비중이 높은 활동을 했는데, 1929년 <조선어사전> 편찬 집행위원(뒷날 조선어학회의 조선말 큰사전으로 이어진다), 1930년 한글맞춤법 제정위원, 1935년 조선어 표준어 사정위원, 1936년 조선어사전 편찬 전임위원 및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지냈다.

이렇듯 이극로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절 한글을 지켜내고, 우리말 사전 편찬에 큰 역할을 하였다.

본 기획기사에서는 이극로 선생의 독일생활 시기를 대상으로, 선생이 펼치신 독립운동과, 유럽에 한글을 보급한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이극로 (중국명 Kolu Li)선생은 기미육영회의 후원으로 1922년 독일에 와서 그해 8월 28일 일 베를린 Wilhelm Friedrich대학/현 흠볼트대학 철학과에 입학을 한다. 상해에서 독일인이 경영하는 동제대학을 졸업해서 독일어입학시험도 면제를 받았다. 정치학. 경제학을 전공하고 부전공을 철학과 인류학로 택했다. 1927년 5월 25일 이극로 선생은 “중국의 생사 공업” 논문을 써서 특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결과로 그 후 1년간 교수 연구실에서 근무를 할 수 있었다.

베를린 유학생 시절에는 열렬하게 붓을 들고 싸운 항일 투쟁자였고 귀국 후에는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한글연구자였다.

이극로선생은 1921년 1월 이미륵이 주도하여 창설한 <유덕고려학우회>에 김준연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관동대지진 때(1923년 9월 1일)베를린에서 재독한인대회를 조직해 일본의 조선인 대량학살을 고발하고, 기관지 ‘헤바(Heba)’를 통해 한국 독립의 필요성을 유럽인들에게 전파했다.

1927년 제1회 세계 피압박민족대회에 조선인 대표로 김법린, 이의경(이미륵), 황우일 등과 출석하여 ‘조선 독립 실행을 일본 정부에 요구할 것’,’조선에 있어서 총독정치를 중지시킬 것’,’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 등 세 항목의 의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2017년에는 이극로선생이 독일 유학 시절인 1920년대에 일본 제국주의의 만행을 규탄하고, 이에 맞선 한국 민족의 독립운동을 국제사회에 알리려고 썼던 성명서와 출판물의 원본이 발굴된 바 있다.

지보람씨가 독일의 고서점에서 3~4년에 걸쳐 차례로 입수한 원본은 이극로선생이 독일 베를린에서 유학하던 시절인 1923년 ‘재독한인대회’에서 작성·배포한 선언문인 ‘한국에 대한 일본의 폭압통치’, 1924년 출간한 <한국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이하 <침략정책>), 1927년 출간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한 한국의 독립투쟁>(이하 <독립투쟁>)의 원본이다.

1923년 9월 일본에서 간토(관동)대지진을 빌미로 한국인 대량 학살이 벌어졌고, 이에 분노한 재독 한인들은 ‘재독한인대회’를 열어 일제의 만행을 규탄했다. 이 행사를 주도한 이극로는 선언문을 독일어와 영어, 한문으로 작성해 배포했다. 원본은 독일어로 작성된 것이며, 뒷장에 ‘코루 리’(Kolu Li)라는 이극로의 서명이 또렷이 적혀 있다. 선언문은 일제의 한반도 식민화 과정과 대량 학살의 참상 등을 밝히면서 “우리의 힘든 투쟁을 돕고 지지할 모든 사람들에게 고한다”고 호소한다.

<침략정책>과 <독립투쟁>은 이극로선생이 각각 1924년 2월과 1927년 5월 자비를 들여 독일어로 출간해 유럽의 각 도서관에 배포했던 30여쪽 정도의 얇은 책자다.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 민족을 지배하고 있는 범죄를 고발하고, 이에 맞선 대한민국 임시정부 활동, 의열단 투쟁 등 한국 민족의 독립운동을 소개하려는 것이 공통된 목적과 내용이다.

이 자료들은 이극로가 유럽 사회에서 ‘펜’을 통한 독립운동에 고군분투했으며, 한반도 현실을 면밀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말해준다. 예컨대 1927년 5월 출간한 책자에 일왕 암살을 계획했던 박열이 재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소식,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소식 등 1926년에 벌어진 ‘최신’ 사건들이 담겨 있을 정도다.

이극로 선생, 유럽최초로 훔볼트대에 한국어강좌 개설

이극로선생이 1923년 독일 훔볼트대학에서 한국어강좌를 개설했다는 독일 정부의 공식 문서 등의 관련기록이 최근 국내에 공개되었다.

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은 이극로 선생이 독일 유학 중이던 1923년 유럽 최초로 프리드리히 빌헬름대학(현재는 훔볼트대)에 개설한 한국어강좌 관련 독일 당국의 공문서와 자필서신 등을 수집했으며, 번역 등의 과정을 거쳐 일반국민들에게 공개할 예정이라고 지난 10월 7일 밝혔다.

이번 이극로 선생 관련기록은 국가기록원이 지난 2014년 독일 국립 프로이센문화유산기록보존소에서 수집한 기록물 6철 715매 가운데 11매다.

기록물 11매 가운데 공문서는 5매로 훔볼트대 동양학부와 독일 문교부, 이극로 선생이 한국어강좌 개설과 관련 주고받은 것이다. 1923년 8월 10일 동양학부 발송 975호는 학장대리가 문교부 장관에게 한국어강좌 개설허가를 요청한 것이며, 같은 해 8월 31일 문교부 발송 8593호는 이를 허가한다는 내용이다. 이는 이극로의 요청으로 유럽 최초로 훔볼트대에 한국어강좌가 개설됐음을 입증하는 공문서다.


1923년 독일 훔볼트대에 이극로 선생의 한국어 강좌 개설을 허가하는 공문서

지금까지는 1922년 훔볼트대 철학부에 입학한 이극로 선생이 몽골어를 수강하던 중 동료 학생들에게 틈틈이 한국어를 가르쳤는데, 이들이 강좌개설을 요청해 이를 대학에 건의하면서 성사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2007년 이 기록을 발굴해 국내에 처음 발표한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은 “이 때의 경험이 경제학 박사인 이극로가 훗날 조선어학회 간사장을 맡아 <조선어 큰사전> 편찬을 주도하고, 주시경과 함께 한글사업을 완수한 어문운동가의 길을 걷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면서 “이 기록은 1923년 전 이미 유럽인을 대상으로 한국어강좌가 있었음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독일 학계에 알려진 1952년 한국어강좌 최초 개설을 29년이나 앞당긴 것으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나머지 6매는 이극로 선생이 타자기로 작성한 문건이 2매, 자필 편지 2매, 기타 2매(초안 추정)다. 타자기를 이용해 이극로 선생이 직접 작성한 기록은 자기소개서와 1925년 1월 30일 동양학부 학장에게 보낸 서신이다. 여기서 그는 한국어는 2천만명 이상이 사용하는 동아시아의 세 번째 문화어이며, 문자가 독특해 실용적인 측면 외에도 언어학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최근 극동아시아언어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으나, 독일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며 한국어강좌의 필요성을 논리정연하게 설파하고 있다.

이렇듯 이극로선생은 유럽 최초 유학생 단체인 유덕고려학우회에서 민족의식 고취와 독립운동을 이끈 인물로서, 독일인 부르크하르트가 관동대지진 때 일어난 재일한인 참상을 독일신문에 기고하자 그를 찾아가 일본의 대량학살 진상을 듣고, 1923년 10월 26일 베를린에서 유럽 최초의 재독한인대회를 개최해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다. 한글학자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로서도 재조명되야 할 것이다.

유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 베를린에서 결성된 유럽 최초의 유학생 단체.

독일에 유학 한인학생들을 중심으로 1921년 1월 1일 베를린에서 유럽 최초의 유학생단체인 유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를 결성하였다. 유덕고려학우회를 창립할 당시 주요 인물은 김갑수)·윤건중 등 11명 내외였다. 설립 목적은 학생 자체의 발전과 친목을 도모하고 한인의 자치와 외교에 관한 활동을 주관하기 위함이었다.

유덕고려학우회에서 1920년대 독일 거류한인들의 수를 조사한 바에 따르면, 1923년의 경우 한인거류인은 55명이고 유학생은 10개 대학 33명으로 총 88명이었다. 주요 인물은 간사장을 맡고 있었던 김갑수와 서무를 맡고 있었던 윤건중 등이었으며, 1923년의 경우 이극로(李克魯)·김준연(金俊淵) 등이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1924년 기록에 의하면 서무 또는 서기에 이극로, 회계에 김필수(金弼洙)가 활동하였던 것으로 나타난다. 일제의 자료에 의하면, 1924년 5월 현재 한인 유학생은 58명이라고 하고, 1925년 4월경에는 52~53명 정도라고 한다.

유덕고려학우회의 사무실은 베를린의 Kantstraße 122번지였고, 자신들의 기관지로『회보(Heba)』라는 잡지를 발행하여 재독한인의 동향과 국내외의 소식을 알렸다. 이 잡지는 1925년 10월 당시 제4호가 발간된 것으로 보아, 1923년 10월 26일 개최된 ‘재독한인대회’ 이후부터인 1924년경에 출간된 것 같다.

유덕고려학우회의 회원들은 대부분 고학으로 학업을 유지하는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학생 상호간의 구제활동과 상해 임시정부를 지원 및 대외선전활동, 유럽에서 개최되는 민간차원의 국제대회 참가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특히, 유덕고려학우회에서는 1921년 11월경「통고문」이라는 선전문을 발표하여 임시정부 지지와 존속을 위한 입장을 대내외적으로 선포하였다.

1923년 9월 1일 일본에서 이른바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이 발생하였다. 그런데 일제는 대지진 피해 대책이 미진하여 민중폭동으로 이어질 것에 겁을 먹었고, 이같은 불만을 돌리기 위한 돌파구로 무고한 재일 한국인을 학살하였던 것이다.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집단 학살하였다는 사실이 독일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독일인으로 동양미술을 전공한 부르크하르트 박사가 『보시쉐 자이퉁(Vossiche Zeitung)』 1923년 10월 9일자에 「한인에 대한 대량학살」이라는 제목으로 그가 직접 목도한 바를 게재하였던 것이다. 부르크하르트 박사가 쓴 기사를 본 재독 한인들을 크게 분노하였고, 유덕고려학우회에서는 10월 12일 ‘한인학살’과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을 전단을 제작하여 유럽과 미주, 상해 임시정부에 배포하였다. 이를 통해 재독한인들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항일의지를 대외에 알렸다.

유덕고려학우회에서는 한인들의 피해를 조사하기 위해 그해 10월 18일 고일청과 황진남을 부르크하르트 박사와 면담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10월 26일 독일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독일에 있는 한인들의 위대한 회의(Great Meeting of Koreans in Germany)」라고 일컬어지는 ‘재독한인대회’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이 대회는 일제가 관동대진재 때 저지른 만행을 세계 각국에 널리 알릴 목적으로 개최되었는데, 관동대지진 발생 시 일제의 만행으로 당한 한인들의 억울한 죽음과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를 규탄하였다. 그리고 재독한인들은 독일어 전단지 5천부, 영어 전단지 2천부를 인쇄하여 해외 한인사회와 각국 정부와 기관 등에 배포하였다.


유덕고려학우회전단지(독문) 1923년10월26일

유덕고려학우회가 재독한인대회에서 배포한 독일어 전단지는「한국에서 일본의 유혈통치(Japanische Blutherrschaft in Korea)」이고, 영문으로는「Japan`s Bloody Rule in Korea」이다. 이 선전문은 영문과 독문으로 만들어 각국의 주요 정부와 국민들에게 배포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이었다.

재독한인대회에서 배포한 선전문에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지도가 크게 그려져 있다. 선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 부분은 오랜 역사를 가진 한국의 독립된 역사 전통과 이를 침해한 일제의 침략과 식민통치,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 사실 등을 적고 있다. 두 번째 부분은 관동대지진으로 나타난 일제에 의한 한인참상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은 한국독립의 열망을 밝히고 독립을 위한 한인들의 투쟁을 각국의 정부와 국민들이 적극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 대회에서 재독 한인들은 일제의 한국지배를 비난하고 독립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 본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후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2019년 10월 11일, 1142호 20-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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