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날 특집]
2019년 10월 9일은 573돌 한글날

한글날의 유래

한글날이 오늘날과 같이 10월 9일로 정해지게 된 데에도 곡절이 많았다. 세종은 한글을 만드는 작업을 은밀하게 추진했기 때문에, 실록에도 한글 창제와 관련된 기록이 분명히 나오지 않는다. 왕과 관련된 대부분의 사건은 날짜를 정확히 명시해서 기록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한글 창제와 관련된 기록은 실록에 전혀 보이지 않다가 1443년(세종 25) 12월 조의 맨 끝에 날짜를 명시하지 않고서 그냥 ‘이번 달에 왕이 언문 28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3년 뒤인 1446년(세종 28) 9월 조의 맨 끝에 역시 날짜를 명시하지 않고서 ‘이번 달에 훈민정음이 완성되었다(是月訓民正音成)’는 기록이 나온다.

이 두 기록을 놓고서 현대의 학자들은 약간의 혼란에 빠졌다. 그래서, 1443년 12월에 한글이 일단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거기에 문제점이 많아서 수정·보완하는 작업을 3년 동안 해서 1446년 9월에 한글을 제대로 완성했다는 식으로 해석을 내리게 되었고, 그렇다면 1443년 12월보다는 1446년 9월을, 한글이 만들어진 시기로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실록에 9월 며칠인지 날짜가 명시되어 있지 않으니 그냥 9월 그믐날로 가정하고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29일을 한글날로 정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40년대에 방종현(方鍾鉉) 선생이 실록의 1446년 9월 조의 기록은 문자로서의 한글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책(소위 해례본)이 완성되었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함을 지적하였다. 실록의 1446년 9월 조의 기록을 잘못 해석하였던 학자들은 한편으로 민망하긴 했지만, 1446년 9월에 훈민정음이 반포되었으니 이 때를 한글날로 정해도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식으로 변명을 하였다. 그래서 10월 29일이 한글날로 계속 유지되었다.

그러나 1446년 9월에 훈민정음이 반포되었다는 것도 근거가 없는 주장이다. 실록의 1446년 9월 조 기사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원고가 완성된 것을 세종에게 보고하는 내용이다. 당시 원고가 완성된 뒤에도 책이 간행되어 신하들에게 하사되기까지는 통상 몇 달 이상 걸린다. 따라서 1446년 9월에 훈민정음이 반포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다가 훈민정음 해례본의 원본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그 정인지의 서문에 ‘세종 28년 9월 상순’이라고 날짜가 적혀 있다. 역시 정확한 날짜는 아니나 애초에 9월 그믐으로 잡았던 것에서 20일 정도 앞당길 필요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10월 29일에서 20일을 앞당겨서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게 되었다.

한글날이 정해지게 된 경위는 이렇게 우여곡절이 많았고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으나, 세종이 한글을 만든 취지와 한글의 과학성을 온 국민이 되새겨 볼 기념일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한글의 보급

한자와 한문을 공부할 기회가 없는 일반 백성들도 문자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세종의 취지는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매우 파격적이고 개혁적인 것이었으며, 그런 생각이 실제로 실현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렸다. 우선 지배층은 한문을 사용한 공식적인 문자 생활을 여전히 유지하였고, 여기에 한글이 침투할 여지는 거의 없었다. 대신 한글은 한자, 한문과는 차별적인 역할을 맡음으로써 자신의 세력을 서서히 확장시키게 된다.

한글이 일반 백성들을 위해 만들어진 문자인 만큼, 한글은 우선 백성들 사이에서 주요한 기능을 하게 되었다. 지배층 중에도 한글을 사용할 줄 아는 이가 늘어 갔지만, 이들은 한자와 한문이라는 공식적이고 특권적인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한글을 사용하여 글을 쓰는 일이 별로 없었다.

반면에 일반 백성들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에 점차 한글을 요긴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선조 임금의 한글 교서 같은 글은 당시에 한글이 백성들 사이에 상당히 보급되어 있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한글 사용을 확대하는 데 여성들의 역할이 컸다. 양반 사대부 계층에서는 여성도 한문 교육을 받는 일이 많이 있기는 했지만, 점차 한글을 많이 사용하게 된 듯하다. 그래서 여성들끼리, 또는 여성과 남성이 편지를 주고받을 때에는 주로 한글을 많이 사용했다. 또한 주로 여성들을 독자로 상정하는 책은 한글로 간행된 것들이 많다. 이 또한 한글 사용의 확대에 있어서 여성이 담당했던 중요한 역할을 잘 보여 준다.

다음으로는 불교의 역할을 무시할 수 없다. 조선 시대에 표면적으로 숭유억불 정책을 쓰기는 했지만, 일반 민중들의 의식 속에서 불교는 여전히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특히 세종, 세조 등 한글 창제 및 초기의 사용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왕실 사람들은 불교의 신심이 독실하였다. 그래서 한글을 사용하여 할 수 있는 여러 사업 중에서도 특히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는 사업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다.

17, 18세기에 이르면 소설이 한글의 보급에 많은 기여를 하였다. 당시 지배층은 중국에서 들어온 한문 소설을 탐독하는 이들이 많았다. 이런 소설은 한글로 번역되어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많이 읽히게 되었다. 한글 소설은 초기에는 필사본으로 유포되다가, 상품 가치가 있기 때문에 방각본(상업적 출판물)으로도 많이 간행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한글은 여성과 일반 백성들 사이에 널리 보급되었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에서 한글로 읽고 쓸 줄 아는 국민의 비율은 당시의 서양에 비해 결코 낮지 않았던 듯하다. 병인양요 때 강화도에 왔던 프랑스 군인이 돌아가서 쓴 기록을 보면, 당시 조선의 일반 백성들의 집에 책이 많이 있다는 데에 놀라고 부러움 내지 열등감을 느꼈다는 대목이 있다. 당시 동아시아의 문화 수준이 유럽에 비해 결코 처지지 않았던 것이다.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

한말에 일어났던 한글운동이 3·1운동 후 다시 일어나면서, 1921년 12월 뒤에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된 조선어연구회가 창립되었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사전편찬회가 조직되었다.

이로써 민족의 숙원이며, 문화민족의 공탑이요 민족정신의 수호인 사전을 만들기 위한 일이 시작되어, 사전 편찬의 바탕이 되는 「한글맞춤법통일안」·「표준어사정(標準語査定)」·「외래어표기」 등을 제정하는 등 말·글의 연구 및 정리, 보급을 계속하고 있었다.

한편,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중국 침략을 목전에 두고 조선 민족에 대한 압박을 한층 더해갔다.1936년에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을 공포한 후, 1937년에는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회원을, 1938년에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회원을 검거하였다.

또한, 조선민족사상을 꺾고 나아가 조선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조선어 교육을 단계적으로 폐지하였다. 1941년에는 「조선사상범 예방구금령(朝鮮思想犯豫防拘禁令)」을 공포하여 독립운동가를 언제든지 검거할 수 있는 길을 터놓았다.

이처럼 일제 탄압이 숨막히게 조여들자 조선어학회는 사전의 편찬을 서둘러 1942년 4월에 그 일부를 대동출판사에 넘겨 인쇄를 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함흥영생고등여학교 학생 박영옥이 기차 안에서 친구들과 한국말로 대화하다가 조선인 경찰관인 야스다에게 발각되어 취조를 받게 된 사건이 벌어졌다.

일본 경찰은 취조 결과 여학생들에게 민족주의 감화를 준 사람이 서울에서 사전 편찬을 하고 있는 정태진임을 파악하였다. 같은 해 9월 5일에 정태진을 연행, 취조해 조선어학회가 민족주의단체로서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이로써 일제는 3·1운동 후 부활한 한글운동을 폐지하고, 조선민족 노예화에 방해가 되는 단체를 해산시키고 나아가 조선 최고의 지식인들을 모두 검거할 수 있는 꼬투리를 잡게 되었다.

같은 해 10월 1일, 첫 번째로 이중화(李重華)·장지영(張志暎)·최현배(崔鉉培) 등 11명이 서울에서 구속되어 다음날 함경남도 홍원으로 압송되었다. 이를 시작으로 하여 잇따라 조선어학회에 관련된 사람이 검거되어, 1943년 4월 1일까지 모두 33명이 검거되었다. 그리고 이 때 증인으로 불려나와 혹독한 취조를 받은 사람도 48명이나 되었다.

사건을 취조한 홍원경찰서에서는 사전 편찬에 직접 가담했거나 재정적 보조를 한 사람들 및 기타 협력한 33명을 모두 「치안유지법」의 내란죄로 몰았다.

이들에 대한 함흥지방재판소의 재판은 1944년 12월부터 1945년 1월까지 9회에 걸쳐 계속되었다. 이극로 징역 6년, 최현배 징역 4년, 이희승 징역 2년 6개월, 정인승·정태진 징역 2년, 김법린·이중화·이우식·김양수·김도연·이인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 장현식 무죄가 각각 언도되었다.

이극로·최현배·이희승·정인승 등 판결에 불복, 바로 상고했으나 같은 해 8월 13일자로 기각되었다. 그러나 이틀 뒤인 8월 15일 조국이 광복되자 8월 17일 풀려나왔다.

 

조선말 큰사전 발행

1945년 광복과 함께 감옥에서 풀려난 한글학자들은 중단했던 <조선말 큰 사전>의 편찬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사전 원고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원고를 찾지 못한다면 우리말 사전의 편찬이 다시 수십 년간 미뤄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함흥에서 서울로 백방으로 찾아다녔지만 소용이 없었다. 일본이 태워 없앤 것으로 짐작만 할 뿐이었다.

그러는 사이 서울역 창고에서 <조선말 큰 사전>의 초고가 발견되자 학계는 흥분에 휩싸였다. <조선말 큰 사전>의 초고를 손에 든 한글학자들은 먼저 원고의 정리에 들어갔다. 일제강점기 일본의 억압과 인력 및 경비의 부족으로 만든 사전 원고는 보완할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어휘의 통합과 분리, 추가, 삭제 등 원고의 전면 손질에 들어간 지 2년여가 지난 1947년 10월9일, 첫 번째 <조선말 큰 사전>이 발간됐다. 총 원고 분량의 약 6분의 1 가량을 탈고한 결과물이었다. 조선어학회와 출판사는 첫 번째 사전의 출판 때부터 책값을 싸게 책정해 구독자가 쉽게 구입할 수 있도록 했다.

이후 1949년 5월 둘째 권이 발행되었다. 1950년 6월에는 셋째 권이 제본 중이었고, 넷째 권은 인쇄 마무리 단계까지 진행되었다. 그런데 그 무렵 뜻하지 않은 전쟁이 일어났다. 서울은 북한군에게 함락되어 조선어학회가 위치한 을지로의 새 회관 건물이 모두 불에 타버렸다. 전쟁으로 인쇄는 중단되었고, 조선어학회 이사장 집에 있던 4, 5, 6권의 원고 또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에 10여 명의 한글학자들은 불타지 않고 남아 있는 옛 회관에 숨겨둔 원고를 한 달 동안 베껴 쓰고 또 베껴 써 두 겹 독으로 땅에 묻었다. 원본은 천안으로 옮겨 땅속에 따로 묻어두었다.

한글학자들은 피난 중에도 사전 편찬 집무를 이어갔다. 그리하여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10월28일까지 넷째 권 원고 교정을 마칠 수 있었다. 1953년 1월7일부터는 전주에 임시 사무소를 차리고 다섯째, 여섯째 원고에 대한 수정도 계속해 나갔다. 결과물은 5월26일 완성되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중에도 중단하지 않았던 조선어학회의 사전 편찬 작업은 뜻하지 않은 변수를 맞는다. 1953년 4월27일에 이승만 독재 정권은 한글 간소화를 강요하는 훈령을 공포한다. 이른바 한글파동 사건이다. 이승만 정권은 이를 강행하기 위해 당시 문교부 장관인 김법린을 물러나게 했다. 아울러 한글학회의 큰 사전 편찬 사업을 지원하던 미국의 록펠러 재단 물자도 막아버렸다. 이승만 정권은 유네스코의 한글학회 사업 5개년 계획 원조도 외면했다.

하지만 정부의 ‘한글 간소화’ 정책은 사회 각계 지식인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권력의 지지 기반이 약했던 이승만 정권도 더 이상 정책을 강제할 수 없었다. 마침내 1955년 9월19일 대통령 담화로 한글 간소화 정책을 포기했다.

이에 따라 한글학회의 지원단체인 미국의 록펠러 재단도 원조를 재개했다. 1956년 4월26일에는 록펠러 재단의 문화부장인 파스 박사가 한글학회를 내방했다. 같은 해 9월부터 11월까지는 인쇄용 원조 물자가 여러 차례 배편으로 도착하기도 했다. 한글학회가 조선어 편찬 사업에만 몰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학회는 흩어졌던 편찬원들을 모으고 증원을 통해 4권의 지형 수정과 5권, 6권의 원고 수정을 병행했다. 동시에 한국전쟁으로 파손 또는 분실된 1권~3권 지형을 보완하고, 큰 사전 6권 전질을 망라하는 총괄 부록을 작성한다.

마침내 1957년 10월9일, 민족의 염원이자 얼이 녹아든 <우리말 큰 사전>이 28년 만에 완간되었다.

 

세계 속의 한글

한글의 우수성과 그 창제자인 세종의 공로가 세계적으로 알려져 유네스코에서는 1990년부터 문맹 퇴치에 공헌한 개인이나 단체에 주는 상의 이름을 ‘세종대왕상’이라 하여 수상하고 있다. 그리고 유네스코에서는 고문서 등 세계의 진귀한 문서들을 선정하여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고 있는데, 문자에 관한 것으로는 유일하게 훈민정음이 1997년에 지정되었다. 이로 때문에 훈민정음은 우리 민족의 보물을 넘어서서 인류 모두의 소유물이고 동시에 미래 세대에 전수되어야 할 가치물로 인정된 것이다.

이렇게 세계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한글은 이제 세계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세계 10위권 내외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국어와 한글은 세계 곳곳으로 확산하고 있는데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세종학당의 확산이다. 세종학당은 2007년 시작할 당시 3개국(미국, 중국, 몽골) 13개소로 시작하여 2013년 12월 현재 불과 몇 년 사이에 52개국 120개소로 늘어났다. 아시아, 유럽, 아메리카, 오세아니아를 넘어 아프리카에는 5개국에 5개의 세종학당이 설립된 것이다. 이러한 열기는 세계 여러 나라의 현지 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자 하는 열의로도 알 수 있다. 중국을 예로 들면 1990년대 초반 한국이 중국과 수교할 당시에 한국어 교육을 수행하는 현지 대학교는 4개 내지는 5개밖에 되지 않았지만, 2013년 현재 중국의 북부(동북 3성)를 넘어 중부와 남부 그리고 해안가인 동부와 내륙인 서부를 가리지 않고 한국어 교육의 열기가 확산하여 대략 200개 내외의 대학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 한국어와 한글, 이제 세계무대로 힘차게 뻗어 나가고 있는 도중이다.

2019년 10월 10일, 1142호 14-1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