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에 기억해야 할 인물 (3)

탄생 250년 주년 맞는 헤겔 ➀

독일 근대철학의 최고봉이자 변증법 철학자 헤겔(8월 27일)과 고전파 음악의 최고봉으로 평가받는 악성(樂聖) 베토벤(12월 17일)이 2020년 나란히 탄생 250주년을 맞는다. 헤겔 앞에 칸트가 있었다면 베토벤 앞에는 모차르트가 있었다. 이 둘은 칸트와 모차르트라는 찬란한 성취를 극복하기 위한 지난한 노력으로 각각 철학사와 음악사에서 전인미답의 경지를 개척했다.

두 사람은 젊은 시절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건과 인물이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이었다는 공통점도 있다. 헤겔은 1806년 나폴레옹을 보고 “세계정신을 봤다”고 했으며 매년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된 날이 되면 와인으로 자축했다. 베토벤이 가장 아꼈던 3번 교향곡은 원래 나폴레옹을 염두에 두고 작곡한 것이었으나 1804년 나폴레옹이 황제가 됐다는 얘기를 듣고 ‘에로이카(영웅)’로 제목을 바꿨다.

독일 관념철학을 완성한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헤겔은 일반 교육을 받은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은 들어본 대표적인 독일 철학자아다. 그의 철학은 마르크스 역사 이론의 선조이지만, 유물론자인 마르크스와는 달리, 실재는 궁극적으로 정신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정립/반정립/종합의 과정에 따라 실재가 발전한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그는 관념론자였다.

또한 그는 프로이센 국가 체제를 찬양하여, 그것이 신의 작품이며 완벽하고 인류 역사 전체의 절정이라고 주장했다. 프로이센의 모든 국민은 무조건 국가에 충성할 의무가 있으며, 국가는 국민을 원하는 대로 취급할 수 있다. 절대자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불린 무언가를 찬양함으로써 헤겔은 독일 민족주의, 권위주의, 군국주의 형성에 크게 기여했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헤겔의 생애

그가 살았던 시대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중대한 시기였다.

1789 년에 바스티유 감옥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 유럽에 퍼졌다. 헤겔이 열아홉 번째 생일을 맞기 직전이었다.

헤겔은 훗날 프랑스 혁명을 ‘영광스러운 새벽’으로 불렀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모든 생각하는 존재가 이 시대의 환희에 동참했다.” 헤겔도 환희에 함께했다. 어느 일요일 봄날 아침 그는 혁명으로 씨를 뿌린 희망을 상징하는 자유의 나무를 동료 학생들과 함께 심었다.

헤겔이 살았던 시기는 또한 독일 문학의 황금기였다. 헤겔은 괴테보다 스무 살 아래, 실러보다 열 살 아래였으나 그들의 원숙한 작품이 발표될 때마다 꼬박꼬박 음미했다. 그는 시인 횔덜린의 친한 친구였으며, 독일 낭만주의를 이끈 노발리스, 헤르더, 슐라이어마허, 슐레겔 형제 등과 동시대인이었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1770 년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뷔르템베르크 공국 궁정에서 하급 공무원으로 일했다. 다른 친척들은 교사나 루터파 성직자였다.

헤겔은 학창 시절에 두각을 나타냈으며 이름난 튀빙겐 신학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이곳에서 시인 횔덜린과 어리지만 매우 유능한 철학도 프리드리히 셸링과 친구가 되었다. 셸링은 헤겔이 알려지기 전부터 철학자로서 전국적 명성을 얻게 된다. 훗날 자신의 명성이 헤겔에 가려지자 셸링은 옛 친구가 자신의 사상을 가로챘다고 불평했다.

튀빙겐에서 학업을 마친 헤겔은 스위스의 부잣집에 가정 교사로 들어갔다. 뒤이어 프랑크푸르트에서도 비슷한 일을 했다. 이 시기에 헤겔은 계속해서 철학적 문제에 대해 읽고 생각했다. 종교에 대한 논문을 썼는데, 발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생각을 명료하게 다듬기 위한 것이었다.

1799 년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헤겔은 유산을 상속받았다. 헤겔은 가정 교사를 그만두고 친구 셸링을 따라 예나 대학교에 취직했다. 예나에는 실러와 피히테가 있었으며 셸링은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이에 반해 헤겔은 발표한 글이 거의 없었으며 비공식 강의에 만족해야 했다.

예나에서 헤겔은 한동안 셸링과 함께 《철학 비판 Kritische Journal der Philosophie》이라는 학술지에서 일하면서 논문을 여러 편 기고했다. 1803 년에 셸링이 예나를 떠났으며 헤겔은 첫 번째 주저 『정신현상학』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원고는 무사히 전달되어 1807 년 초에 출간되었다.

예나에서의 삶은 프랑스의 점령으로 차질을 겪었다. 학교가 폐쇄되었으며 헤겔은 1 년간 신문 편집자로 일하다 밤베르크 김나지움의 교장직을 받아들였다. 그는 9 년간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성공을 거뒀다. 그는 일상적인 업무 이외에도 학생들에게 철학을 가르쳤다. 학생들이 그의 강의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시기에 헤겔은 두툼한 『논리학』을 발표했는데, 이 책은 1812 년, 1813 년, 1816 년에 걸쳐 세 권으 로 출간되었다. 이제 그의 저작은 널리 인정받았으며 1816 년에는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철학 교수 자리를 제안받았다. 그곳에서 헤겔은 자신의 철학 체계 전체를 비교적 간략하게 천명한 『철학적 학문의 백과사전 강요』를 썼다. 내용 중 상당수는 헤겔의 다른 저작에도 들어 있다.

헤겔의 평판이 어찌나 커졌던지 프로이센 교육부에서는 베를린 대학교 철학과 학과장이라는 명예로운 자리를 제안했다. 당시에 프로이센은 폰 슈타인과 폰 하르덴베르크의 개혁으로 교육 체계가 정비되었으며 베를린은 독일 모든 주의 지적 중심지가 되어가고 있었다. 헤겔은 학과장 수락했으며 1818 년부터 1831 년 사망할 때까지 베를린 대학교에서 가르쳤다.

헤겔의 생애에서 이 마지막 시기는 모든 면에서 정점이었다. 그는 『법철학』을 출간하고 역사철학, 종교철학, 미학, 철학사를 강의했다.

독일어권 전역에서 그의 강의를 들으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으며 많은 수재들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그가 죽은 뒤에 제자들이 자신들의 필기를 덧붙여 그의 강의록을 편집하고 출간했다. 이런 식으로 『역사철학 강의』, 『미학 강의』, 『종교철학 강의』, 『철학사 강의』 등 여러 저작이 우리 손에 남았다.

1830 년에 헤겔은 명성에 걸맞게 베를린 대학교 총장으로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831년 61 세의 나이로 당시 베를린 지역에 퍼진 콜레라로 사망했으며, 자신의 희망대로 피히테 옆에 안장되었다. 그의 동료 한 명은 이렇게 말했다. “얼마나 끔찍한 공허인가! 그는 우리 대학의 주춧돌이었다.”

다음호에는 헤겔의 사상을 살펴보도록 한다.

2020년 1월 31일, 1156호 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