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과 프레데리크 쇼팽

남종석/폴란드한인연합회장

3.1운동은 1919년 3월1일, 일본제국의 강제합병에 반대하여 민족대표 33인이 중심이 되어, 전국적으로 벌인 비폭력이자 한민족 최대 독립운동입니다.

1910년 8월 29일 일본 제국에게 조선이 강제합병 당한 후,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후 우드로 윌슨(Woodrow Wilson)대통령이 제안한 14개조 중 ‘각 민족의 운명은 그 민족이 스스로 결정하게 하자’라는 이른바 민족자결주의가 알려지면서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희망의 분위기가 일어났습니다.

1918년 일본의 흉작으로 조선의 쌀을 대부분 일본으로 가져갔고, 이에 쌀값이 4배 이상 폭등하였고 그런 와중인 1919년 1월 고종황제가 사망했는데, 그에 따라 민심은 극도로 격앙되어 3.1운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뉴욕 타임즈는 3.1 운동에 대해 “조선인들이 독립을 선언했다. 알려진 것 이상으로 3.1 운동이 널리 퍼져나갔으며, 수천여 명의 시위자가 체포됐다”고 보도했고, AP통신은 “독립선언문에는 ‘정의와 인류애의 이름으로 2천만 동포의 목소리를 대표하고 있다’ 고 명시되어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3.1일 운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계기이고, 임시정부헌법에도 계승하고 있음을 명시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정통성은 3․1 운동에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나라를 잃은 폴란드에서 1810년 3월 1일 쇼팽이 탄생하였습니다. 쇼팽은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며, 폴란드인들이 자부심을 갖고 존경하는 최고의 인물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폴란드의 관문인 공항 이름도 “쇼팽국제공항”이고, 폴란드인들이 가장 즐기는 초콜릿, 보드카의 이름도 “쇼팽”이라는 브랜드로 전 국민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폴란드는 1772년 1차 영토분할, 1793년 2차 영토분할, 그리고 마침내 1795년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 의해 지도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에 의해 강대국의 완충지역을 만들기 위해 독일, 러시아로 부터 폴란드의 옛 영토를 되찾아 독립을 하게 됩니다.

쇼팽은 어릴 때부터 피아노에 재능을 보였으며, 7살 때는 폴로네이즈 두 곡을 작곡했을 정도였습니다. 주변 강대국에 분할 점령된 지 한 세대가 지나면서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열망 또한 컸을 것입니다. 쇼팽의 음악은 시련에 처한 폴란드인들의 민족의식을 자극하여 그들의 정체성을 상기시키고 민족적 자긍심을 고취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쇼팽의 첫 출판 곡은 폴로네이즈였고, 살아생전에 출판된 마지막 곡은 마주르카였습니다. 늘 조국 폴란드를 그리워한 쇼팽은 폴란드 민속 춤곡인 ‘마주르카’와 ‘폴로네이즈’를 통해 춤곡의 리듬을 살리면서도 동시에 예술적인 피아노 음악으로 완성시켰습니다.

1828년부터 폴란드를 떠나 독일, 오스트리아등지를 여행하다가 파리에 정착하였고, 결국 1849년 10월 17일 쇼팽은 “어머니… 나의 어머니…….”라는 유언을 남기고 39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파리에 묻힌 쇼팽의 묘에는 그가 폴란드를 떠나기 전 담아온 폴란드의 흙이 뿌려졌고, 후에 쇼팽의 심장은 유언에 따라 나중에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성당에 안치되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폴란드가 독립국가로서의 자리를 다시 찾았을 때 폴란드인들은 그들의 독립을 상징하기 위해 첫 번째로 한 것은 쇼팽 기념비를 세운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기념비도 폴란드가 겪은 역사적인 곡절을 그대로 따랐습니다.

1939년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었는데, 나치 독일은 바르샤바를 점령하고 난 후 그 쇼팽 기념비를 폭파했습니다. 기념비의 잔해는 모두 수거되어 주조 공장에서 녹여졌고. 나아가 나치 독일은 쇼팽 곡의 연주를 전면 금지했습니다. 쇼팽이 갖는 민족적 상징성을 잘 알고 있었던 나치 독일은 쇼팽 기념비 파괴가 폴란드인의 용기를 꺾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2차 대전 중 폴란드인들이 입은 피해는 컸습니다. 특히 바르샤바 봉기(1944년 8월1일부터 1944년 10월 2일까지 63일간)가 일어났을 때, 나치 독일은 야만적으로 바르샤바를 파괴했습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바르샤바의 인구는 150만 명에서 38만 명으로 줄었고, 바르샤바 건물은 85% 이상이 파괴되었고, 많은 역사적인 유물과 함께 쇼팽의 흔적도 사라졌습니다.

막대한 피해를 본 폴란드인은 전쟁 후 고심 끝에, 다른 곳에 신도시를 세우는 대신 잿더미가 된 바르샤바를 재건하기로 결정했고 철저한 고증을 거쳐 옛 모습 그대로 도시를 다시 세웠습니다. 동시에 그들은 바르샤바 시내중심부에 쇼팽의 기념비도 원래의 모습대로 다시 세웠습니다.

쇼팽을 기리기 위해, 1927년에 시작되어 1955년부터 5년에 한 번씩 열리는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는 세계 3대 콩쿠르중 하나로, 올해 10월 바르샤바에서 개최예정입니다. 2005년 임동혁, 임동민 형제가 2위없는 공동 3위를 차지하였고, 2015년 조성진이 1위를 차지하여 폴란드를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조성진은 폴로네이즈 ‘영웅’을 연주하여 폴로네이즈 상까지 수상하였습니다.

조성진이 연주한 쇼팽 폴로네이즈 ‘영웅’ – Chopin Polonaise in A flat Major ‘Heroic’ Op.53을 꼭 감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3.1운동을 맞이하여 나라 잃은 우리 민족, 독립을 위한 끈질긴 투쟁의 역사와 폴란드의 고난한 역사가 겹치고, 그 과정 속에서도 민족성과 정체성을 유지한 위대한 두 민족, 그리고 쇼팽의 음악은 부드럽고 연약함 가운데에서도 꿋꿋이 이겨나가려는 두민족의 애국심과 의지가 느껴집니다.

2020년 3월 6일, 1161호 16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