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독일 통일 30년
동서 냉전의 시작, 독일 분단 (1)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패의 향방이 결정된 이후 연합국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어떻게 하면 독일이 더는 침략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가장 효과적인 방안으로 거론된 것이 독일을 몇 나라로 분할하는 이른바 ‘독일 분할안’이었다. 이러한 독일 분할은 전쟁이 끝나기 훨씬 전인 1941년 말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수상, 소련 스탈린 서기장 사이에 공감대를 형성하였으나 구체적 논의로 발전되지는 못하였다.

이후 독일의 패전이 확실해지기 시작한 1943년 여름부터 독일 처리 문제를 본격적으로 논의했는데, 1943년 10월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와 1943년 11월 테헤란 정상회의에서 독일 분할 점령의 큰 틀이 완성되었다. 미국, 영국, 소련이 주축이 된 서방연합국은 마침내 1944년 9월 12일 ‘독일 내 점령구역과 대베를린 관리에 관한(betreffend die Besatzungszonen in Deutschland und die Verwaltungvon Groß-Berlin)’ 내용이 담긴 ‘런던의정서(Londonner Protokoll)’를 발표하게 된다. 런던의정서에서는 전후 독일 관리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37년 12월 31일자 경계의 독일은 점령 목적을 위하여 세 구역으로 분할되고, 베를린은 세 국가 권력의 공동관리 아래 존재하는 특별구역이 된다.”

여기서 ‘1937년 12월 31일자 경계’는 오스트리아 병합 이전 독일 영토를 말하고, ‘세 국가 권력’은 미국, 영국 소련 3개국을 의미한다. 런던의정서에는 전후 독일관리 국가에서 프랑스가 빠졌는데, 프랑스가 포함된 4개국 점령정책은 ‘얄타회담’에서 결정된다.

얄타회담

얄타회담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소련 흑해 연안의 크림반도에 있는 작은 도시 얄타에서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 처칠 수상, 소련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이 전후 처리문제로 회담을 했다. 여기서 회담 참석자들은 패전 후 나치독일을 미국·영국·프랑스·소련 4국이 분할 점령한다는 원칙에 최종 합의했으며, 연합국은 독일인에게 최저생계를 마련해주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데 합의하였다.

또한 나치독일의 군수산업을 폐쇄하거나 몰수한다고 선언하였고, 주요 전범은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열릴 국제재판에 회부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전후 배상금 문제는 위원회를 구성하여 위원회에 위임하기로 하였다. 이와 함께 몰로토프-리벤트로프조약에서 규정한 폴란드 동부 영토 대부분을 소련 영토에 병합하기로 합의하는 한편, 폴란드에는 동독 일부 지역을 주기로 하였다. 이는 독일 영토가 이전보다 3분의 1 정도 축소되는 것으로,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독일 영토가 결정된 순간이었다.

얄타회담에 참석한 루스벨트, 스탈린, 처칠 세 사람의 의견은 제각기 달랐다. 루스벨트는 첫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질서체제로 국제연합(UN)을 창립하고, 둘째, 소련을 가급적 빨리 대일본 태평양전쟁에 참전시키고 싶어 했다. 스탈린은 첫째, 국제 강국으로서 소련의 지위를 인정받고, 둘째, 폴란드를 포함한 동유럽에서 소련의 지배권을 확보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대일본전 참전을 구실로 극동지역에서 가능한 한 이권을 많이 확보하고 싶어 했다.

한편 처칠은 루스벨트와 달리 소련의 본질은 물론 앞으로 소련과 대립하게 될 것을 직관적으로 감지했다. 이에 처칠은 승전국 지위에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를 참가시키려고 모든 노력을 경주했다. 처칠이 프랑스를 옹호한 것은 현실주의 국제정치적 관점 때문이었다.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소련이 위협이 될 것으로 보았다.

또한 이러한 위협에 대처하려면 미국만 믿고 있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 수뇌부는 소련과 협력이 전후에도 지속될 것으로 믿었다.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때 전쟁이 끝나자 유럽에서 철수해버린 전례가 있었다. 미국이 전후 또다시 유럽에서 손을 떼고 가면 영국은 혼자서 소련과 맞서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처칠은 소련을 함께 견제할 세력으로 프랑스를 선택한 것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스탈린이 강력히 반대했는데도 처칠의 노력으로 프랑스가 전후 독일을 관리할 4개국의 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언싱커블 작전: 소련의 위협을 꿰뚫어본 처칠

언싱커블 작전(unthinkable operation) 계획도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전후 처리를 소련과 협력해 풀어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영국 수상 처칠은 처음부터 소련의 팽창 의도를 간파하고 전후 유럽에서 소련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려 얄타회담에서 는 프랑스를 연합군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1945년 소련과 전쟁을 대비하는 작전을 수립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언싱커블 작전(unthinkable operation)이다.

1998년 공개된 이 비밀작전 의 내용은, 소련이 점령한 중부유럽의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서방연합군의 의무를 부과’한다는 명분을 내세운 뒤 소련이 이에 동의하지 않으면 독일 주둔 소련군을 공격한다는 것이 이 작전의 주요 개요였다. 그러나 이러한 공격 계획은 성공 확률이 높지 않아 곧 폐기되었다. 두 번째 계획은 미국이 유럽에서 철수하고 소련이 북해와 대서양을 향해 전진할 때 영국이 방어하는 작전이었다.

결국 실행으로 옮겨지지 않은 이 작전으로 처칠은 소련의 위험성과 냉전을 예견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으로는 나치독일과 전쟁하기 전에도 나치독일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먼저 독일을 침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전쟁광으로도 평가받고 있다.(편집실)


교포신문사는 독일통일 30주년을 맞아, 분단으로부터 통일을 거쳐 오늘날까지의 독일을 조망해본다.

이를 위해 지면을 통해 독일의 분단, 분단의 고착화, 통일과정, 통일 후 사회통합과정을 6월 첫 주부터 10월 3일 독일통일의 날까지 17회의 연재를 통해 살펴보도록 한다 -편집자 주

2020년 6월 5일, 1173호 3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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