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30년(3)
동서 냉전의 시작, 독일 분단 ③

독일의 분단 : ·서독 정부 수립

 

베를린 봉쇄와 나토 창설로 소련과 합의해서 독일 단일정부를 수립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미국, 영국, 프랑스 3개국은 서방 점령지역 내에 독일 단독정부를 수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서방연합국은 1948년 7월 1일, 이른바 ‘프랑크푸르트 문서(Frankfurter Dokumenten)’에서 제헌의회와 서독에 대한 점령규약 원칙(die Leitsäze für ein Besatzungsstaut für Westdeutschland)을 밝히며 서방연합국 점령지역에서 독일 정부수립에 착수하였다.

‘헌법문제에 대한 전문가위원회(Ausschuss von Sachverständigen für Verfassungsfragen)’가 설치되었고, 서방 3개국 군정 당국자는 당시 서부독일지역 11주 정부에 연방헌법을 제정하라고 통보하면서 대표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지방정부를 이끌던 각 주의 총리들은 종국적으로 독일 분할을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판단에 따라 헌법 제정을 꺼려하였고, 이러한 이유로 ‘헌법’ 또는 ‘제헌의회’라는 용어 사용을 반대하였다. 결국 용어문제에서는 헌법 대신 기본법(Grundgesetz)을, 제헌의회 대신 헌법제정위원회(Parlamentarischen Rat)를 사용하기로 합의하였다.

1948년 9월 1일 본(Bonn)에서 기본법 초안 심의에 착수하여 1949년 5월 8일 기본법(Grundgesetz)이 의회평의회에서 찬성 53, 반대 12로 채택되었고, 곧이어 각 지방 의회들이 기본법의 승인을 선언하였다. 이 기본법은 1949년 5월 23일 공포되었으며 기본법 제145조 제2항에 따라 다음 날부터 효력이 발생하였다.

1949년 9월 15일 서독 의회 연방 총리로 콘라드 아데나워 선출

1949년 8월 14일에는 서방측 3개 점령지역에서 최초의 연방의회 의원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으며, 의회는 1949년 9월 7일 의회의 개원회의로 소집되었다. 9월 12일에는 최초 연방대통령으로 테오도르 호이스(Theodor Heuss)가 선출되었으며, 9월 15일에는 최초 연방 총리로 콘라드 아데나워(Konrad Adenauer)가 선출되었다.

1949년 9월 20일에는 연방장관을 임명하면서 내각 구성이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미국, 영국, 프랑스 3개국 서방 점령지역 내(서베를린 포함)에서 독일 정부가 공식 출범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독일연방공화국(Bundesrepublik Deutschland BRD), 즉 서독 정부이다.

한편 소련은 자신의 점령지인 동부독일에서 이미 1945년 중반부터 개별적인 전문분야, 곧 산업, 농업, 재정에 대한 중앙관리를 조직하였다. 1946년에는 독일공산당(KPD)과 사회민주당(SPD)을 합병해서 사회주의통일당(SED)을 결성하였다. 이어 1947년 말 ‘인민회

의’를 열고 1948년 8월 헌법초안을 의회에 상정했다. 동독 인민회의는 그로테볼(Otto Grotewohl)을 수상으로 선출하여 내각 구성에 들어갔고, 서독 정부 출범 1개월 후인 10월 7일 독일민주공화국(DDR, 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을 정식 출범시켰다. 이로써 독일은 전후 4년 만인 1949년 동독과 서독 두 나라로 분단되고 말았다.

1949년 10월 7일 독일민주공화국(DDR, 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정식 출범

본이 프랑크푸르트를 제치고 서독의 수도가 되기까지

서독 정부 수립과 함께 베를린을 대체할 새로운 수도를 결정하는 것이 서독 국민에게는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새로운 수도(엄밀한 의미에서는 통일까지 임시수도) 후보지로 네댓 도시가 올랐으나 결국 본과 프랑크푸르트 두 도시의 대결로 압축되었고, 당시 일반인들과 정계에서는 본보다 프랑크푸르트가 유력하다고 예상했다.

프랑크푸르트는 국제공항이 있고 중세시대 수백 년에 걸쳐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이 열린 도시였다. 게다가 1848년에는 국민의회를 개최, 전 독일지역에서 대의원이 참가해 국기, 헌법,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제외한 독일(소독일주의)의 결정 등 근대 독일을 출범시

킨 도시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다. 이에 반해 본은 베토벤 생가 정도가 내세울 수 있는 전부였다.

프랑크푸르트 시 발터인 콜브(Walter Kolb) 시장은 투표 결과가 발표되기도 전에 방송사와 환영 연설 녹음을 끝내놓고 독일 의사당이 현재 헤센방송국 자리인 프랑크푸르트 동부 시가지에 들어설 것이라고 발표할 정도로 프랑크푸르트의 승리는 확실했다.

그러나 1949년 5월 10일 의회에서 투표한 결과 예상과 달리 33표를 얻은 본이 29표를 얻은 프랑크푸르트를 누르고 서독 수도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결정에는 초대 수상 아데나워의 정치적 막후 활동이 결정적이었다. 쾰른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아데나워는 당시 수도 선정 문제를 기민당(CDU, 본 지지)과 사민당(SPD, 프랑크푸르트 지지)의 경쟁 사안으로 유도, 애초 프랑크푸르트를 지지하던 헤센주 기민당의원 6명을 결정적으로 본 지지로 돌아서게 만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수도 선정을 위한 1949년 9월 3일 재투표에서도 프랑크푸르트는 176표를 얻는 반면 본은 200표를 얻어 최종적으로 본이 서독 수도로 결정되었다.

 


교포신문사는 독일통일 30주년을 맞아, 분단으로부터 통일을 거쳐 오늘날까지의 독일을 조망해본다.
이를 위해 지면을 통해 독일의 분단, 분단의 고착화, 통일과정, 통일 후 사회통합과정을 6월 첫 주부터 10월 3일 독일통일의 날까지 17회의 연재를 통해 살펴보도록 한다 -편집자 주

2020년 6월 19일, 1175호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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