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30년 (4)
동서독: 분단의 고착과 냉전의 심화 ➀

패전 후 독일은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의 4개국에 분할·점령되었다. 이에 대해 독일은 최후까지 단일체로서의 상태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러나 동서 대립의 격화와 함께 분할점령은 고정화하고 1949년 9월에는 서방측 점령구역에서 독일연방공화국이 성립했다. 한편 소련 점령지역에서는 독일민주공화국이 수립됨으로써 독일의 분할은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된 독일의 1950년대는 서로 상이한 사회, 경제적 체제를 공고히 하는 과정으로 서독은 친서방정책을 그 근본으로 하는 서진정책을, 그리고 동독은 소련을 중심으로하는 사회주의 국가로의 발전의 길을 걷게 된다.

1949년 1963년까지 14년간 서독을 이끌어 온 아데나워 총리

– 1950년대의 서독: 경제 재건과 서독 주권의 확립

서독의 1950년대는 아데나워 총리의 시대라 불려질 수 있다. 아데나워는 1949년 서독의 초대 총리로 선출된 이래 총리직에서 사퇴한 1963년까지 14년간 독일의 이끌어 온 장본인이다.

서독 정부는 1949년 9월 수립되었으나 국방과 외교 정책 및 대외 무역이 1948년 9월 점령조례에 의해 미국, 영국, 프랑스 서방 3국의 통제하에 있었다. 이 때문에 서독은 서방 3국의 보호령과 같은 지위에 있었다. 따라서 초대 총리 아데나워의 외교의 주요 목표는 친서방정책을 추진하여 서독의 주권을 회복하고 다른 서방국들과의 동등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 자신이 1955년까지 외무장관직을 겸임했다.

먼저 경재재건에 있어서 아데나워는 통제경제 정책을 거부하고, 사회적 시장경제를 도입하여 복지지향적 자본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지향했다. 사회적 시장경제 도입으로 국가 간섭을 최소화하고, 창의성을 보장하면서 효율성과 생산성의 극대화를 기하면서 개인의 이익을 최대화하는 한편 공동체 정신에 입각한 사회복지 제동의 기틀을 닦아나갔다.

이러한 아데나워의 정책으로 짧은 기간에 전후 복구 문제를 극복하였고,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여 국민의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되었다. 초기 경제 정책은 기아와 생활필수품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 소비제 공업에 중점을 두었으나 1950년대 중반으로 가면서 중화학 공업 분야에 투자가 활발하게 진행되어 산업 생산량이 급격하게 증가되었다. 산업 생산량의 증가는 1960년대 까지 지속되었다. 경제 성장률도 1950년대부터 1960년까지 매년 평균 8.6%를 기록하였다.

이러한 경제 재던과 더불어 아데나워 정부는 서독의 주권을 회복하고 다른 서방국들과 동등한 권리 확보, 동독과의 체제경쟁에서의 우의를 목적으로 하는 대외 정책을 펼쳐나갔다.

스탈린 각서

1952년 3월 스탈린은 서방 3국에 독일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의사가 있음을 알리는 각서를 보냈다. 그 내용은 “동·서독 전 지역에서 자유선거를 통해 독일의 재통일을 제안한다. 그 조건으로 독일은 중립국가, 외국 군대의 완전 철수와 평화조약, 그리고 유엔 가입을 요구한다.”로 요약될 수 있다. 그리고 스탈린은 평화조약 초안에서 독일이 어떠한 군사동맹에도 가담하지 않을 의무를 조건으로 내세웠다.

서독 정부와 서방측은 이를 서구통합 과정과 유럽방위공동체 계획 및 서독의 서방 진영으로의 편입을 지체시키거나 방해하려는 책동으로 간주하고 스탈린의 제의를 거부하였다.

당시 야당이었던 사민당은 전승 4국이 즉각 협상에 들어가 유엔 감시하의 자유선거를 실시하도록 요구하였다. 일부 사람들은 서독 정부와 서방 3국의 상기와 같은 거부를 ‘잃어버린 통일의 기회’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아데나워의 자세는 확고했다. 그는 이 제안에 대해 “독일 전 지역을 진공상태로 만든 다음에 지리적인 인접성과 권력 수단을 통해 소련은 독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려고 한다”고 비판했다.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잿더미가 된 독일을 위해선 서방세계로의 편입이 ‘중립국 통일’보다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현실을 인정하고 힘을 길러 천천히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이에 대해 사민당(SPD)의 쿠르트 슈마허 총재와 보수신문인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은 “독일 통일의 기회를 놓쳤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아데나워의 친서방 정책은 국민 지지를 받았다. 1953년 연방선거에서 기민당(CDU)이 사민당(SPD)을 이긴 것이다.

이러한 스탈린 각성의 거부는 결과적으로 독일분단을 동 · 서간의 군사 · 정치적 대결의 전초기지화, 그리고 이러한 동 · 서대결은 독일분단을 심화시키는 악순환이 생겨나게 되었다.

파리 조약: 서독의 NATO가입

동서독 정부의 분리 수립에도 불구하고 독일분단이 확정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소련은 ‘스탈린 각서’에서 보듯 1955년 서독의 재무장과 나토 가입이 결정될 때까지 독일의 중립화 통일안을 계속해서 제안했다. 그러나 서방연합국들은 서독을 서방의 동맹국으로 받아들이기 위한 일련의 절차를 밟고 있었다. 1952년 미국, 영국, 프랑스는 ‘독일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의 주요 골자는 서독지역에서 점령정책의 종식, 독일통일과 관련된 독일 전체에 관한 연합국의 권리와 책임 확인, 서독에서 군대가 주둔할 권한 등이다. 여기서 연합국의 권리와 책임이란 향후 독일통일에 대해 연합국들이 결정할 권리, 즉 유보권 (Vorbehaltsrecht)을 의미하였다.

이어 서방연합국은 1954년10월 ‘파리조약’을 통해 서독의 재무장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결정하고 1952년에 체결된 「독일조약」을 재확인했다. 이에 따라 서독은 서방동맹의 일원이 됨과 동시에 기본적인 주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1955년 5월 이 조약의 발효와 더불어 서독은 주권과 동등권을 회복하였고 NATO에 가입하게 되었다. 서방측에서 서방 세계의 방위를 위한 서독의 기여문제가 논의되었을 때 아데나워 수상은 NATO 가입의 대가로 ① 서독의 전 독일에 대한 단독대표권의 승인, ② 독일민족의 단일성 회복을 위한 전승 4국의 책임, ③ 자유선거에 의하여 구성된 독일정부와 체결된 평화조약에서 독일 최종국경의 확정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소련은 1955년 ‘바르샤바조약기구’(WTO)를 창설하고 동독을 가입시켰다. 이로서 동서독은 미국과 소련주도의 양대 블록에 편입되었고 이는 독일분단의 고착화와 동서 냉전의 최전방이라는 역할을 떠안게 된 것이다.(편집실)


교포신문사는 독일통일 30주년을 맞아, 분단으로부터 통일을 거쳐 오늘날까지의 독일을 조망해본다. 이를 위해 지면을 통해 독일의 분단, 분단의 고착화, 통일과정, 통일 후 사회통합과정을 6월 첫 주부터 10월 3일 독일통일의 날까지 17회의 연재를 통해 살펴보도록 한다 -편집자 주

2020년 6월 26일, 1176호 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