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30년 (5)
동서독: 분단의 고착과 냉전의 심화 ②

할쉬타인 독트린: 동독 불승인 정책

1955년 9월 서독의 수상 콘라트 아데나워는 소련과의 외교관계 수립 및 전쟁포로 귀환 문제를 교섭하기 위해 모스크바를 방문한다. 서독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외교적 행보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지만,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독일 내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주장하면서 두 개의 독일 중 하나와만 외교관계를 맺을 것을 주장해 온 서독 정부에게 동독과도 외교적 관계를 맺고 있었던 소련과의 수교는 모순적인 외교정책이었던 것이다.

서독 정부는 소련과의 외교관계 수립으로 서독이 소련의 ‘2국가 이론’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불식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 서독 정부는 전보다 더 강력히 서독의 전 독일민족에 대한 단독대표권을 주장하게 되었다.

Walter Hallstein 외무차관

아데나워 수상은 1955년 12월 차관의 이름을 원용한 ‘할쉬타인 독트린’(Hallstein -Doctrine)을 발표하였다. 이 독트린의 주요 내용은 “동독에 대한 보장자로서 소련의 특수한 성격 때문에 소련에게는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였으나, 동독과 이미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거나 장차 외교관계를 수립하려는 모든 국가들에게는 서독이 외교관계를 단절하거나 거부하겠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에 따라서 서독은 1957년 유고슬라비아, 1963년 쿠바와 외교관계를 단절하였다. 이 정책은 비공산주의 국가들이 동독을 외교적으로 승인하는 것을 막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다.

할슈타인 원칙은 동독을 서방세계와 제3 세계 국가에서 효율적으로 고립시켰지만, 동시에 서독의 외교적 행보에도 제약을 가하는 양날의 검이었다. 결국 사민당의 빌리 브란트가 1969년 집권하면서 동구권 공산국가와 활발히 외교관계를 진행하는 동방 정책을 실시하면서 할슈타인 원칙은 서독의 외교방침에서 폐기되고 만다.

– 1950년대의 동독: 사회주의 국가로의 전환

독일 동부지역과 동베를린을 점령한 소련은 독일공산당(KPD)과 사회민주당(SPD)과을 합병, 사회주의통일당(SED) 출범시키고 1948년 8월에 헌법초안 상정, 그리고 서독정부 출범 1개월 후인 10월 7일 독일민주공화국(Deutsche Demokratische Republik DDR)을 정식 출범시켰다.

그러나 동독정부의 수립에도 불구하고 소련 외무부는 동독 정부에 행정권을 부여하였으나, 자치권은 주지 않았으며 동독지역에서의 소련의 무제한적인 권한과, 행정부, 군부, 경찰 조직에도 일정부분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나나치 청산과 관련해 민주적 개혁이 무엇보다 필요한 독일의 상황에서 소련의 제도를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널리 퍼져있었다. 이로 인해 친소 정당인 사회주의통일당은 형식적으로나마 민주적인 정권, 국민을 위한 민주적 권리와 자유를 추구하며 다른 정당들과의 긴밀한 협력을 추구하는 의회주의적-민주주의적 공화국임을 선포하였다. 이를 위해 동독정부는 동독 기민당 (Ost CDU), 동독자유민주당(LDPD), 민주농민당(DBD) 그리고 민족민주당 (NDPD) 등의 위성정당을 구성하였다.

이들 정당들은 사회주의통일당이 이끄는 동독의 국민전선의 일원으로 자신들의 재정을 의존하고 있었으며, 사회주의통일당에 의해 당 지도부가 임명되었고, 사회주의통일당의 정책에 따른 선거강령을 채택하는 등. 사회주의통일당의 위성정당으로서의 한계를 내보였다.

사회주의통일당은 표면상의 민주주의 제도 기관들을 설립한 후 자의적인 권력에 따라 입맛에 맞는 정책을 추진했다. 또한 정치 반대세력 또는 상대 진영들은 언제라도 당파정의를 기초로 한 형사법에 따라 다양한 종류의 탄압과 임의적인 체포를 당했다. 형식적으로는 대통령 빌헬름 피크(Wilhelm Pieck), 총리 그로테볼(Otto Grotewohl)이 정부수반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발터 울브리히트 서기장의 사회주의 통일당의 정치적 지배에 완전히 종속되었다.

동독 경제 재건을 위해 울브리히트 서기장은 동독을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 공화국”으로 규정하고. 농업집단화를 비롯한 신경제정책을 채용했는데 이러한 계획경제의 형태는 소련의 형태와 유사했다.

1949년의 2개년 계획, 1951년의 제1차 5개년 계획, 1964년에는 제2차 7개년 계획 등을 통하여 부흥을 이룩하고 공업생산고는 공산주의 세계에서 제2위를 차지하였다.

또한 재건을 위해 소련으로부터 산업기반시설과 산업설비를 들여왔는데, 이는 곧 동독의 경제는 소련 경제에 예속화를 의미했으며, 1950년에는 경제상호원조회의(코메콘)에 가입하여 소련의 경제권에 완전 편입되는 결과를 낳았다.

울브리히트 이러한 경제정책은 국내의 정치통제와 친소정책을 바탕으로 기술관료들을 양성하여 1950년대 동독이 2차 대전의 폐허를 딛고 경제수준을 향상시키는데 기여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대외정책에 있어서 동독은 정부수립 후 1950년 7월 폴란드와 조약을 맺고 오더 나이세 경계선(Oder-Neiße-Linie)을 국경선으로 확정하는 등 동구권 국가들과 각종 조약을 체결하였고, 1950년 9월에는 경제상호원조회의(코메콘)에 가입하였다.

또한 동독은 이른바 “1민족 2체제”의 동서독 동시 인정을 요구하는 울브리히트 독트린으로 서방국가들과 여러 가지 접촉을 시도하지만 서독은 할슈타인 독트린을 고수, 다른 서방국가들이 동독을 국제적으로 인정, 동독과 관계 정상화에 들어가는 것을 반대함으로 동독의 서방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은 좌절되었다.

결국 동독은 1955년 인민군(NVA: Nationale Volksarmee) 창설과 바르샤바조약기구 가입하게 되었고, 소련은 동독에 완전한 주권을 이양하였다. 이러한 동독의 움직임은 파리조약에 따라 1955년 나토에 가입한 서독과 함께 독일의 분단체제가 고착화됨을 의미하며, 독일문제가 심화되어가는 동서냉전의 핵심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을 의미하였다.(편집실)


교포신문사는 독일통일 30주년을 맞아, 분단으로부터 통일을 거쳐 오늘날까지의 독일을 조망해본다.이를 위해 지면을 통해 독일의 분단, 분단의 고착화, 통일과정, 통일 후 사회통합과정을 6월 첫 주부터 10월 3일 독일통일의 날까지 17회의 연재를 통해 살펴보도록 한다 -편집자 주

2020년 7월 3일, 1177호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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