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30년 (9)
베를린장벽의 붕괴로부터 독일통일까지 ➀

베를린 장벽 붕괴 전까지 동독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폴란드, 체코, 헝가리 등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국민들의 개혁요구에 시달리던 반면 동독은 사회주의권에선 소련에 이어 2위의 경제 강국으로 발전한 선진 복지국가로 통했다. 소련이 버티고 있는 한 동독이 무너질 가능성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동서독은 예기치 못했던 ‘베를린 장벽의 붕괴’ 라는 사건을 통해,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독일 통일을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이루어 냈다,

비스마르크가 말했던 “신의 외투자락이 흔들릴 때, 그 옷자락을 정치가는 재빨리 잡아야 한다”는 경구를 독일 정치인들은 놓치지 않고 통일로 이를 실현시켰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부터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까지 긴박했던 1년간의 중요한 역사적 과정을 되짚어 본다,

베를린 장벽 붕괴(1989119)

1989년 6월 폴란드가 정치 자유화를 선언하고 총선을 실시한 결과 자유민주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이런 기류는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으로 퍼졌다.

1989년 6월 28일 헝가리 새 정부는 개혁의지의 표시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철조망을 제거했다. 이 소식을 들은 동독 주민 1,000여 명이 헝가리로 여행을 떠난 뒤 그대로 오스트리아로 건너가 서독으로 향했다.

이 모습이 언론을 통해서 보도되자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현재 체코·슬로바키아로 분리)를 통해 동독을 탈출하는 주민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동독 정부는 10월 3일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을 폐쇄했다. 그러자 동독 주민들은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는 12만 명이 모여 국경 개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동독 공산당 서기장인 에리히 호네커 (Erich Honecker)는 시위 진압을 위해 동독에 주둔 중이던 소련군의 출동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더불어 소련은 동독 정부가 군병력을 동원해 유혈진압을 하려던 것도 막았다. 동독 공산당 내에서도 호네커에 대한 비난 여론이 들끓자 그는 10월 17일 자진 사퇴했다.

10월 18일 공산당 서기장에 오른 에곤 크렌츠 (Egon Krenz)는 크렌츠 신임 서기장이 권력을 물려받은 직후인 1989년 10월말, 경제전문 그룹의 대표인 게르하르트 쉬러가 신정부에 “동독 경제가 파산 직전의 상태”라고 보고했다. 그는 “동독이 현재의 국가 부채를 유지하기만 해도 국민의 생활수준이 25% 하락하며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동독 정부가 이 사실을 발표한 것은 처음이었고, 경제가 파산상태라는 정보를 들은 동독 주민들의 저항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크란츠 정부는 서독정부에 100억 마르크라는 대규모 자금을 즉각 지원하고, 매년 20억 마르크씩 지원해 달라고 서독 정부에 요구했다. 서독 정부는 경제 지원을 약속해 줄테니 전력 공급 독점권을 포기하고, 민주주의 정당과 자유선거를 허용할 것을 요구했다. 돈은 주는 조건으로 동독 가두시위자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주라는 것이었다. 동독 정권은 안팎에서 압박을 받은 것이다.

11월 4일 동베를린에서는 주민 100만 명이 모여 민주화와 통일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샤보프스키의 말실수가 부른 나비효과

이를 무마하기 위해 11월 9일 동독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여행 허가에 대한 출국 규제 완화(여행법 개정안)’ 관련 법령을 발표했다. 당초 여행법 개정안은 다음 날부터 시행될 예정이었고, 동독 정부의 의도는 여행허가 범위를 확대해 주민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불법 탈출 사태를 진정시키려는 것이었지, 완전한 여행자유화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

크렌츠 서기장은 11월 1일 소련 방문 당시 고르바초프에게 동독인들이 현금을 가지고 가지 않는 한 해외여행을 제한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11월 8일 완성된 여행법 개정안 초안도 ‘개인적인 해외여행 신청은 지금부터 특별한 전제조건 없이 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다.

이는 여권과 비자발급 절차를 대폭 간소화한 것일 뿐 출국비자 없이 해외여행을 허락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동독에서는 여권을 받아도 출국비자를 받아야 해외여행이 가능했기 때문에 비자발급 과정에서 여행자유화의 속도를 조절할 생각이었다.

더욱이 새 여행법 어디에도 이 내용이 베를린장벽에 허용된다는 내용은 없었다. 베를린장벽은 2차 대전 승전국 4개국(영국·미국·프랑스·소련)의 관리하에 있었기 때문에 동독 정부가 결정할 사항은 아니었다.

1989년 11월 9일 저녁 6시 55분, 매일 열리는 기자회견이 1시간 동안 진행된 말미에 동독 공보담당 정치국원 샤보프스키(Günter Schabowski)가 여행법 개정안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그는 “잠정적 여행규칙에 따라 누구나 개인적 여행을 신청할 수 있고, 그에 따른 허가는 즉시 내려질 것이며, 각 지방 경찰에게는 영구이주 비자를 신청서 없이도 즉석에서 발급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고 발표했다.

‘그 규정이 언제부터 발효되냐’는 이탈리아 기자의 질문에 “즉시, 지체 없이”라고 답했다. 한 기자가 “그것이 서베를린에도 해당되는가”라고 보충질문을 하자 샤보프스키는 “그렇다, 내가 아는 한 동독과 서독, 동독과 서베를린의 모든 국경 검문소가 다 해당된다”고 답변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샤보프스키의 ‘말실수’다.

저녁 7시 5분 ‘AP통신’​이 가장 먼저 ‘동독이 국경을 개방했다’고 보도했고, 서독 공영방송인 ARD의 8시 뉴스에서도 같은 내용이 보도됐다.

많은 동서독 주민들이 샤보프스키의 회견과 TV 뉴스를 목격했고, 동서독 주민들 사이에선 “모든 여행제한이 풀리고 출국비자도 필요 없게 됐다”는 소문이 퍼졌다. 동독 주민들이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국경 초소에 몰려들었고, 22시 30분 국경 바리케이드가 열렸다. 자정쯤에는 거의 모든 국경통로가 열렸고, 이어 2주 동안 300만 명이 서베를린과 서독을 방문했다.

2020년 8월 7일, 1181호 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