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30년 (10)
베를린장벽의 붕괴로부터 독일통일까지 ②

베를린 장벽 붕괴 전까지 동독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폴란드, 체코, 헝가리 등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국민들의 개혁요구에 시달리던 반면 동독은 사회주의권에선 소련에 이어 2위의 경제 강국으로 발전한 선진 복지국가로 통했다. 소련이 버티고 있는 한 동독이 무너질 가능성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동서독은 예기치 못했던 ‘베를린 장벽의 붕괴’ 라는 사건을 통해,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독일 통일을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에 이루어 냈다,

비스마르크가 말했던 “신의 외투자락이 흔들릴 때, 그 옷자락을 정치가는 재빨리 잡아야 한다”는 경구를 독일 정치인들은 놓치지 않고 통일로 이를 실현시켰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작지 않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부터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까지 긴박했던 1년간의 중요한 역사적 과정을 되짚어 본다,

콜 서독 총리, 통독의 길10개항 제시 (19891128)

콜 서독 총리는 베를린장벽이 열리자 1989년 11월 28일 연방의회에서 동·서독이 궁극적인 재통일을 향한 준비 단계로 연방을 구성하는 내용 등을 담은 10개항으로 구성된 통독 안을 발표했다.

콜 총리는 이날 의회 연설에서 이 같은 단계적 통일 방안을 제시하면서 그러나 동독이 비 사회주의 정당도 참여하는 진정한 자유선거를 실시하는 경우에만 자신의 제안이 실현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번 제안이 『하나의 연방을 구축하기 위한 두 개의 독일 간에 국가 연합구조 (Confederative Structure)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며, 연방 창설을 위해 의회공동 협의체를 포함하는 양 독 자문위를 구성할 것 등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통독이 매우 어려운 문제인 만큼 동서진영 관계 개선 및 새로운 유럽 질서 창출과 연계돼 실현돼 나가야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콜 총리는 EC (유럽 공동체)가 동독에 준회원 자격을 부여할 것도 아울러 촉구했다. 이는 콜 총리 역시 독일통일이 급작스럽게 이루어지리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콜 총리의 ‘통일 독일을 위한 10개항 프로그램’에는 통일의 목표와 계획이 명시됐고, 이후 서독이 통일 과정의 주도권을 잡게 됐다는 점에서 이 프로그램 발표는 독일 통일의 중요한 분수령이 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콜 총리의 통독의 길 10개항 요지는 다음과 같다.

① 의료 및 재정부문을 포함한 다각적인 지원을 즉각 제공.

② 통신 망 확충 및 고속 전철 부설 등 환경개선을 위한 지원을 제공.

③ 동독 사회주의 통일당 (공산당)은 정치범 석방 및 시장경제 도입 등 자구노력에 박차를 가할 것.

④ 최근 모드로 총리가 내놓은「공동 동반자」제의를 수락.

⑤ 연합 구조를 형성, 이를 발판으로 연방을 구축하며 의회 공동 협의체를 포함하는 양 독 자문위를 구성해 정치문제 등도 논의.

⑥ 통독문제는 유럽통합 및 동서관계 개선과 연계시켜 실현시킬 것.

⑦ EC는 동독을 포함한 동 유럽국가에 대한 문호를 개방하고 동독과 무역협력 협정을 체결.

⑧ 유럽안보 협력 회의 (CSCE)를 환경보존 또는 동서무역 협력촉진 기구 등으로 성격을 전환.

⑨ 군축에 박차를 가할 것.

⑩ 동독 및 유럽안정 실현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

서독은 이후 통일·외교 정책을 집행하면서 이 프로그램의 원칙을 철저히 유지했다. 특히 독일 통일이 유럽 통합을 촉진시킨다는 점을 널리 알려 하나가 된 독일이 유럽 평화에 해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널리 설파했다.

동서독, 통화 경제 사회통합조약 체결(1990518)

1990년 3월 18일 동독 총선 결과, 예상을 깨고 공산당의 후신인 민주사회당이 참패하고, 신속한 통일을 약속한 독일연맹이 압도적으로 승리하면서 독일 통일은 기정사실화됐다. 독일연맹의 주축인 기독교민주연합과 사회민주당은 4월 5일 개원한 동독 의회에서 연립정부를 구성하고 서독정부와 통일협의를 개시했다.

총리에 취임한 로타르 드 메지에르(Lothar de Maiziere)는 4월 24일 서독의 수도 본(Bonn)에서 헬무트 콜 서독 총리와 화폐·경제·사회통합 원칙에 합의했다.

1990년 5월 16일 서독 재무장관인 테오 바이겔(Theo Waigel)과 발터 롬베르크(Walter Romberg)의 서명과 함께 동서독간의 ‘통화 ․ 경제 ․ 사회통합조약(Vertrag über die Währungs-, Wirtschafts- und Sozialunion)’이 체결되었다,

같은 해 7월 1일자로 발효되는 이 조약으로 동서독은 경제통합을 달성하여, 통화 단일화 등 경제통합과 사회통합을 이룩하였고, 1단계 통독과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였다.

‘통화 ․ 경제 ․ 사회통합조약 주 내용으로는 동독은 1990 년 7 월 1 일부터 서독의 경제, 법률체제를 받아들이고, 통화도 서독의 마르크 (D-Mark)를 공식 통화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서독 마르크와 동독 마르크(DDR Mark)의 교환비율은, 임금, 급여, 연금, 임대료 및 기타 “반복적으로 지불”되는 부분은 은 1:1로 전환되고, 현금 및 은행잔고는 아래의 원칙에 따르게 되었다.

14세 미만의 어린이는 최대 2,000 동독 마르크를, 15세-59세의 경우 최대 4000 동독마르크, 60세 이상은 6000 동독마르크를 1:1로 서독 마르크로 교환이 가능하였다. 한도 금액 이상의 현금은 2(동독 마르크):1(서독 마르크)로 교환되었다. 이로서 동독은 자체 예산 및 통화정책에 대한 결정권을 포기하고, 서독의 세제를 도입, 실시해야 하는 등 동서독의 경제적 통합이 완료되었다.

1182호 31면, 2020년 8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