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인학 편집장과 함께하는 역사산책(1)

마인츠(Mainz): 유럽의 전()역사가 살아 숨 쉬는 도시

– 율리우스 시저에서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까지 –

역사산책은 사건의 기록이라 할 수 있는 역사서가 아니라, 당시의 사람들 그들의 삶속으로, 그들의 경험했던 시대의 현장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기쁨과 좌절을 함께 공유하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이다.

또한 작은 벽돌 한 장, 야트막한 울타리, 보잘 것 없이 구석에 자리 잡은 허름한 건물의 한 자락이라도 내 자신이 관심과 애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면, 그들은 곧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따라서 역사산책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내 삶의 터전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Bild von lapping auf Pixabay

프랑크푸르트와 하이델베르크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반면, 두 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라인란트 팔츠(Rheinland-Pfalz) 주도인 마인츠는 우리에게 친숙하지 않다.

마인츠에 대해서는 유럽의 금속활자를 발명한 구텐베르크의 고향, 마인츠 돔 정도, 마인츠에 대해 조금 잘 아는 사람들도 독일 제2방송인 ZDF가 위치해 있다는 점과 중세의 도시 정도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인츠는 기원전 30년대부터 나폴레옹이 유럽으로 진격해 신성로마제국을 해체한 1806년까지 독일뿐만 아니라 유럽 지역의 중심부였으며, 1793년에는 독일 최초로 시민혁명을 통한 마인츠 공화국(Mainzer Republik)을 선포하며 근대 시민국가의 이상을 독일 전역에 전파한 도시이기도 하다.

이렇듯 마인츠(Mainz)는 고대 로마부터 현대까지 유럽 역사의 중요 장면을 생생하게 내보이고 있는, 독일에서 몇 안 되는 도시이다.

왜 마인츠인가?

로마 국경을 지켜내는 라인 강변 2대 요충지였던 마인츠는 가톨릭의 중심지로 화려한 1000년의 중세 전성기를 보내고, 독일최초의 시민혁명을 일궈내며, 봉건체제를 타파하고 근대 시민사회를 여는 선구자적 역할을 한 도시이기도 하다.

먼저 각 시대별로 마인츠를 간략하게 살펴본 후, 본격적인 역사산책을 시작하도록 한다.

로마시대 마인츠

마인츠는 시저가 현재 유럽지역 로마의 국경을 라인강 서쪽, 다뉴브강 남쪽으로 지역으로 규정한 이래, 로마제국의 유럽 최대의 군사, 행정의 중심지로 발달되어 왔다.

마인츠에는 공화정 말 로마의 2개 군단이 주둔하였으며, 로마 제국시대에는 4개 군단이 주둔하기도 하였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양자이자 후계자로 예정되어 있던 두루수스(Nero Claudius Drusus)와 아우구스투스의 오른팔이자, 사위인 아그리파(Marcus Vipsanius Agrippa)가 이곳 사령관을 역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 로마황제 선출에서 이들 군단이 가지는 정치적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라 할 수 있었다.

현재 1만 명 수용의 원형경기장, 네로 황제를 기리는 탑, 로마시대 개발된 수로, 로마사 박물관 등이 로마시대의 마인츠의 영광을 보여주고 있다.

중세시대의 마인츠

975년 빌리기스(Willigis) 대주교의 취임과 더불어 마인츠는 유럽지역 기독교 중심지로 거듭나게 된다.

알프스 이북에서는 유일하게 교황청 역할을 하는 성좌(Heilige Stuhl)로 지정된 마인츠는 유럽 모든 지역의 종교 및 정치의 수장 역할을 수행하며 중세 1000년 기독교를 대표하는 도시로 발전하였다.

1000년의 역사를 지난 마인츠 돔은 건축사적으로도 독일 4대 건축물에 속하며,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이 수차례 열렸으며, 중세 유럽 봉건제후와 관료들 전체 대표자 회의(2만 명 추산)가 정기적으로 열리기도 한 도시이다.

십자군 전쟁 시에는 원정군의 출발 지점으로 많은 십자군 병사들의 집결지이기도 하였던 마인츠는 또한 신구교간의 종교 갈등 및 종교전쟁(1618-1648)에서 가톨릭의 중심지로서 그 시작과 종말을 경험한 명실상부한 중세 전체를 상징하는 도시이기도 하다.

독일 시민혁명의 시작지 마인츠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이후, 프랑스 이외 유럽지역 최초로 자발적 시민혁명이 1793년 마인츠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결과 마인츠공화국(Mainzer Republik)을 수립하며, 독일 전역에 시민혁명의 불길을 번지게 하였다. 제후국들의 공동 전선으로 결국 마인츠공화국의 1년 반 만에 붕괴되었지만, 오늘날의 민주시민사회를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한 도시이기도 하다.

이후 1848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국민의회의 영향으로 남부 독일에 시민사회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을 때에도 마인츠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이를 기리는 “독일 시민혁명의 성지” 가운데 7개의 성지가 마인츠 시에 위치하고 있다.

2013년 3월에는 마인츠 공화국 220주년 기념식이 전독일 차원에서 치러졌으며, 라인란트 팔츠 주청사 앞 광장이 마이츠공화국 광장(Platz der Mainzer Republik)으로 명명되었다.

격동의 19세기 현장 마인츠

19세기는 격동의 세기였다. 나폴레옹의 유럽 점령으로 오늘날의 유럽 지도가 형성되며 300여개의 소 제후국으로 나뉘어 있던 독일지역도 나폴레옹 전쟁 후 35개의 제후국으로 정리되었다. 이후 메테르니히체제로 유럽 지도는 다시 한 번 변화를 맞고, 이후 독일지역에서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휘하의 제후국들로 재편되었으며, 결국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전쟁인 보오전쟁(1866)이 발발하게 된다.

프로이센의 승리로 끝난 보오전쟁으로 마인츠는 프로이센에 병합되며 찬란한 마인츠의 2000년의 역사가 막을 내리게 된다.

마인츠 중앙역과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의 합동 기지로 활용하려 지어진 Proviant Magazin에서 우리는 그 현장을 경험할 수가 있다

이제 우리는 2000년의 도시 마인츠 속으로 들어가 보도록 하자.

보오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이 군사적 용도로 1884년 건설한 마인츠 중앙역을 출발해 중세의 1000년의 마인츠, 나풀레옹과 함께 맞는 격동의 19세기, 시민혁명과 프로이센으로의 병합에 따르는 마인츠 시민들의 영광과 좌절의 그 현장으로 함께 떠나보자.

마인츠 시내 Römerpassage 지하의 1Isis- und Mater Magna 신전
기원전 3세기 켈트족의 신전을 원향대로 보존되어 있다.

1) 모곤(Mogon)의 땅 마인츠 – Mogontiacum –

로마인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그들의 타고난 개방성이다. 로마인들은 정복전쟁을 통해 그들의 영토를 넓혀가고, 제국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피정복민들의 정치 제도를 인정하고, 현지인이 실질적인 통치를 하도록 시스템을 구축하였다. 종교정책에서도 이와 동일하게, 피정복민 고유의 종교를 인정하였고, 그들 신앙의 핵심인 신들도 공식적으로 신으로서 인정하여 그들을 존중하였다.

이런 이유로 로마 제국에서의 신들의 숫자는 10만을 헤아릴 정도로 많았으며, 이러한 종교적 개방성은 오늘날까지 잘 보전되어 있는 로마 시내의 판테온(Pantheon)에서 잘 찾아볼 수 있다.

판테온은 그리스어로 Pan(범, universal)과 Theon(신)의 복합어로서 모든 신들을 모시는 신전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말로는 “만신전”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여기서 만은 숫자 10,000이라기 보다는 “모든”의 뜻으로 쓰인 것이다.

다시 마인츠로 돌아가 보자

로마가 마인츠를 점령했을 당시 마인츠 지역은 켈트(Kelt)족의 생활터전이었다.

이들은 마인츠 지역에서 기원전 4세기부터 그들의 문화와 종교를 영위하고 있었으며, Mogon 신을 섬기고 있었다.

이곳을 점령한 로마인들은 그들을 존중하여 새로운 점령지의 이름을 “모곤의 땅 (Mogont-i-acum = Land des Mogon)”으로 명명하며 이들의 종교와 기존 사회체제를 존중하였다.

마인츠는 로마시대 이미 5만 명 인구를 보유

로마는 라인강변지역 방비를 위해 현재 노이스(Neuss)지역과 마인츠 지역에 각 2개 군단 총 4개 군단을 배치하여 게르만 족의 침입에 대비하고 있었다. 이후 제국 시대에는 4개 군단씩 총 8개 군단까지 배치되기도 하였다.

당시 로마군단의 편재는 1개 군단이 대략 6000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에 더불어 현지인으로 구성된 동수의 보조군이 합류하였다. 따라서 로마군 1개 군단은 보조군 포함 12,000명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마인츠에는 2개 군단 24,000명의 군인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제국시대에는 그 숫자가 48,000명에 이르기도 한 것이다. 이 숫자는 현재 주한 미군이 23,000명, 주일 미군 숫자가 39,000명임을 생각해 볼 때, 마인츠의 군사적 중요성이 얼마나 컸던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더욱이 로마 정규군은 독신일지라도, 현지인으로 구성된 보조군들은 가족들이 있었을 것이고, 당시 가족 수를 최소 3인으로만 계산해 보아도, 2개 군단일 경우 정규군 12,000명, 보조군 12,000명 그들의 가족 24,000명 등 최소 50,000명의 인구가 추산될 수가 있다. 이후 마인츠시가 인구 5만에 도달했던 때가 1871년이고 10만에 도달한 해가 1908년임을 생각해 보면 로마시대 마인츠 시의 규모가 상당했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러한 마인츠의 위용은 당시 알프스 이북 지역에서는 가장 큰 원형극장(amphiteater)이 건설되었다는 점에서도 살펴볼 수가 있다. 약 10,000명이 착석할 수 있는 원형극장은 관객석 폭의 규모가 116m에 이르고 무대의 높이는 42m에 이른다,

1999년부터 시작된 발굴 및 복원작업은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마인츠 시는 원형극장이 위치한 S-Bahn역 “Mainz Nord”를 2006년 “Mainz – Römisches Theater”역으로 개명하였다.

1187호 20-21면, 2020년 9월 1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