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속의 한국 문화재 (15)
독일에서 한국으로 반환된 한국문화재들 ②

독일에서 한국으로 반환된 한국문화재들 ②

그동안 한류를 통해 한국 문학, K-Pop, K-Beauty, K-Drama 등 다양한 한국 문화가 독일에 소개되어 왔다.

그러나 2018년 기준 독일 내 한국 문화재는 총 1만876점. 일본, 미국에 이어 세 번째로 우리 문화재를 많이 소장하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매우 생소하다. 더욱이 독일이 보유하고 있는 한국 문화재 규모가 유럽 국가 중 최대임에도 불구하고 한국 예술 전문가가 거의 없다는 점은 매우 안타깝기만 한 현실이다.

실제로 독일 박물관은 엄청난 양의 한국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문화재는 동아시아 미술품으로 광범위하게 분류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일본 및 중국 문화재에 밀려 학술적 연구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태다.

한국 문화재를 2000점 이상 소장하고 있는 베를린인류학박물관, 함부르크 Museum am Rothenbaum이 단 한 점의 한국 문화재도 전시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이렇듯 오랜 기간 한국 문화재는 그 가치가 발견되지 않은 보물 상태로 머물러 있다.

교포신문사에서는 특집연재 “독일 속의 한국 문화재”를 통해 독일 내 한국문화재의 현황을 소개하며, 재독한인들과 한국 정부의 “독일 속의 한국 문화재”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키고자 한다.


독일 상트 오틸리엔 선교박물관의 한국 문화재 반환

20세기 초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이 수집한 한국문화재 1700여 점을 소장한 독일 상트 오틸리엔 수도원이 여러 점의 한국문화재를 영구대여와 기증 형식으로 돌려주고 있다. 2005년 경북 칠곡 왜관수도원에 ‘겸재 정선 화첩’을 영구 대여한 것을 시작으로, 2014년과 2016년에는 희귀한 식물 표본과 17세기 익산 지역 호적대장을 돌려줬다. 또 2018년 1월에는 수도원이 설립한 성 베네딕도회 오딜리아 연합회 소속 뮌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이 국내 최초의 양봉 교재로 알려진 ‘양봉요지’를 영구대여 형식으로 반환했다.

특히 2018년 5월에는 조선시대 후기 보병(보군)들이 입었던 면직물로 만든 갑옷인 ‘면피갑’을 기증 반환하기도 했다. 18세기 쯤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면피갑은 현재 국내외에 10여벌 밖에 남아 있지 않아 유물로서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았다. (지난 호에 소개)

100년전 독일신부가 벌꿀짜며 쓴 국내 첫 양봉교재 <양봉요지> 귀환

양봉이라고 하면 줄줄이 늘어선 벌집 행렬과 보호복 차림 인부들이 꿀을 잔뜩 머금은 양봉판을 꺼내 꿀을 짜는 광경을 떠올리게 된다. 이런 서양식 양봉기술을 처음 이땅에 들여온 이는 누구일까.

국내에서 근대 양봉의 선구자는 ‘구걸근’이란 한국이름을 쓴 독일인 신부다. 본명은 카니시우스 퀴겔겐(1884~1964). 1911년 성베네딕도 수도회 선교사로 서울 혜화동 수도원에 파견돼 40여년간 이땅에서 살다 독일로 돌아간 인물이다. 특이하게도 양봉에 관심이 많아 조선인들과 함께 직접 벌집을 만들어 꿀을 짜냈고, 1918년 서양 양봉기술과 경험을 가르치기 위한 교재를 우리말로 펴냈다. 국내 최초의 양봉술 교재로 알려진 <양봉요지(養蜂要誌)>다. 2015년 경북 칠곡군 왜관 성베네딕도 수도원에서 영인본이 발견돼 눈길을 모은 바 있다.

한국 양봉술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료로 평가되는 이 <양봉요지>의 원본 유일본이 최근 구걸근 신부가 처음 책을 낸지 100년만인 2018년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왜관수도원 등의 관련 기록에 따르면, <양봉요지>는 1918년 국문으로 편찬할 당시 등사본 150권이 발행됐다. 그중 일부가 출간 직후 독일 수도원에 발송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 뮌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 소장본 외에는 행방을 알 수 없다. <양봉요지> 원본은 왜관수도원에 선교사로 파견된 바르톨로메오 헨네켄(한국명 현익현) 신부가 2014년 독일 휴가 기간중 뮌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 도서관을 찾았다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한다. 그뒤 헨네켄 신부가 이 사실을 왜관수도원에 알리면서, 국내 양봉역사에서 이 책이 지닌 가치를 고려해 돌려주는 방안을 두 수도원이 논의하기 시작했고, 최근까지 수년간 교섭이 이어져왔다.

특기할만한 건 왜관수도원 쪽이 이 과정에서 관할 지자체인 칠곡군, 국외소재문화재재단 등의 전문기관, 연구자들과 긴밀하게 정보를 공유하며 협업했다는 점이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풍부한 문화재 환수 경험을 바탕으로 반환 방식과 반환 뒤의 학술연구, 보존방식, 영인본 제작 같은 실무작업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관할 지자체이자 국내 유일의 양봉특구인 칠곡군도 힘을 보탰다.

책의 존재가 알려지자 백선기 칠곡군수는 군내 농업기술센터를 통해 <양봉요지>에 가로쓰기 설명글을 붙인 현대어 해제본을 만들게 했다. 2017년 3월 원본을 소장한 뮌스터슈바르자흐 수도원의 원장인 미카엘 리펜 아빠스가 왜관 수도원을 찾았을 때는 책의 중요성에 대해 양봉 관계자들과 함께 설명하는 자리를 마련해 한국 반환을 기대한다는 뜻을 전하기도 했다.

이런 노력들이 쌓이는 가운데 왜관수도원 원장인 박현동 아빠스가 2017년 10월 뮌스터슈바르자흐수도원을 방문해 미카엘 리펜 아빠스와 영구대여 방식 반환에 대해 논의했고, 현지 수도원 장로회의 결정을 거쳐 책 출판 100주년인 2018년 1월에 영구대여 형식의 반환에 이르게 된 것이다.

남성용 혼례복 혼례용 단령반환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이 올해 3월에는 이번에는 1960년을 전후한 시기 사용했던 남성용 혼례복 ‘혼례용 단령’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에 기증했다.

기증된 단령은 1960년을 전후한 시기에 사용했던 남성용 혼례복이다. 박성실 전 단국대 교수는 “겉감은 비단이고, 안감은 1960년대 유행한 인조비단(비스코스레이온)을 사용했다”면서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인해 개량화된 복식이며, 시대 상황을 알려줄 수 있는 귀한 자료”라고 평가했다.

단령은 1959년 독일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에서 왜관수도원(경북 칠곡)으로 파견된 독일인 보나벤투라 슈스터 수사(한국명 주광남)가 수집했다. 1984년 상트 오틸리엔수도원으로 복귀한 보나벤투라 수사는 3년 뒤인 1987년 선교박물관에 이 단령을 기증했다. 보나벤투라 수사는 1990년에 다시 왜관수도원으로 돌아와 지금까지 수도생활을 하고 있다. 재단은 1960년대 민간 혼례복에 대한 연구 등에 활용될 수 있도록 이 단령을 보존처리한 국립민속박물관으로 유물을 인계했다.

2020년 10월 16일, 1191호 30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