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조선후기 200년의 대표적인 화가 삼원삼재(三園三齋) ②

조선후기 200년의 대표적인 화가를 이야기할 때 가장 뛰어났던 6명의 화가를 삼원삼재(三園三齋)라고 표현한다.

삼원삼재(三園三齋)의 삼원은 호가 원(園)자로 끝나는 단원(檀園) 김홍도, 혜원(蕙園) 신윤복, 오원(吾園) 장승업을 말하며, 삼재는 호가 재(齋)자로 끝나는 겸재(謙齋) 정선, 현재(玄齋) 심사정, 공재(恭齋) 윤두서를 지칭한다. 공재(恭齋) 윤두서 대신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현재(玄齋) 심사정: 고난을 품어 자신의 세계를 창조하다

조선 회화사에 등장하는 많은 화가들이 저마다 기구한 인생을 지니고 있지만, 심사정 만큼 힘들게 생을 살아야 했던 이도 드물다. 영의정까지 지낸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할아버지 심익창이 역모에 가담했던 연고로 노비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했던 심사정. 그가 그렸던 그림에는 차마 말로 다 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울분과 회한이 담겨 있다.

심사정은 어렸을 때부터 정선에게 그림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또한 스승처럼 풍경화를 많이 그리고 잘 그렸다. 하지만 풍경화 뿐만 아니라 꽃과 나무, 동물, 곤충 등 여러 소재를 이용하여 다양한 종류의 그림을 그려내었다. 그리고 다양한 인물의 모습을 담은 풍속화도 많이 그렸다.

풍경화에서도 전통적인 한국의 정서를 담고 있는 스승 정선의 화풍과는 다소 다른 경향을 보이고 있다. 당시 중국에서 건너온 여러 화첩들을 보면서 그림 공부를 하였던 심사정은 중국 원나라 화법을 근간으로 하여 자신만의 새로운 화풍을 수립하였다. 중국화 보다 세련되지만 경박하지 않은 우아함이 돋보이는 그의 그림들을 보게 되면 억울한 그의 인생 속에 이런 정서가 숨어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다.

그의 뛰어난 실력은 궁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그가 마흔 두 살이 되던 해에 영정모사도감이라는 왕의 인물화를 그려내는 관청의 감독으로 뽑히게 되었다. 그만큼 그의 실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역적의 자손이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가 되게 할 수는 없다는 반대파의 상소가 올라와 심사정은 단 나흘 만에 해임되고 말았다.

이 일을 계기로 심사정은 모든 욕심을 버리고 그림에만 몰두하였다. 인생의 모든 욕심을 버린 채 그림에만 자신을 담기 시작한 것이다.

인생의 고난과 맞서 싸우다 좌절하지 않고, 절망을 품어 예술로 승화시킨 그의 내면 세계는 한 사람의 예술가를 넘어 진정한 인간의 승리가 무엇인가를 보게 한다. 부질없는 출세와 세상의 부에 마음을 두기 보다는 그림을 통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를 보여준 심사정. 그는 우리에게 그림 이상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심사정의 작품으로는 <방심석전 산수도>, <파교심매도>, <강상야박도>, <하마선인도>, <초충도> 등이 있으며 그의 나이 61세에 그린 <경구화첩> 등이 있다.

나이 50대에 이르러 그는 진경산수(眞景山水)와 자신만의 고유한 풍경화 양식을 정립하였다. 상상해 그리는 관념산수와 진경산수, 화조, 동물 그림 등에 걸친 ‘심사정표 그림’들에는 겸재 정선 같은 호쾌한 기운과 개성은 거의 없다. 대신 특유의 애상감과 신중하면서도 옹골찬 붓질과 구도가 도드라진다. 전형적인 외유내강의 화풍인 것이다. 심사정의 풍경화는 정선의 화법과 함께 조선후기의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심사정은 어려서 정선(鄭敾)의 문하에서 직접 그림을 배웠다. 정선에게 사사 받은 화풍을 바탕으로 진경산수(眞景山水)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중국의 절파화풍과 남종화풍을 받아들여 자신의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었다. 주로 『고씨화보(顧氏畵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과 같은 서적을 통해 남종화풍을 수용하였다.

그의 그림은 이른바 ‘조선남종화’로 평가되며 이인상(李麟祥), 강세황(姜世晃) 등과 함께 18세기 화단에 남종화풍이 유행하고 정착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절충적 화풍을 보이는 그의 화풍은 최북(崔北), 이방운(李昉運), 이인문(李寅文) 등 주로 직업화가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심사정에 대한 기록은 영세한 편이지만 단편적인 기록을 통해 그와의 교류가 확인되는 인물로는 강세황(姜世晃), 김광수(金光遂), 김광국(金光國), 이광사(李匡師), 심익운(沈翼雲), 이덕무(李德懋) 등이 있다.

강세황은 그의 작품에 많은 화평을 남겼으며 『표현연화첩(豹玄聯畵帖)』과 같은 합작을 남기기도 하였다. 1744년 작 「와룡암소집도(臥龍庵小集圖)」에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서화수장가인 김광수, 김광국과 교유하였음이 나타난다. 그의 묘지명을 지었던 심익운은 인척으로서 생활이 어려운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강세황의 기록에 의하면 심사정은 명나라 오파(吳派)의 비조인 심주(沈周)의 화풍을 배워 피마준법(披麻皴法)을 구사하였다. 아울러 북송(北宋)의 문인화가인 미불(米芾)의 대혼점(大混點) 등 남종화풍을 구사하였다고 한다. 중년에 이르러서는 전형적인 북종화법(北宗畵法)인 대부벽준(大斧劈皴)을 즐겨 사용하였다. 또한 원말 사대가(元末四大家) 화풍의 수용도 엿보인다. 그의 자호를 현재(玄齋)라 한 것은 명나라 말기의 남종화가인 동기창(董其昌)의 아호인 현재(玄宰)를 따른 것이다. 중국의 화법을 다양하게 섭렵하고 남·북종화풍을 모두 수용하여 대륙적 면모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작품은 당시 중국에서도 인정받았다.

산수화의 대표작으로는 「강상야박도(江上夜泊圖)」, 「파교심매도(灞橋尋梅圖)」(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촉잔도권(蜀棧圖圈)」(간송미술관 소장) 등이 손꼽힌다. 1747년 그가 만 40세 때에 그린 「강상야박도」에는 “들길은 구름이 드리워 어두운데 강 위의 외로운 배만이 불을 밝히고 있네(野逕雲俱黑, 江船火獨明)”라는 두보(杜甫)의 「춘야희우(春夜喜雨)」가 화제(畵題)로 적혀 있다.

그의 불우한 생애를 연상시키는 시의와 어울리는 그림의 쓸쓸한 정경은 그가 이미 문인화의 완전한 이해에 도달하였음을 보여준다.

현재 심사정은 그는 세련되고 능숙한 필치와 묵법으로 자신만의 개성적인 회화 세계에 도달하였다.

그의 현존하는 작품은 산수화의 비중이 가장 크지만 진경산수화나 풍속화도 남기고 있으며 도석 인물(道釋人物), 화훼초충(花卉草蟲), 영모(翎毛), 사군자(四君子) 등에서도 능숙한 필력을 과시하고 있다.

사진 심사정의 <초충도>

2020년 10월 23일, 1192호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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