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주년 맞는 3.1운동

3·1 운동 은 일제 강점기에 있던 한국인들이 일제의 지배에 항거하여 1919년 3월 1일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을 선언하고 비폭력 만세운동을 시작한 사건이다. 3·1 혁명 또는 기미년에 일어났다 하여 기미독립운동이라고도 부른다.

대한제국 고종이 독살되었다는 고종 독살설이 소문으로 퍼진 것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으며, 고종의 인산일(=황제의 장례식)인 1919년 3월 1일에 맞추어 한반도 전역에서 봉기한 독립운동이다.

한편 3·1 운동은 현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역사적 기원이 되었다. 3·1 운동을 계기로 다음 달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한편 3·1 운동을 계기로 군사, 경찰에 의한 강경책을 펴던 조선총독부는 민족분열책인 일명 문화통치로 정책을 바꾸게 되었다.

I. 3.1운동의 배경

(1)외부 원인론과 내부 원인론

우선 일본에서 널리 통용되었고, 1945년 이후부터 1970년까지 한국에서도 3.1운동의 동인에 대해서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주장이 지배적인 견해였다. 이는 1차 세계대전 말기에 윌슨이 재창한 ‘민족자결주의’와, 러시아 10월 혁명의 영향으로 3.1운동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은, 3.1 운동의 역량이 민족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닌, 민족 외부에서 주어졌던 상황으로 인해 일어난 것으로 해석이 된다. 즉, 3.1운동은 일본에 대항한 민족의 자발적인 운동이 아닌 외부의 상황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었던, 수동적인 운동이었다는 해석으로 까지 다가갈 수 있다. 그러나 두 가지 주장 모두 3.1운동의 역량의 기반이 될 수는 없다. 우선 민족자결주의는 ‘패전국의 식민지’에 해당하는 문제였으며, 민족지도자들도 이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3.1운동과 민족자결주의가 아무 관련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3.1운동은 단지 민족자결주의를 기반으로 일어났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한 해석이라 할 수 있다.

다음으로 러시아 혁명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이다. 이 당시의 사회주의 이념이 3.1운동의 주도층에게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사회주의의 전파는 3.1운동 당시가 아닌 이후에 사회주의 노선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는 것이 올바를 것이며, 민중으로 확산되었다고 해서, 이를 사회주의이념의 영향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즉, 3.1운동은 민족 내부의 역량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일어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내인론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 그리고 이로 인해 키워진 실력을 토대로 한 기회포착론으로 볼 수 있다.

내부원인론에 따르면 애국계몽운동은 애국의식과, 실력을 여러 분야에서 다각적으로 국민들에게 고양시키려 하였다고 한다.

한말의 애국계몽운동은 교육구국운동뿐만이 아니라 언론구국운동, 실업구국운동, 국채보상운동, 신문화 · 신문학운동, 국학운동, 민족종교운동, 국외 독립군기지 창건운동 등을 전개하여 종합적으로 전 부문에서 민족독립 역량을 배양하고 강화하여 축적시켰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이 설립한 3,000여 개의 학교들에서 철저한 애국사상과 독립사상에 충만하여 언제나 기회만 있으면 독립운동에 떨쳐 일어설 수 있는 수십만 명의 장래와 민족간부들과 애국청년들을 양성하는 데 성공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 의병운동이 있다. 이 의병운동을 통해 민중의 실질적 애국의식이 고양되었다. 앞의 애국계몽운동의 많은 부분을 이론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의병운동은 실제로 일본을 적으로 두어 이들과 전투를 했다는 데에서 이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의병운동의 의병장은 유생, 구군인, 농민, 상인 , 포수 등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엇지만 병사들은 거의 모두가 ‘농민들’ 이었다. 한말 의병운동에서 의병들은 약 2만 명이 전사했고, 1914년에 의병운동은 의병 일부가 만주, 노령으로 망명한 채 국내에서는 침묵되었지만, 의병운동에 참가했던 수많은 병사들이 다시 농민으로 돌아가 농촌에 잠복하게 되었다.

이후, 3.1운동이 발발했을 당시, 이들 농민들은 과거의 기억을 바탕으로 독립의지를 불태울 수 있었다.

이와 같이, 3.1운동의 역량은 조선에 있어서 민족지도자, 민중들에게 그 의식이 고양되었으며, 이것이 3.1운동을 통해 자발적으로 표출했다고 하는 것이 내부원인론의 주장이다.

II. 3.1운동의 전개

(1) 3․1운동의 준비과정

1919년 1월 20일 권동진, 오세창, 최린이 천도교 교주 손병희에게 찾아가 독립선언과 독립운동을 일으키는 것을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손병희는 허락하였고, 그 자리에서 세 가지 독립운동의 원칙을 결정하였다. 첫째, 독립운동을 대중화하여야 할 것.둘째, 독립운동을 일원화하여야 할 것.셋째, 독립운동을 비폭력으로 할 것이었다.

그 후 구체적인 사항은 권동진, 오세창, 최린에게 위임되어 이들은 기독교, 불교, 유림, 학생들과의 공동전선 결성을 위한 교섭을 담당했다. 최린은 송진우를 통해 기독교 측과 접촉하여 독립운동에의 합류를 요청하였고, 원래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던 기독교 측 역시, 2월 24일 부로 무조건 3․1운동 합류를 결정했다. 이렇게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대가 공식적으로 결정되고, 운동 추진방법에 대한 세부적이 합의가 이루어졌다.

최린은 기독교측과 연대를 성사시킨 후, 불교측의 교섭상대를 물색하였는데 시일이 촉박하여 불교측 대표는 한용운과 백용성 두 사람만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이후 유림과의 접촉도 시도했었으나 초기 민족대표의 역할을 거부했던 유림들은 소극적이었고, 촉박한 시간과 일제의 감시 때문에 제대로 성사되지 못했다.

학생측과의 연대는 2월 23일에 성사되었는데, 학생세력들 역시 2․8운동에 큰 자극을 받아 이미 비밀리에 자체적으로 독립운동에 대한 협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23일 종교계 대표들과 각 학교 대표들의 연합전선이 형성되어 이로서 민족대연합전선의 형성이 이루어졌고, 그 후론 3․1운동을 위한 준비에 모두 박차를 가했다.

(2) 3․1운동의 발발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경, 태화관에 민족대표 33인 중 29명(길 선주·김 병조·유 여대·정 춘수 등 4인은 지방에 있었으므로 불참)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독립선언식은 간결하게 치러졌는데, 한용운이 독립선언을 알리는 식사와 선창에 이어 29인의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하는 순서였고, 선언 직후 이들은 일본 경찰대에게 전원 연행되었다. 한편 같은 시각 파고다공원에는 서울의 중학교 이상의 학생들과 민중들이 독립 식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2시가 되어 약속되었던 33인의 민족대표 대신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 선언서를 낭독하였고, 낭독이 끝날 무렵 ‘대한 독립 만세’라는 외침이 군중 속에서 터져 나왔다.

이후 군중들은 공원 밖으로 나와 거리에서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 만세시위는 고종의 인산 참배를 위해 전국에서 상경한 군중이 가세하여 날이 저물도록 계속되었다. 종로거리에서 시작된 만세시위행진은 해질 무렵에는 교외로 번져나가, 오후 8시경 마포 전차 종점 부근에서 대대적인 시위 운동이 일어났고, 연희 전문학교 부근에서는 밤 11시까지도 해산하지 않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수만의 군중이 날이 저물도록 시위하였으나 3월 1일 당일, 폭동사례는 1건도 발생되지 않아 비폭력의 원칙하에 운동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일본군은 군경과 용산 주둔 보병 3개 중대, 기병 1개 소대를 시위 군중 해산을 위해 투입했고, 29명의 민족 대표를 비롯하여 중요지도자 134명이 체포되었다.

(3) 3.1운동의 확산

3·1운동은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으며 도시 등 교통이 발달한 곳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농촌 등지로 전파되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갈수록 참여하는 인원과 계층이 늘어나면서 운동의 양상도 비폭력 시위에서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국외로도 확산되어 만주, 연해주, 도쿄, 오사카,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시위가 벌어졌다.

3·1운동의 확산 과정은 크게 3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점화기)에서는 서울을 비롯해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등의 주요 도시에서 독립선언서가 배포되어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는 비폭력 투쟁을 특징으로 했으며, 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2단계(도시확산기)에 3월 10일을 전후로 한 동은 전국의 주요 도시들로 확산되었으며, 상인과 노동자들도 철시와 파업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3단계(농촌확산기)에는 3월 중순 이후의 도시뿐 아니라 농촌에서도 시위가 일상화하였다. 농민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시위의 규모도 커졌으며, 시위의 양상도 몽둥이와 죽창 등으로 무장하여 면사무소와 헌병 주재소 등을 습격하는 폭력투쟁으로 발전하였다.

특히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까지의 시기에 전체 시위의 60% 이상이 일어날 정도로 운동은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그 가운데 절반 정도가 폭력투쟁으로 나타났다.

(4) 참여자와 피해 규모

3.1 운동의 참여 인원에 대하여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의견은 차이가 있다.

일본인 학자 야마베 겐타로에 의하면 운동의 참여자는 50만 명 이상이라고 추정한다. 한국의 학자 신복룡은 46만 명 정도로 파악하였다.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만세를 부른 사람의 수효는 46만 3086명 정도였다.

그런데 역사학연구소의 《함께 보는 한국근현대사》(서해문집, 2004)와 한영우의 《다시찾는 우리역사》(경세원, 2002년)에서는 참여 인원 2백만여 명, 전국의 만세 시위 건수 1,542회, 사망 7,509명, 부상 15,961명, 체포 46,948명의 규모로 서술한다. 참여 인원에 대하여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이유는 전거로 삼은 사료에서 비롯한다.

역사학연구소나 한영우 등은 그 출처를 밝히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실린 통계를 전거로 삼았다. 많은 한국의 교과용 도서에서도 대체로 이 통계를 활용한다.

그런데 3·1 운동을 진압하였던 조선총독부 쪽의 통계는 이와 크게 차이 난다. 조선총독부는 당시 조선헌병대사령부와 총독부 경무총감부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조선소요사건일람표》(朝鮮騷擾事件一覽表)를 작성하여 3월 1일에서 4월 말까지의 상황을 10일 단위로 정리하였다. 이를 합산하면 4월말까지 조선인 시위 참여자는 58만 7,641명(50 명 이하 참여자의 경우는 제외), 거자 26,713명(당일 13,517명, 추가 검거 13,196명), 시위 참가자의 사망 553명, 부상 1,409 명이라고 집계되어 있다.

또한 일본군과 헌병, 경찰의 경우 사망 9명, 부상 156명으로 집계하였다. 한편, 조선헌병사령부가 발간한 《소요사건 검거건수 조사표》(騷擾事件 檢擧件數 調査表, 1919.4.21-1919.4.30)에서는 총 검거 건수를 26,713 명으로 집계하였다.

박은식의 통계는 3월에서 5월까지의 상황을 정리한 것이고 조선총독부의 것은 4월 말까지를 정리한 것이어서 단순한 비교는 어렵다. 그러나 어느 쪽 통계를 보아도 3·1 운동은 일제 강점 이후 유래가 없는 규모의 독립 운동이었다.

III 3.1운동의 의의와 영향

3·1운동은 지식인과 학생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상공인 등 각계각층의 민중들이 폭넓게 참여한 최대 규모의 항일운동으로 독립운동사에서 커다란 분수령을 이루었다.

그것은 나라 안팎에 민족의 독립 의지와 저력을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독립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넓혀 독립운동을 체계화·조직화·활성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중들은 3·1운동에 참여하면서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을 높일 수 있었으며, 이는 1920년대에 다양한 사회운동과 조직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3·1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에도 커다란 타격을 가해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꾸게 하였으며, 중국의 5·4운동과 인도 간디의 비폭력·불복종 운동, 이집트의 반영자주운동, 터키의 민족운동 등 아시아와 중동 지역 민족운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일제는 물리적인 폭압만으로는 3·1운동으로 분출한 민족의 저항의지를 막을 수 없었으므로 형식적이나마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을 일부 완화하여 문화통치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이는 가혹한 식민통치를 은폐하고 친일파를 육성하여 민족운동을 분열시키기 위한 기만책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3·1운동은 운동의 과정을 통일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조직체가 없었기에 지역과 계층에 따라 투쟁의 형태와 강도를 다르게 한 채 분산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민족대표는 독립청원의 방식에 주력하여 타협적인 태도를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광범위하게 일어난 일반 대중들의 항일투쟁을 이끌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지니지 못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전체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이끌기 위해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국내에서는 1920년대 전반기에 민중의 투쟁력을 조직화하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었다.

또한 3·1운동은 독립운동의 이념과 방법을 체계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종교계의 민족주의자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희망을 걸고 주체역량보다 외세에 의존해 독립을 얻으려 했다. 그들은 서구 문명국들의 동정을 얻을 수 있다는 이유로 ‘비폭력’을 절대적인 전제로 내세웠고, 일본 정부에 독립의 취지를 건의하여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적절하다며 독립청원의 방식에 의존했다.

그러나 3·1운동의 경험을 통해 민족의 주체역량에 기초해야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실력양성과 무장투쟁이 독립운동의 방법으로 체계화하였다. 그리고 왕조의 회복을 목표로 한 복벽주의(復辟主義)가 청산되고 민주공화제가 독립국가의 목표로 자리를 잡았다.

1208호 14면, 2021년 2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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