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30년 (38)

동서독 정당통합(1)

통일과정에서 동서독 정당체제의 변모 ➀

베를린 장벽 붕괴 전 동독의 정치지형

독일통일에 있어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는 동서냉전의 종식과 동서독 통일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발생하기 전 이미 동독은 국내외적으로 베를린 장벽 붕괴의 전조에 해당하는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먼저 국외적으로 1985년 3월 소비에트 연방의 당서기장에 취임한 고르바초프는 실용주의 개혁정책을 통해 소련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였다. 고르바초프는 또한 소련 외교정책의 큰 흐름인 브레즈네프 독트린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선언하면서 자신의 문제 해결 방식을 동독을 비롯한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에게도 요구하였다.

소련 사회의 이러한 변화는 동 유럽의 위성국가들의 체제 변화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국내적으로 동독 또한 자체적으로 소련과 같은 문제점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체제개혁을 거부함으로써 동독 주민들의 불만은 커져갔다. 사회주의통일당의 이러한 태도에 대한 반대는 먼저 국가 탈출로 나타났다.

1989년 5월 2일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국경이 개방되자 동독인들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는 서독 대사관으로 몰려와서 서독으로 이주를 신청하였다. 또 8월 22일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 있는 서독 대사관의 경우 동독인들의 이주 물결로 인해 대사관 업무를 중지하기까지 하였다.

사회주의통일당에 대한 동독주민들의 불만은 다른 한편 동독 내에서 시위의 형태로 표출 되었다. 일례로 1989년 9월 4일 라이프치히(Leipzig)시 니콜라이(Nikolai) 교회에서는 여행의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가 있었으며, 9월 7일에는 동베를린의 알렉산더 광장(Alexanderplatz)에서 5월 7일 시행되었던 지방선거에서의 부정을 규탄하는 시위가 발생해 80명이 체포되었다.

이처럼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에서 시작된 월요집회는 동독 전역으로 파급되면서 평화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또 이 시위는 다른 도시들로 파급되어 막데부르크, 드레스덴, 할레, 동베를린 등 동독의 주요도시에서 평화혁명으로 발전하였다. 이처럼 10월 들어서면서 동독의 체제 개혁에 대한 요구는 절정에 달하였다. 10월 16일 시위에 참가한 사람은 10만 명이 넘었으며 경찰은 이들을 통제할 수 없었다.

이 시위 이후 시위대는 ‘우리는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 ‘폭력은 안 된다’(Keine Gewalt)는 구호를 외치면서 자신들 의 목적을 명확히 하였다.

이런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사회주의통일당은 동독의 서기장 호네커(E. Hoecake)가 건강상의 이유로 물러나는 형태로 지도부를 교체하였다. 1989년 10월 18일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회 비상전원회의가 개최되어 호네커가 당 서기장직 등 모든 공식적 지위에서 물러나고 그 후임으로 크렌츠(E. Krenz)가 동독 공산당 중앙 서기장으로 취임하였다. 취임과 함께 그는 동독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해 동독 공산당이 일대 변혁에 착수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크렌츠는 호네커의 황태자로 불리는 사람이었고 강경파였다. 그는 동독 주민들의 열망을 무시한 채 여전히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도적 위치를 강조하였다. 때문에 동독인들은 크랜츠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통일당의 독점적 위상과 지위를 인정 하지 않았으며

1989년 11월 백만 명을 상회하는 군중이 참여한 집회가 동베를린에서 개최되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후 동독의 정치지형원탁회의

1989년 동독인들의 서독으로의 이주와 동독의 변화를 요구하는 일련의 시위들은 그해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로 이어졌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10월 절정에

달했던 동독 주민들의 개혁 요구는 결코 시들지 않았다.

당시 동독 시위대의 구호는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로 이는 인민의 지배와 민주주의 원칙을 천명하는 것으로 동독인들의 구체 적인 요구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이에 동독의 사통당은 저항단체들과 함께 동독을 개혁한다는 이미지를 심어주면서도 대화를 통한 주도권을 쥐고, 책임을 분담할 수 있는 방안으로 1989년 11월 22일 중앙원탁회의의 구성을 제안하였다. 이 제안은 중앙뿐만 아니라 지역별 원탁회의의 구성을 촉발시켜 11월 29일에는 라이프치히를 비롯해 지역별 원탁회의도 구성되었다.

중앙원탁회의는 사회주의통일당과 다른 블록정당 그리고 좌익연합, 농민협동조합, 민주주의 지금(Domokraite Jetzt), 신포럼(Neues Forum) 등 17개 정당, 재야단체의 39명의 대표로 구성되었다. 12월 7일 첫 회의 이후 매주 월요일마다 회의가 열렸다. 중앙원탁회의의 경우 1990년 3월 18일 의회선거 이후 개최되지 않았지만 지방원탁회의는 1990년 5월 6일 지방의회선거가 있을 때까지 개최되었다.

원탁회의는 원래 통제, 감시기관으로 설립되었으나 나중에 자체가 입법기관으로의 역할을 하면서 선거법, 매스컴법, 노조법, 사회헌장, 새헌법조항 등을 제정했고 동독선거에 서독인들이 참가하지 않도록 한 결의도 통과시켰다. 이러한 측면에서 사회주의통일당이 실질적으로 통제력을 상실한 권력의 공백기에 많은 부분 정부와 의회의 기능을 대신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더욱이 원탁회의의 활동으로 동독정보기관이 해체되었고, 그 비밀 서류의 소각을 방지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원탁회의가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되었기 때문에 동독인들은 많은 관심을 갖고 지켜볼 수 있었다. 더불어 1990년 5월 6 일 동독에서 최초로 자유선거를 실시한다는 결의는 원탁회의가 비록 자유 거의 결과에서 나온 합법적인 제도는 아니었지만 긍정적인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예라 할 수 있다.


교포신문사는 2020년 독일통일 30주년을 맞아, 독일의 분단, 분단의 고착화, 통일과정, 통일 후 사회통합과정을 연재를 통해 살펴보며, 분단으로부터 통일을 거쳐 오늘날까지의 독일을 조망해본다. -편집자 주

1214호 31면, 2021년 4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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