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 30년 (43)
동서독 정당통합(6)

통일과정에서 동서독 정당체제의 변모 ➅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1990년 10월 3일 통일될 때까지의 독일통일 과정에서 동서독의 정당통합은 실질적으로 1990년 3월 동독 최초의 인민회의 자유선거에서 시작해 1990년 12월 통일 이후 첫 연방선거 기간에 이루어졌다.

동서독 정당의 통합 2

사회민주당(SPD)의 통합

서독 기민당의 경우 동독 기민당의 위성정당으로서의 활약으로 인해 동독지역에서 정치적 파트너를 찾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여러 가지 다양한 파트너가 제안되었다. 이에 반해 서독 사민당의 경우 동독의 사민당과의 긴밀한 협력에 있어 그리 큰 문제는 없었다.

그러나 동독 사민당 내에서는 당의 조직과 구조에 있어 창당과정에 의견이 있었다. 창당 과정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시민운동과 평화운동 참여자들은 애초에 자신들만의 시민정당 창당을 목표로 삼았었다. 이들은 법치주의, 민주주의, 사회 및 경제적 평등과 사회주의통일당의 지배에 대항하는 공적인 의사형성을 의회에 정착시키고자 하였고 그러한 정당을 창당하고 자 하였다.

이는 동독 사민당 내에 당 구조와 관련해 두 가지 다른 흐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동독 사민당 내부구조와 조직형성에 있어 서로 다른 의견이 제기되었다. 먼저 동독의 민주주의적 중앙집권주의의 경험으로 인해 정당의 밑에서부터 맨 위까지 대표를 선출해 인민민주의적 정당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시민정당으로서 동독 사민당을 꿈꾸는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이들은 하부집단을 정당 내부의 의살결정을 위한 중요한 주체로 만들어 과두정치를 방지하고 내부의 투명성과 30명의 대표로 구성된 정당의회의 투 명성을 보장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더욱 강력한 지도부의 구성을 생각하는 이들의 요구와 부딪치게 되었고 결국 타협점을 찾아 인민민주의적 조직은 대 체방안으로 유보되었고 기타 정당구조 관련 작은 부분들은 유지되었다.

이러한 설명은 동독의 사민당과 서독의 사민당 간의 통합에 있어 강령과 관련해 방향설정에 있어 동서독 사민당 간에 큰 갈등이 없었지만 동독의 사민당 내부에서는 당 조직과 구조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자유민주당(FDP)과 동독의 자유주의자

1989년 5월 동독 자민당의 당수인 게르라흐(Gerlach)는 다양한 지역에서 온 18명의 동독 자민당 당원들에게 동독의 상황과 지방선거의 결과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였다. 게르라흐는 야당으로서 자민당의 역할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었고 동독 사회의 개혁을 위한 다양한 제안을 하였다. 또한 그는 1989년 10월 28일 신문과의 인터뷰를 통해 반정부적인 활동의 필요성을 역 설했고, 그러한 단체의 출현은 결코 헌법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자신의 소신을 명확히 밝혔다. 이러한 게르라흐의 모습은 다른 위성정당들과는 다른 모습으로 당시 동독의 국가안보국은 동독의 자민당으로부터 동독 사회에서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게르라흐와 동독의 자민당을 개혁세력의 선두주자로 생각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개혁적인 움직임과 더불어 동독의 자민당은 11월 1일 당의 강령을 처리할 기초위원회를 설립하여 게르라흐를 중심으로 한 체제 내적인 개혁과 새로운 노선을 위한 기초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1990년 1월 게르라흐는 서독 자민당의 볼프강 미쉬니크(Wolfgang Mischnick)를 만나 동독의 자민당과 서독 자민당의 앞으로의 협력을 위한 전제 조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였다. 서독 자민당의 요구는 먼저 동독 자민당 내의 인사에 관한 것과 동독 내 모든 자유주의 세력과의 선거연합이었다. 더불어 또한 동독의 자민당이 사회적 시장경제, 법치국가 그리고 독일의 통일에 대한 지지를 명확하게 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동독-자민당(DDR-FDP)이 1월 4일 건설되었는데 이는 동독 자민당(LDPD)에게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게르라흐는 이러한 동독-자민당(DDR-FDP)의 창당 이면에 서독의 자민당이 동독 자민당(LDPD) 에게 압력을 행사하기 위한 방안이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서독의 자민당이 목표로 했던 것은 동독에서 자유주의 세력의 분할이 아니라 동독 자민당(LDPD), 동독-자민당(DDR-FDP) 그리고 포럼당이 선거연합을 구성하도 록 추동하는 것이었다. 포럼당의 경우 1989년 12월 신포럼에서 분리된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1990년 1월 27일 건설된 정당이었다.

1990년 2월 9-10일 양일 간 개최된 정당대회에서 동독 자민당(LDPD)은 자민당(LDP)으로 당명을 변경하고 새로운 당수 라이너 오르트렙(Rainer Ortleb)의 지휘 아래 당 강령에서 사회주의적 요소를 제거하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동독에 있었던 자유주의적인 가치에 부합하는 새로운 당 강령을 마련하였다.

오르트렙은 당의장으로 선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독일민족민주당 (NPDP)의 의장인 볼프강 라울(Wolfgang Raul)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동독 자민당과 독일민족민주당이 함께 선거연합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자유민주주의자연맹(Bund Freier Demokraten , BFD)이 바로 이러한 취지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 자유민주주의자연맹은 동독 자민당, 독일포럼당(Deutsche Forumpartei), 독일민족민주당(NPDP), 동독-자민당(DDR-FDP)이 인민의회 선거에서 공동의 선거인 명부를 만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인민의회 선거 이후 이들은 1990년 4월 4일 모임을 갖고 지방선거에 대해 논의하였으며 오르트렙을 선거연합의 의장으로 볼프강 라울은 부의장 그리고 요아힘 귄터 (Joachim Günter)를 사무총장으로 선출하였다.

통합정당대회는 8월 11-12일 하노버(Hannover)에서 개최되었는데, 서독 자민당의 경우 7만 명의 회원들 중 405명의 대표단이, 동독의 자유주의 정당연 합은 15만 명의 회원들 중 260명이 대표단으로 참석하였다. 오르트렙은 당의 부의장으로 선출되었으며 35명의 수뇌부 중 동독 출신 자유주의자들은 모 두 15명이 선출되었다.

1219호 33면, 2021년 5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