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 한인 100년사
– 일제 강점기하의 재독한인과 활동들 –

김영자 박사 (Dr. Beckers-Kim Young-ja)

– 재독한인사회 건립 100주년을 맞아 –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이 독일에 도착하기 1960년대 중반보다 40여년이 앞선 1920년 포츠담에서 ‘한인구락부’의 이름으로 한인단체가 결성되었고, 이듬해인 1921년 1월에는 베를린에서 유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가 결성되었다.
이렇듯 독일의 한인사회 건설은 포츠담을 기준으로는 지난해, 유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를 기준으로 하면 올해가 100년 역사를 맞게 된 것이다.
교포신문사는 독일 한인사회 건립 100주년을 맞아 일제 강점기 시대 독일에서의 한인사회와 한인들의 활동을 심층적으로 조사한 김(Beckers)영자 박사님의 논문을 연재한다.
이 글은 지난해 유럽한인총연합회(회장 유제헌)가 발간한 “유럽한인 100년사”에도 게재되었다.- 편집실


1. 해방 전 재독 한인들의 활동상

1.1. 들어가면서
지난 2019년은 유럽 한인 이민 형성이 된 100주년의 해일 뿐 아니라 재독 한인 이민의 디아스포라 100년사도 포함해서 이루어진 해이다.
독일내 한국인 사회가 형성된 시기는 크게 해방전과 해방후부터 현재까지로 분류할 수 있다: 정확하게 명시하자면 재독 한인 디아스포라는 1909부터 시작되지만 1920년 후부터 본격적으로 조국을 잃은 ‘나라없는’ 망명자들로 독일의 한인 이주역사로 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초창기의 한인들이 독일로 들어온 목적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치하에 들어가자 조국의 억울함을 전세계에 알리고 광복을 꾀하기 위함이었다.
그 당시 나라를 박탈당한 한국인의 공공외교활동은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에 머물었던 한인들은 현지인들에게 조국의 어려운 현실을 직, 간접적으로 알렸다.
초창기의 한인 유학생이나 독립운동가들은 대부분 중국여권을 발급받고 선편을 이용해 유럽으로 진입했기에 나라 없는 망명자들이었다. 따라서 유럽, 독일 한인이민사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해외 한인의 운동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독일의 패배로 끝났으나 독일의 학계는 번창했다. 독일의 교육계는 전성기라 할 수 있을만큼 전통적인 철학. 법률 계통 뿐 아니라 과학분야 중 공학, 의학, 물리학 분야는 세계의 독보적인 역할을 하고 있을 때 였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새 학문을 접하기 위해 일본으로 유학길을 떠났다가 일본 학문에서 한계를 인정하고 그 후에는 독일 유학을 희망했다. 프랑스를 찾은 한국인들은 주로 노동자이거나 예술 전공을 목적으로 삼았으나 독일로는 대부분 유학이 목적이었다. 조국을 떠나 유학길에 오른 젊은 청년 일부는 3.1일 운동에 참여했다가 일본의 감시를 피해 정치적 이유로 떠나게 된다.


1.2. 100년 전 독일 땅을 밟은 한국인
1919년 3.1운동후부터 재능있는 청년들을 선정해서 해외유학을 보내는 운동이 활성화 되기 시작했는데 ‘기미육영회’가 대표적인 기관이다. 이 유학재단에서 유럽으로 유학을 보낸 사람 중에 독일 유학생으로는 안호상 (Jena 대학), 이극로 (현, Berlin 흠불트대학) 등이 있다.
안호상은 예나 대학교에서 인문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후 귀국을 하고 각자 학계와 정계에서 활약을 했다. 물론 개인적으로 자비유학을 한 한인 젊은이들도 적지 않았으나 경제적인 뒷받침이 힘들어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몇가지 예를 들면, 김재원은 뮌헨 대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그가 쌓은 학문은 후에 한국 미술계의 주춧돌이 된다.
배운성은 베를린 예술종합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유럽 미술계에서 동서양의 화풍으로 인정을 받았다.
이의경은 뷔르쯔부르그를 거쳐 뮌헨에서 동물학 학위를 받았으나 철학자, 문인으로 활동을 한 초대 재독 한인 이민 중 한 사람이면서 유일하게 독일에 남아 생을 마쳤다.
여러 한인 유학생은 독일과 프랑스를 넘나들면서 독립운동자로써, 학계에서 학자로써 활동한 재독 한인 디아스포라들도 적지 않았다.
해방전 재독 한인들의 유학 목적은 주권을 잃은 조국의 억울함을 세계에 알리는 한편 선진 서양의 신교육을 받은 후 고국에서 국민들에게 이바지 하는데 있었다. 따라서 일부 유학생은 전문 교육 부문에서 학위를 받고 곧 바로 귀국하였고 국가를 위한 여러 기관에서 곧바로 활동을 했다. 이름을 명시하지 못한 초창기 한국의 행방전까지 꽤 많은 재독 한인 거류민을 이제 재독 한인사회는 본격적으로 발굴해야 한다.


1.3. 100년 전 독일내 한인 단체
유덕고려학우회는 독일 전체 한인유학생 모임으로 김갑수, 윤건중, 이의경 등 11명이 주축이 되어 베를린에서 1921년 1월 1일 공식적으로 결성되었다. 유럽 최초의 한인 유학생회로써 본거지의 주소는 베를린 Kantstrasse 122번지였다. 1923년부터 이극로가 임원으로 입회를 하면서부터 재독 한인사회가 더욱 적극적으로 활약을 할 수 있었다.
유덕고려학우회가 결성 직전 1920년부터 당시 독일 거주 교민의 수를 조사했는데 이 조사에 따르면 1923년 독일 전국의 한인거류인은 55명, 유학생이 10개 대학에 33명, 총 88명이었고, 일제의 자료에 의하면 1924년 한인 유학생 수는 58 명, 1925년 4월 조사록에는 52명에서 53명으로 추산되었다 (출처: 독일에서의 독립운동).
1920년 직후의 독일 전역에 체류했던 55명 각각의 거류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어 유감이다.

◈ 유덕고려학우회

대표활동상: 재독 한인 유학생모임 유덕고려학우회는 고학으로 고생하고 있는 유학생들의 구제활동, 임정지원활동, 대외선전활동, 국제대회 참가활동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1927년 2월 5일부터 14일까지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이극로, 이의경, 황우일 세 명을 대표로 선정, 파견했다. 프랑스 임시정부의 대표자로 참석한 김법린이 일제를 규탄하는 기조연설을 했다. 또한 이의경이 작성한 ‘한국문제, The Korean Problem’을 3개국 언어로 작성해서 행사 주체측에 제시하고 참가자에게 배포를 하는 등 항일운동을 했다.

◈ 포츠담 Potsdam한인 구락부

포츠담 한인들에 의해 1920년에 결성되었고, 가장 활발하게 일제에 항거한 단체였다. 당시 포츠담에는 한인이 30명 이상이 체류하고 있었다고 한다 (베를린 일본공관의 일본형사보고문에 나온 기사).
그러나 한인 스스로가 어떤 한인들이 왜 포츠담에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 어디서도 연구된 바 가 없다. 1919년 11월 10일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한 조선의열단이 창립되었다.
각지를 떠돌아 다니면서 활동하던 이들의 일부가 독일 베를린 근처의 포츠담에 조선의열단 일원이 머물었을 가능성도 추측해 볼 수 있을 듯 하다.
조선의열단원 중 한명의 난감한 행동으로 독일 베를린 체류를 한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조선의열단원으로 오성륜은 1922년 3월 28일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상해의 황초단 부두에서 처단하고 도망쳤으나 영국경찰에 체포된다. 그 후 일본영사관에 인계되어 감옥에 있다가 광동으로 탈출한다. 광동에서 중국여권을 위조해서 독일로 피신을 한다.
독일 체류중 오성륜은 독일인 여인과 사랑에 빠져 1년간 그녀의 가족과 함께 살면서 지니고 있던 자금을 탕진하고 (김산의 아리랑 중) 주베를린 소련영사관의 도움으로 1925년 모스크바로 가게 되었다.
이 단편적인 어느 조선의열단원의 사적인 내용을 감안한다면 오성륜 외에도 베를린이나 포츠담구락부 안에는 최소한 몇 조선의열단원이 동양과 서양을 오갔다고 추측할 수 있다.
포츠담 구락부의 회원들은 근처에 있던 한인식당에서 모여 열렬히 토론을 하면서 유럽사회에 잔악한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자주권을 빼앗긴 한국의 억울함을 세계에 호소하였다.
대표활동상: 포츠담에서 해마다 8월 29일을 국치일로 삼아 추모식을 거행하고 나라 잃은 아픔과 독립의지를 다짐했다.
1923년 10월 재독한인대회에서 주제가 되었던 내용으로 다음해인 1924년에는 32쪽 짜리 ‘조선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이라는 별도의 책자를 제작해서 유럽 및 세계 전 지역에 배부한 사실을 대표적인 활동상으로 들 수 있겠다.

◈ 포츠담 (Potsdam) 시내에 있었던 한인식당의 역할

한인사회의 유일한 한국인들의 집합장소로 포츠담에 위치했던 한인 식당을 들 수 있는데, 이곳은 인근 베를린을 위주로 한인들이 주로 주말에 모여 정보를 제공하고 항일 활동을 펼쳤던 곳이다. 이 식당의 원래 주소가 사라졌던 것을 2018년 재독 한국학 박희석 교수가 찾아냈는데, 그 원래의 주소는 Alte Luisenstrasse였으며, 구동독 시절인 1976년에 Zepplinstrasse로 거리 이름이 바뀌었다.
도로 확장 공사로 건물과 한인식당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이제 대략의 위치는 알게 된 셈이다. 베를린에서 20 ~30분 정도 서남쪽으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포츠담의 한인식당은 초창기 한인들의 집회장소였고 1923년 10월 26일 일본 관동 지진 후 재일한인학살 잔행에 항의 하는 ‘재독한인대회’를 이곳에서 개최하기도 하였다.
활동상: 가장 큰 행사는 1923년 10월 26일에 개최된 ‘재독한인 대회(Great Meeting of Koreans in Germany)’로 독일 내 한인회의 가장 대표적인 항일운동이었다.
1923년 8월 일본에서 ‘대지진 사건이 일어난 당시 우연히 일본에 체류중 (1923년 9월 1일-8일)이던 베를린에서 동양미술상인으로 활동하는 오토 부르카르트(Otto Burkhardt)박사가 중국으로 학술 여행을 갔다가 일을 마치고 일본으로 가는 ‘Emfress of Australia’ 선박 안에서 일본을 요동치는 큰 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체험했다. 일본 요코하마에 도착해서 경험해야 했던 재일본조선인 학살장면은 그에게는 충격 이상이었다. 부르크하르트 박사는 귀국 후 주베를린의 포씨셰신문 (Vossische Zeitung)에 ‘일본인에 의한 한인학살’이라는 제목으로 1923년 10월 9일자 호외기사로 대서특필하면서 이 사실을 자세히 알렸다.
유덕고려학우회와 포츠담 한인 구락부측에서는 즉시 부르크하르트 박사와 면담을 추진하였다. 한국인측 면담자로 유학생 고일청, 황진남을 선정해서 부르카르트 박사를 만났고, 이극로를 중심으로 그 후 즉시 일본의 만행을 전세계에 알리는 “한인학살”, “동포에게 고함” 이라는 두 종류의 전단지를 작성해서 관련된 세계 각 기관에 발부했다.
배포한 이 기사들은 국내 신한민보 1923년 11월 15일자로 크게 실렸다. 독일어로 작성한 “한국에서의 일본폭정(독일어기사:Japanische Blutherr-schaft in Korea)”을 영문 (Japans Bloody Rule in Korea) 으로도 제작하여 세계 중요기관에 배부한 것도 큰 활약 중 하나이다. 곧장 이 전단기사는 서울 신한민보에 1923년 11월 15일자로 “독일인이 일본 지진 시 한인학살장면을 목도하고”라는 제목으로 크게 알려졌다.

(다음호에서 이어집니다.)

1222호 14면, 2021년 6월 1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