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독 한인 100년사 (5)

일제 강점기하의 재독한인과 활동들

김(Beckers)영자 박사

2.5.1 정규화 교수의 “이미륵을 찾아 40년”
세월이 흐르면서 독일인에게서 사랑을 받던 이방인 이미륵도 점차 세안에서 사라지고 있을 즈음, 젊은 독문학자 정규화가 1970년 초에 뮌헨대학으로 유학을 온다. 뮌헨에서 가까운 성 오틸리엔 수도원에서 이미륵 저 ‘압록강은 흐른다” 독일어 원본을 접한 후부터 이의경, 즉 미륵의 흔적을 찾아 40년 혼신의 힘을 다했다.
이미륵의 자취를 찾고자 한 정규화 교수의 업적은 한국과 독일사회에 크게 기여했다. 이미륵의 간결하면서도 유창한 문장은 독일문단에서 크게 호평을 받았는데 정규화는 작가이자 항일운동가로 활동하던 ‘이미륵의 잊혀진 삶의 흔적’을 40년간 끈질기게 찾아다니면서 발굴 해 냈다. 심지어 무성한 잡초사이에서 잊혀져 가는 이의경의 묘지를 찾아 한국정부의 협조로 이장 시켰다. 정규화의 재발굴 업적으로 인하여 1990년 12월 26일 이의경은 대한민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제2019호)을 수여 받게 되었다.


2.5.2 독일 근대사에 직, 간접적으로 관련된 이의경
이의경은 위에 언급했듯이 뷔르쯔부르그 대학교 의학부, 하이델베르그 대학교를 거쳐 뮌헨대학으로 전학을 하여 동물학과로 전공을 바꾸었는데 뮌헨대학 재학시 쿠르트 후버 (Kurt Huber) 교수의 철학강의를 청강하면서 교수의 명강의에 흠뻑 빠지게 되었다. 조심스레 연구실을 찾아가 이해 못 했던 내용에 대해 재차 설명을 듣기도 하면서 두 사람은 사상적으로 가까워 졌다. 1937년 이미륵이 독일인 자일러 교수 가족들과 뮌헨 인근의 그레필핑 (Graefelfing)시로 이사를 갔는데, 쿠르트 후버 교수도 이 지방에서 살고 있었다. 두 학자는 자주 산책도 하면서 정치적, 학문적으로 친분을 계속 유지했다.
나치정권이 무섭게 날뛰던 시대에 지하조직인 “백장미 (Weisse Rose)”라는 반나치 비밀단체에 후버 교수가 깊이 관여를 한다. 이 단체는 뮌헨대학교 학생인 남매 한스와 소피숄 (Hans Sophie Scholl)이 이끌었는데 이미륵도 감시망을 피하면서 이들의 홍보물을 뿌리는 등 간접적으로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결국 나치 비밀경찰에 의해 독일인 주도자들은 체포되어 별다른 소송도 없이 사형을 받았고 쿠르트 후버 교수 역시 사형을 당했다.
히틀러정권에 목숨을 바쳐 항쟁을 한 후버 교수는 지금은 독일 근대사 상 중요한 인물이다. 그의 고향 그레펠핑 시에는 후버 광장을 만들어 동판도 부착하며 후버 교수의 애국정신을 기린다.
2018년 3월 한국문화재청과 현재 ‘이의경 묘직이’역을 기꺼히 하고 있는 그레펠핑 시가 한국인 이의경을 독일 근대사 반나치정권에 반기를 든 운동가로 받아드렸고 2019년 5월 28일 그레펠핑 시 후버 광장의 왼쪽 담벾에는 후버 교수 동판이, 그리고 오른쪽 담벾에는 이의경 선생의 동판이 부착되어, 사후에도 두 사람의 사상적, 학문적, 인간적인 우정이 지속되고 있음을 알려준다. 2019년 5월 28일 주 프랑크푸르트 한국 백범흠 총영사와 그레필핑 시장이 동판부착식을 지켜보았다.


2.6. 한국의 국보 미술품을 지키고 미술사를 정리한 김재원 (1909-1990)
김재원은 1929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베를린에 도착하여 잠시 체류하다가 뮌헨으로 옮겨서 정식으로 전공공부를 시작 하였다.
명태어업으로 부상이 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본인의 유산 몫으로 500원을 받아 독일 유학를 떠난다.
뮌헨 대학교에서 수학시 이미륵에게 독일어를 배우고 대신 가난한 이미륵의 월세에 보탬을 주기도 했지만 고국에서 가지고 온 유학 자금이 바닥이 나면서부터 그의 유학생활은 곤궁해진다. “방값을 제때에 내본 적이 없다. 끼니를 거르는 일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춥고 긴 겨울밤 공복으로 잠을 이루지 못 할 때가 많아 멀리서 15분마다 들리는 교회의 종소리를 듣고 있다가 겨우 잠이 든다 (출처: 박물관과 한 평생에서).
뮌헨 대학교 재학시절인 1929년부터 1934년까지 6년간 교육학 및 고고학, 동양사학을 연구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사학위를 마친 후에는 벨기에서 3년간 연구를 지속한 후 귀국을 한다 (켄트국립대학에서 조교로 근무).
해방직후부터 대한민국 초대 국립박물관장으로 한국의 고고학, 미술사학의 발전 및 후학의 양성에 크게 이바지했다.
귀국한 후 김재원은 – 동양사학전공이고 서울대 총장을 지낸 고병익과 함께 – 국내에 처음으로 이미륵에 대하여 소개했다. 김재원을 통해 한국에 이미륵이 소개된 후 1960년대 전혜린이 뮌헨대학교에서 유학을 하면서 이미륵의 묘지를 찾아 성묘를 하고 예의를 차리고 최초로 이미륵의 자전소설 ‘압록강은 흐른다 (Der Yalu fliesst)’ 한글 번역본을 출간하였다.
김재원의 많은 학문적 업적 중 하나는 한국 미술사를 독일어로 출판한 것이다.


2.7. 우리민족의 뿌리 찾기에 평생을 바친 안호상 (1906-1999)
안호상은 1920년 일본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과에 입학, 2년간 수학한 후 1922년 중국 상하이 중덕대학 예과를 마친다. 기미육영회의 장학생으로 1925년 독일로 유학을 와서 (구)동독 예나 대학교에서 철학과와 법학과에서 수학한 후 동 대학교에서 1929년 철학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 후 1년간 예나 대학교 흠볼트 학술재단에서 주는 장학금으로 연구원생활을 하다가 1930년 귀국을 한다.
일제치하에 귀국 하였기에 활동의 제약을 받았고 해방이 된 후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 철학 교수로 재직하게 되고 1948년부터 1950년까지 대한민국 초대 문교부 장관을 역임하여 이승만 대통령이 제시한 일민주의의 이론적 기틀 마련하였다.
문교부 장관 역임 후 학술원 부문 회원으로 활동하며 건국대, 동아대 교수로 재직하였고 1967년 대통령 특사로 국제사회를 순방하며 북한도 방문하였다. 1999년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안호상은 일찍 일제기간에 귀국을 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독일내에서의 활동에 관한 별도의 자료가 거의 없다. 이것은 차세대의 연구에 맡기기로 한다.


2.8. 최초의 독일유학생, 언어철학 박사 김중세 (1882-1946)
김중세는 개성에서 태어났고, 부호의 자제였으며 가평군수 김기환의 아우였다. 1900년에 4년간 성균관 경영학과에서 수학하고, 1905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1909년 독일로 유학을 떠나 정식으로 독일로 유학을 간 최초의 한국인이다.
중국여권을 소유하거나 일본 여권을 가지고 유학을 온 그 시대의 다른 유학생과는 달리 떳떳하게 대한제국 국민의 자격으로 독일에 유학을 올 수 있었다.
1909년 베를린 대학에서 철학과 고전학을 전공하고 독일인 지도교수를 도와 한국어와 동양철학연구에 크게 독일학계에 기여했으며 1926년 라이프찍히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지금까지 여러 연구발표에서는 김중세가 독일 최초의 박사라고 주장을 했지만 그가 학위논문을 1923년 처음으로 낸 곳은 베를린 대학이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김중세는 1924년 베를린에서 논문을 제출한 후 1925년 라이프찍히 대학으로 옮겨 다시 낸 논문으로 1926년 2월 12일 중국인 귀곡자의 철학을 정리해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그리고 1927년 10월애 논문을 정식 출간했다.
김중세의 베를린 거처지는 샬로테부르그 지역의 안스박흐 거리 (Ansbach strasse 3-2) 라고 일본영사관에 기록되었다. 김중세가 귀국을 한 해는 1928년으로 독일생활은 19년이었다.
김중세의 학문적인 업적은 독일학계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독일인 프리드릭히 뷜헬름 칼 뮐러 (Friedrich Wilhelm Kar Müller) 지도교수의 연구진에 포함되어 소수민의 언어자료를 수집, 번역, 해설 작업을 하였는데 고려인 포로들과 만나 한국어통역을 한 사실은 극적이며 의미심장한 역사의 한 장이 되었다.
1917년 3월 22일 베를린대학의 동양학 지도 교수를 따라 독일에 포로로 오게 된 함경도 출신의 고려인 3명 – 이들은 연해주 두만 강변에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러시아군에 끌려와 시베리아 횡단 중 폴란드 탄넨베르크 전투 중 독일군의 포로가 된 고려인이다 – 을 만나서 통역을 하고 그들의 한국어, 그들이 부르는 한국어 노래들을 녹취한다. 그 때에 고려인 포로들의 녹취자료들은 다양한 독립운동가를 포함한 한국노래, 불교 다라니계송등을 포함하고 있어 방대한 사료가치를 지니고 있다.
또한 김중세는 “Kuei–kuh-tze, der Philosoph vom Teufelstal (귀신계곡의 철학자)” 라는 중국 철학자의 문장을 번역하고 해설을 한 내용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인문학계에서 최초의 독일 박사는 1925년 백성욱이 베를린 대학교에서 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중세는 또한 당시 독일 학계, 특히 학술원에서 범어사전을 만드는데 크게 기여를 했다.
김중세는 자신 스스로 “1913년부터 10년간 백림대학 학사원에서 찬수관으로 근무했다“ 고 1928년 신문에 알린다. 범어(고대 인도어)와 중국어, 페르시아어를 대조하며 독일어로 번역을 한 후 번역본에 한글발음을 첨부하며 한글을 독일학계에 최초로 알렸다. 이 사실로 보아 김중세는 이극로 보다 앞서 독일에 한국어를 알린 학자임은 분명하다.
1924년 ‘개벽’지에 ‘동양 학계의 명성 김중세 씨’라는 글에서 이관용은 1921년 독일 라이프찌히에서 개최된 대회에 참관하면서 목격한 김중세의 대학자로서의 명성을 확인하고 자신보다 먼저 유학간 김중세가 독일학계에서 큰 기대를 안고 활동하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소개했다. (이관용은 독립운동가이며 고대철학을 전공했고, 1921년 스위스 취리히 대학교에서 한국인 최초로 <희랍 철학 비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또한 김중세는 특히 영, 독, 불, 희랍어, 라틴, 범어, 한국어, 일본어 등 9개 언어에 능통했으며, 불교원전을 독어로 번역해서 동서양철학계의 가교역할을 하여 동양철학을 독일어로 작업하며 독일학계에 이바지했다.
김중세는 11살 때부터 이미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독일 유학을 목적으로 독일어도 배웠다.
1928년 귀국해서 1929년부터 1932년까지는 일본 경성제대에서 강사로 활동을 했지만 서울에 돌아와서는 확실한 직장을 얻지 못하였다. 귀국하려던 당시에는 언론계나 학계에서 김중세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지만 그 이상은 진전보지 못한 것은 유감이다.
서울 연희전문대학에서 김중세를 교수로 초빙하려 했으나 기독교인이 아니어서 무산되었다고 한다. 1946년 64세로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김중세의 국내에서 활동상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1. 독일과 프랑스를 넘나든 한인 유학생들
    3.1. 이용제 (1896-1986)
    함흥 태생인 이용제는 1920년 6월 11일 동료 한수룡과 함께 망명길에 나선다. 상해를 거쳐 같은 해 12월 14일 프랑스 마르세이항에 도착했는데 이 선박에는 중국인 유학생 외에 21명 한국 젊은이들이 타고 있었다. 마르세이항에 도착한 후 각자 목적지를 찾아 독일로 떠나기도 하고 일부는 프랑스에 남는다.
    이용제는 일단 프랑스에 도착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어 노동일을 하면서 고학을 한다. 1922년 여름 독일 뷔르쯔부르그에 있는 친구 한수룡을 찾아가 – 당시 뷔르쯔부르그에는 한인 유학생이 약 30여명이 있었다 – 이들의 도움으로 일단 용기를 얻어 이용제도 뷔르쯔부르그 대학교에 등록을 하지만, 친구에게 신세를 지면서 학업을 계속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고 파리로 다시 떠난다.
    독일의 마르크 파동으로 경제적으로 어려워지자 독일 뷔르쯔부르그에서 유학하던 많은 한인이 프랑스로 넘어온다. 이용제는 그 중 정석해에게 병원 일자리를 알선해주기도 한다. 고향 친구 한승룡이 프랑스로 건너왔다가 폐렴이 걸려 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자 친구의 입원비를 대준다.

(다음호에서 이어집니다.)

1226호 20면, 2021년 7월 9일

Print Friendly, PDF & Emai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