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 Verband] 베를린 소녀상 뒤의 숨은 인물들 (2)

평화의 소녀상은 흩어진 사람들을 다시 모으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슈테피 리히터 교수가 나타난 지 일주일 후, (지난 기사 참조) 또 한정화 대표의 독일 이름인 „나탈리!“를 외치며 <일본군위안부행동> 온라인회의에 등장한 일본학과 여성 교수가 한 명 더 있다. 바로 일제 렌츠(Prof. Dr. Ilse Lenz) 교수다.

일제 렌츠는 보훔과 뮌스터대학의 페미니스트 교수인데, 1990년부터 1991년까지 베를린자유대학 동아시아 일본학과에서 객원 교수를 지냈고, 한 대표는 마침 일본학과에서 공부를 했던지라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 렌츠 교수는 초창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연구한 강정숙 박사와 함께 당시에 <암닭이 울면…>이란 제목으로 한국의 여성노동운동 저서를 출간하고, 평생을 열정적으로 여성운동에 관해 강의를 해온 분이다.

한정화 대표가 이 교수를 처음 만난 1980년 말 1990년도 초반의 베를린은 아직 분단 상태로 베를린자유대학은 전통적인 대학 분위기였으며 젠더 문제에도 전혀 관심이 없는 상황이었다. 여성 교수의 숫자도 미미했고 교내 분위기는 보수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 측은 구조조정이란 명분으로 더욱더 보수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조짐을 보였고, 이에 반대하는 학생들이 조직한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다. 더 나아가 학생들은 1년간 학교 건물을 점령하고, 에른스트 로이터 광장(Ernst-Reuter-Platz)에서 구 서베를린 구청(Rathaus Schöneberg)까지 매일 약 4 km를 행진하여 구조조정을 막을 수 있었다.

그 열기에 고무된 동아시아학과 여성들과 학생들은 한국학, 일본학, 중국학과가 과별로 따로 수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함께 동아시아 여성 관련 세미나를 자발적으로 진행해보자는 데 뜻을 모았다. 학생들의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한 대표는 자체적으로 이 수업을 진행하기에 이른다. 이때의 수업주제 중 하나가 일본인들에 의한 한국의 기생관광과 독일 남성들의 태국 성매매관광이었다. 같은 시기인 1989년, 신기하게도 한국에서도 여성단체들이 기생관광과 같은 여성의 성 착취 문제를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하였다.

이렇듯 젠더 이슈가 대학 내의 이슈로 급부상하고 여성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자 결국 서독의 한 여성교수가 객원교수로 초빙되어 2학기 동안 여성노동시장에서의 불평등이란 주제로 세미나를 시작하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바로 그분이 일제 렌츠 교수였다. 렌츠 교수 세미나에 참여했던 대다수의 여학생들은 박식하고 훌륭한 학자이자 열정적인 페미니스트 활동가, 학생들에게 서로 반말을 사용하자고 제안했던 68세대 운동권 페미니스트에게 반해 버렸다. 그래서 이 교수를 따라 거의 모든 학생들이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 대표도 렌츠 교수의 영향을 받아 그때부터 한국 여성운동과 기지촌여성 및 일본군 „위안부“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어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2022년 세계 여성의날 집회

당시에는 롤모델이 될 만한 여성들이 거의 없던 시기라 렌츠 교수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여학생들에게 정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다. 1년 객원 교수 생활을 마치시고 서독으로 돌아간 후 간간히 렌츠 교수의 소식을 듣고 있었지만, 사실상 연락이 두절된 지 오래였다. 그런데 베를린 평화의 소녀상 철거 사건이 불거지자 렌츠 교수가 갑자기 다시 나타나신 것이었다. 렌츠 교수는 소녀상 철거반대 서명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일본군위안부행동> 회의에도 참여하기 시작, 지금까지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소녀상 문제에 대해서 독일의 한국학과 교수들보다도 일본학과 교수들이 더 분개하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근본적인 문제인 가부장제와 일본의 역사수정주의를 진심으로 비판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제 렌츠 교수 역시 리히터 교수와 함께 일본 정부 측의 눈치를 보지 않고 비판에 앞장서고 있다.

이렇듯 소녀상 철거 위기로, 30년 전의 교수님들이 다시 열정적으로 합류하게 되니 모임은 갑자기 대가족이라도 된 듯 든든한 마음이다. 물론 이 대가족 식구들 중에는 모임 초기부터 함께 해온 베테랑 선생님들도 많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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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3호 17면, 2022년 5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