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과 야마나카의 문화재 전쟁(3, 마지막회)

국보(제294호)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을 얻다

■ 참기름병의 홀연한 등장

간송과 야마나카 상회는 2년 뒤인 1936년 또다시 불꽃튀기는 접전을 벌인다. 이번 접전은 그야말로 한편의 서사시 같다. 드라마의 시작은 1920년대초까지 올라간다.

1920년대 초 어느 날 광주리를 이고 참기름을 팔던 행상이 서울 황금정(을지로 1가)에 사는 단골 일본인 여성을 찾았다.

“시골에서 방금 짜온 참기름이라 고소해요. 4원에 사세요.”

그런데 일본인 여성의 눈에 기름을 넣은 병이 밟혔다.

“기름병도 참 예쁘네요. 저 병도 주세요.”

“이거! 좋은 병인데…. 그럼 1원 더 얹어주세요.”

일본 여성은 군말없이 참기름을 가득 담은 병을 구입했다. 기름 장수가 돌아가자 일본 여성은 남편에게 달려갔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남편은 골동품상(무라노·村野)이었다. 남편 무라노는 아내의 안목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병

보기에도 대단한 백자였다. 조선백자의 특징은 단순·절제미로 축약할 수 있다. 문양은 아름답지만 다양한 색채의 사용은 절제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참기름을 담은 이 병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병 하나에 붉은 색 진사(辰砂)와 검은 색 철사(鐵砂), 푸른 색 청화(靑華) 등 3가지 안료를 함께 장식했으니 말이다. 높이 42.3㎝, 아가리 지름 4.1㎝, 밑 지름 13.3㎝인 이 병은 가늘고 긴 목에 풍만한 몸통과 약간 낮은 굽을 하고 있다. 굽은 선을 그은 듯이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으며, 아가리는 그대로 끊어내어 날카로운 맛이 있다. 18세기 전반경의 조선백자로 보인다. 백자의 앞뒤 면에는 국화와 난초를 그렸으며, 벌과 나비들이 노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돋을무늬로 난초는 청화, 국화는 진사, 국화줄기와 잎은 철사, 벌과 나비는 철사 또는 진사로 칠했다.

“야. 당신 어떻게 이런 병을 살 수가 있지. 이 정도면 몇십원은 족히 받을 수 있을거요.”

이 병은 유약의 질이나 형태의 비례감, 그리고 세련된 문양 표현으로 보아 18세기 전반 왕실의 도자기를 굽던 경기도 광주의 분원에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마을 주민이 광주 분원의 가마터에 묻혀있던 백자를 우연히 발견하고는 참기름을 넣어 내다팔았음이 분명하다.

■ 1원-60원-600원-3000원-?

똘똘한 아내 덕분에 귀한 조선백자를 단돈 1원에 얻은 무라타는 다른 골동품상에게 60원을 받고 넘겼다.

단번에 60배 남는 장사를 한 것이다. 그러나 푼돈이었음이 금방 드러났다. 이 백자는 스미이 다쓰오(住井辰男)라는 수집가에게 무려 600원에 팔렸으니까…. 이 소식을 들은 무라타는 밤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이것도 약과였다. 1932년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 스미이가 이 백자를 포함한 수장품 180여 점을 경성구락부 경매에 출품했다.

백자는 이때 모리 고이치(森梧一)라는 수집가에게 3000원에 낙찰됐다. 10여 년 만에 1원짜리가 3000원, 즉 3000배나 뛰었던 것이다. 당시 경성의 일본은행에 근무하고 있던 모리는 주로 조선백자를 수집하고 있었다. 원래 일본인들이 열광한 품목은 조선백자가 아니었다. 고려자기였다. 예컨대 한국침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완형의 고려자기만 1000점 이상을 수집할 정도로 고려자기광이었다. 조선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일본인들의 손에는 고려인삼과 함께 고려자기가 들려있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조선백자에 대한 관심은 적었다. 내세울만한 재력가가 아니었던 모리는 남들이 거들떠보지 않았던 조선백자에 눈을 돌렸다. 그랬기에 수준높은 백자를 상당수 보유하고 있었다. 틈새를 잘 공략했던 것이다. 그랬던 모리가 1936년 사망하자 유품 200점이 경매에 나왔다. 일단 2~3일간 도록을 만들고, 전시회를 열어 관심있는 수집가들에게 선을 보인 뒤 경매를 진행했다.

■ “저런 조선백자는 처음이야!”

이때 간송의 경매대리인인 신보가 간송을 만난다. 신보의 손에는 도록용 사진 200점이 들려있었다.

유물사진들을 유심히 살펴보던 전형필은 일단 현재 심사정(1707~1769)과 겸재 정선(1676~1759)의 폭포 그림을 일단 ‘찍어’ 두었다.

그러나 전형필의 시선이 고정된 물건은 따로 있었다. 문제의 조선백자였다.

‘저런 조선백자는 처음이야. 국화와 나비는 따로 양각으로 붙였고, 풀잎은 청화, 국화는 진사와 철사 안료…. 이렇게 양각처리하고 세 가지 색을 입힌 백자는 처음이야.’

전형필과 신보의 눈이 마주쳤다. 이번 경매의 최고 화제작이 될 것이 분명했다.

“신보 선생, 이 백자의 예상가는 얼마요?”

“6000원인데, 아마도 더 올라갈 것 같습니다.”

전형필은 경매가 열리기 하루전(11월21일) 경성미술구락부 전시장에서 백자를 직접 확인한 뒤 반드시 낙찰 받아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전형필은 다른 때와 달리 직접 경매장에 가보기로 했다. 다음날인 22일 경매가 시작되자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평소 직접 경매장에 나서지 않던 전형필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경매장엔 일순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 10원 단위로 치고받은 자존심 대결의 끝

전형필측은 심사정과 정선의 작품 두 점을 별 어려움없이 낙찰받았다. 이윽고 오후 경매가 시작되고 문제의 백자가 탁자 위에 올랐다.

순식간에 가격이 올라갔다. 누군가 ‘3000!’ 하자 오사카의 대수집가인 무라카미(村上)가 ‘5000!’을 불렀다. 순식간에 2000이 뛰면서 경쟁이 본격화했다. 6000-7000으로 뛰었을 때 경매사가 장내를 한바퀴 둘러보았다. ‘이대로 낙찰이야’는 듯…. 이때 전형필의 대리인인 신보가 ‘8000’을 불렀다.

경매사가 무라카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무라카미는 눈을 감았다.

“자! 8000입니다. 더 없습니까. 8000….”

경매사가 세 번 외치는 동안 더 높은 가격을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경매사는 ‘8000 낙찰’을 알리는 경매봉을 쳐야 한다. 경매사가 천천히 ‘8000’을 두번째로 숨을 고르는 순간 ‘9000!’ 소리가 들렸다. 아마나카였다,

그것도 순간. 곧바로 누군가 ‘1만!’을 불렀다. 전형필의 대리인인 신보였다. 그때부터 500원 단위의 싸움이 시작됐다.

‘1만500원!’ ‘1만1000원!’ ‘1만1500원!….’

순식간에 ‘1만4500’이 되었다. 어느새 호가가 10원 단위로 올라갔다. 자존심 싸움으로 바뀌었다. 1만4510, 1만4520, 1만4530…. 신보가 ‘1만4580!’을 불렀다. 그리곤 전형필을 힐끗 바라보았다. 전형필은 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 더 응찰해도 좋다는 신호였다.

야마나카 상회측이 순간 침묵에 빠졌다. 야마나카는 수집가가 아니라 골동품상이었다. 마냥 자존심 싸움을 펼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이문을 남기고 팔아야 할 골동품상인데 가격을 잘못 올려놓았다가 손해를 보면 어쩌란 말인가. 야마나카 상회측은 경매사가 ‘1만4580’을 세 번 부를 동안 눈을 감고 있었다.

■ 전형필의 극적인 역전승

전형필과 야마나카 사이에 펼쳐진 조선백자 경매사상 최고의 명승부는 이렇게 전형필의 승리로 끝났다.

이렇게 낙찰받은 조선백자는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문 병’이라는 긴 이름이 붙었다. 이 백자는 보물(제214호)로 지정됐다가 국보(제294호)로 등급이 오르는 영예를 안았다. 전형필이 거대자본 야마나카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액수(1만4580원)은 당시 기와집 15채 가격이었다고 한다.

간송 전형필은 야마나카 상회와의 조우에서 국보 2점(혜원 풍속도와 조선백자)을 얻었다. 다만 첫번째 만남에서 가치에 비해 비싼 가격으로 사들인 석조물을 감안하면 어떨까. 간송과 야마나카의 3차례 맞대결 성적은 ‘간송의 2승1패 승리’라 할 수 있다.

1218호 30면, 2021년 5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