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날을 회상해 보면 누구나 간직하고픈 이야기들을 마음속에 담고 있습니다.
1969년 한국 전방부대에서 군대 생활을 시작한 나는 백마사단으로 전출명령을 받고, 베트남에서 3년이 넘는 군생활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그 떼 제 나이 27살 때였습니다. 수소문 끝에 종로 5가 어느 나이트클럽에서 가수 겸, 무대 사회를 보는 사람으로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5인조 밴드였는데, 나는 매 스테이지마다 노래를 부르는 일과 테이블에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는 손님들을 무대 위로 불러내어 노래를 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풍조는 노래를 부른 손님은 반드시 밴드 앞에 돈을 놓고 가는 것이 일반적인 예의였습니다. 그 당시 손님들이 노래를 부르고 난 뒤, 팁처럼 주고 가는 돈을 <오부리>라고 불렀습니다. 클럽에서 일해 본 사람이라면, 이 말의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돈이 그렇게 적은 액수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클럽이 파하면, 밴드 5명과 나까지 6명이서 와리깡(그 당시 흔히 사용하는 나눈다는 용어)을 하게 됩니다. 물론 밴드 마스터가 제일 많은 몫을 가져가지만, 나머지 사람들도 한 달 수입으로 보면, 웬만한 월급쟁이보다는 수입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 후, 점점 수입이 더 좋다는 클럽을 찾아 청량리에서 한참을 일하다가, 나중에는 이태원으로 옮겨 가게 되었습니다. 서울 시내 밴드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나서 오브리를 잘 올리고, 직접 가수 역할까지 한다는 이유로 저는 점점 클럽분야에서 인기 있는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클럽에서 일하다 보면, 거의 매일 저녁 크고 작은 싸움들이 벌어집니다. 대체로 힘깨나 쓴다는 젊은이들이 와서 술과 안주를 몽땅 시켜먹고 돈을 내려고 하지 않을 때 일어나는 충돌이 대 부분입니다. 물론, 어느 클럽을 가도 영업부장이라는 직함을 가진 자가 있어서 불량 손님을 전담하긴 하지만, 행패를 부리는 손님 숫자가 많아서 감당하기 어려울 때는 웨이터, 밴드, 할 것 없이 모두 나서서 싸움판을 돕기도 합니다.
가장 골치 아픈 팀들이 유도대학을 다니는 아이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이태원에는 90% 이상이 미군 전용 클럽이 있었는데, 저는 유일하게 신장개업하는 한국클럽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어서 밤 12시가 넘으면, 집으로 가지도 못하고 클럽 의자에서 쪽잠을 자다가 새벽 4시 통금해제 사이렌이 울리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태원에서 일할 때, 큰 싸움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면서, 저는 이 직업을 떠나야 하겠다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이태원에는 ‘텍사스 골목’이라고 하는 유명한 거리가 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총각집이라는 간판을 걸고, 포장마차를 시작했습니다. 첫날부터 장사가 잘 되더니, 점점 매출이 오르면서 이태원의 총각집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습니다. 손님의 50%이상이 미군들에게 호객 행위를 하는 여자들이었고, 지나가는 뜨내기손님 10%., 미군 M.P(헌병)들이 25% 정도,(그 당시 이태원에는 미군 장병들만을 위한 클럽들이 밀집해 있어서 치안을 담당하는 미군헌병들이 아주 많았음.), 그리고 나머지는 이태원 토박이들이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이태원 파출소, 방범대원, 그리고 이태원 건달들과 부딪힘도 많았지만, 어느 사이에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면서 나는 신나게 수입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나의 주요메뉴는 돼지갈비였는데, 정말, 정신없이 많이 팔았습니다.

이태원에는 호객행위를 하는 새로운 여자가 나타나면, 금방 알게 됩니다. 수백 명의 여자들이 있었지만, 나의 포장마차를 거처가지 않은 양색시(그 당시 미군들을 상대로 호객행위를 하는 여인들을 통상적으로 그렇게 불렀음)는 아마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 당시 이태원 양색시 중에 꼭 남자같은 체격과 남자 같은 목소리를 가진 여자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그를 왕 언니라고 불렀습니다. 그녀는 매일 저녁 나의 포장마차에 들렸는데, 누구나 그녀를 보면 무서워하고 공손해 졌습니다.
어느 날 왕언니가 고향인 강원도 산골 어딘가에 잠간 다녀온다고 하더니, 며칠 후에 나타날 때, 시골스럽게 생긴 스무살이 채 되지 못한 듯 한 계집아이하나를 데리고 왔습니다. 영락없는 시골처녀였습니다. 그런데 그 시골처녀의 등에는 한 아기가 업혀 있었습니다. 그 시골스러운 처녀는 포대기로 아기를 업고 텍사스거리를 오가며 칭얼거리는 아이를 달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왕언니는 그 시골처녀를 <막내>라고 불렀습니다.
왕언니의 말에 의하면, 막내의 엄마가 새로운 남자를 만나, 집을 나간 후, 어느 날 피 덩어리 같은 아이 하나를 데리고 오더니, 막내에게 맡겨 놓고는 또 집을 나간 후로 소식이 없어, 고향에 갔다가 그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서 데려 왔다는 것입니다. 그 후로 나는 막내를 보면 불러서 오뎅, 돼지갈비 등, 맛있는 메뉴들을 덥석, 덥석 담아 주었습니다. 정말, 전혀 다른 생각 없이 막내의 처지와 그의 등에 업혀 칭얼대는 아버지가 다른 그의 여동생이 너무 가련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마도 막내의 한없이 순수하고 가련한 모습에 연민의 정이 느껴졌는가 봅니다. 언제부터인가 막내가 하루라도 보이지 않으면 궁금해지기 시작 했습니다. 2주 이상 막내의 모습이 보이지 않다가, 어느 날, <오빠>하며 누구인가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오는데, 막내였습니다. 그런데 평상시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하지 않던 화장을 하고, 등에 아기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곁에는 참으로 준수하고, 순진하게 보이는 미군 병사 한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전투복이 아닌 정장을 입고, 나폴레옹 같은 모자를 쓴 그 미군 병사의 인상이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몇 마디 더듬거리는 영어로 그 미군 병사에게 나를 소개 하더니, <오빠, 남은 갈비 다 싸줘.> 막내는 거의 매일 저녁 나의 갈비 재고가 하나도 남지 않도록 모두 쓸어가다시피 매상을 올려 주었습니다.
나중에 혼자서 조용히 와서 얘기를 하는데, 그 병사의 아버지가 미국 보잉사 소속의 회사 대표라고 말하면서 오는 4월에 미국으로 가서 결혼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막내는 그가 말 한데로 4월의 어느 날, 어린 동생까지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제가 2년 여 동안 이태원 텍사스 골목에서 총각집을 하면서, 가장 기쁘고, 또 가장 슬프고, 또 가장 잊히지 않는 시골뜨기 처녀, 막내가 5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리고, 4월에 떠나간 그녀가 생각이 날 때면, 하늘 저편 어딘가에 살고 있을 막내를 생각하며 페티김의 <4월이 가면>을 열창 합니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얼굴, 잠이 들면은 꿈속의 사람, 4월이 가면 떠나갈 사람, 오월이 오면 울어야 할 사람>
그리고 기도합니다. <막내>가 꼭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오늘 소개드리는 강지현 아동은 경상남도 밀양에 위치한 아동보육시설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아동의 친모는 미혼모로 아동을 출산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동 양육에 미숙하여 아동에게 적절한 돌봄을 제공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아동은 아동보호전문기관을 통해 2016년 시설에 입소하였습니다.
친모는 아동의 시설 입소 후 아동 양육을 포기하였고 연락 두절되었습니다. 아동을 찾는 가족은 없는 상황입니다.
아동은 2024년 현재 초등학교 2학년입니다. 시설 선생님의 사랑으로 건강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애교가 많고, 활발한 성격입니다. 학교 적응에 어려움이 있어 ADHD 약을 복용하고 있고, 많이 호전되었습니다. 아동의 장래희망은 헤어 디자이너입니다.
교민 여러분의 사랑과 관심은 지현 아동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박 해 철 선교사 드림.
1398호 34면, 2025년 2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