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관악구에 위치한 원당 초등학교 4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도소원 양이 과거 어린시절 소년 소녀 가장 생활 수기 모음에서 초등부 은상을 받았었던 작품을 소개 합니다.
어느날 나의 동생이 생선이 먹고 싶다고 하여 2천원을 들고 시장으로 갔습니다. 이곳저곳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2천원으로는 살만한 생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김을 천원어치 사고 두부 한모를 오백원 주고 사고, 호박 한개를 오백원에 샀습니다. 동생이 생선을 사오지 않았다고 짜증을 냈지만, 나는 아무 말 없이 조금 남아 있던 된장을 풀어서 두부를 넣고 된장국을 끓였습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는 밀가루 반죽을 직접 하셔서 리어카에 싣고, 동생은 등에 업고, 나는 리어카에 태우고 하루종일 서서 붕어빵 장사를 하셨습니다. 나는 어머니의 다리를 주물러 드리면서 우리 가족도 언제인가는 잘 살게 될 것이라는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원래 우리 가족은 부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병환이 악화되면서 인천 영종도에 있는 조그마한 섬마을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곳에서 어머니는 아주 작은 구명 가게를 하셨습니다. 어느 날 깊은 잠에 빠져 있을 때, “불! 불! 불이야”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불은 전깃줄이 있는 곳을 따라 번지고 있었습니다.
나는 너무 놀라서 겁에 질려 있었고, 아버지는 동생 소중이를 안고, 밖으로 나가셨고, 그 다음 나도 업고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어머니가 붕어빵 장사를 하여 애써 모은 돈으로 이 구멍가게를 어렵게 차리셨는데, 오늘의 불 때문에 다 타버린 것입니다.
그날은 유난히도 눈이 펑펑 쏟아졌는데, 눈을 하얗게 맞으며 눈 위에서 몸부림을 치시며 어머니는 펑펑 우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온다, 간다 한마디 말도 하지 않으시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나와 동생은 너무 추워서 얼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 인천 용유 파출소 순경 아저씨들이 나와 동생을 데리고 파출소 순경 아저씨들이 사용하는 방안에서 몸을 녹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배가 너무 고팠습니다. 우리가 배고픈 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순경 아저씨들께서는 나와 동생에게 한상 차려 주셨습니다. 나와 동생은 정신없이 밥을 먹었습니다. 배가 부르자 이 추운 날씨에 어데론가 사라져 버린 어머니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날 저녁 서울에서 둘째 고모님께서 나와 동생을 데리러 오셨습니다. 나와 동생은 배를 타고 서울로 오게 되었고, 원당 초등학교 1학년 4반이 되었습니다. 고모님 댁으로 오긴 했지만, 나와 동생이 거처할 방은 따로 없었습니다. 아주, 아주 작은 방 침대 위에서는 정미 언니하고 작은 언니가 자고, 나와 동생 소중이는 똑바로 눕지도 못하고 옆으로 누워 칼잠을 자야 했고, 사촌 오빠는 고개만 내놓고 두 다리는 침대 밑으로 뻗고 자야 했습니다.
고모님께서는 매일같이 나를 안고 울면서 기도 하셨습니다. <하나님 이 자녀들이 너무 불쌍 합니다. 이 아이들은 착한 아이들입니다. 밝은 태양처럼 씩씩하게 자라게 하시고, 이 아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밝은 빛을 비추어 주세요.> 이렇게 좁은 집에서 8식구가 모여 산다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런데 며칠전 또 다른 사촌 언니까지 고모집으로 합류했습니다. 좁은 방에서 너무 많은 식구가 살다보니 고모와 고모부의 부부싸움이 쉬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런 형편 속에서도 영종도에 홀로 두고 온 아버지와 어데론가 사라져 버린 어머니의 생각으로 머리가 무거웠습니다.
그 후 불교방송의 거룩한 만남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350만원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고모의 도움으로 작은 방을 하나 얻어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정말 고마운 선생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선생님은 이태원 초등학교 4학년 담임선생님으로 일주일에 두 번 오셔서 저와 동생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십니다. 공부만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것을 알게 해 주셨습니다.
나는 오랜만에 영종도의 아버지를 만나러 갔습니다. 아버지 혼자 비닐하우스에서 살고 계셨는데, 방도 부억도 없이 겨우 밥만 해 드시면서 병마와 싸우고 계셨습니다. 나는 수척해진 아버지를 보고 울음이 나오려고 했지만 꾹 참고 또 참았습니다.
정말, 나의 어머니는 어데로 가셨을까? 이렇게 병든 불쌍한 아버지를 버리고 어떻게 떠나실 수 있었을까? 어머니는 우리가 보고 싶지 않으실까? 밤마다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울다 지처 잠이든 동생 소중이의 모습을 보면 저는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더구나 잠꼬대를 하면서 “엄마, 엄마”를 부를 때면, 나는 너무나 슬픈 생각이 들어 잠자는 동생을 껴안고 소리없이 울었습니다.
내가 자라서 엄마가 된다면, 어머니보다 더 큰 어려움에 부딪힌다 해도 내가 낳은 자식들에게는 사랑으로 끝까지 책임 있는 엄마가 되겠다고 결심을 해 보았습니다. 지금 저와 동생은 그래도 우리 부모님이 해주지 못하신 것들을 대신해 주시는 고마우신 아저씨와 아주머니, 선생님들의 덕분으로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장래에 꼭 훌륭한 글을 쓰는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여러 후원자님들께서 보내주신 후원금을 아껴 쓰고, 절약하며, 내가 빨리 자라서 돈을 벌게 되면 병든 아버지를 병원에 모셔가고, 엄마도 꼭 찾아 함께 살겠다는 다짐도 해 봅니다. 도저히 더 이상 희망이 없을 것 같은 형편이었지만, 고모님이 기도해 주신 것처럼, 묵묵히 참고 견디면, 언제인가는 하나님의 빛이 우리 가족을 비추어 주실 것이라는 희망을 가져 봅니다.
내 옆에서 쌔근쌔근 잠들어 있는 동생 소중이를 바라보며, <내가 반드시 내 동생 소중이를 잘 지켜 줘여지> 라고 결심을 해 봅니다. 도와주신 모든 후원자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원당초등학교 4학년 2반 도소원.
오늘 소개드리는 성윤정 아동의 부모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이혼을 하게 되었고, 이후 어머니 홀로 아동과 동생을 키우던 중, 더 이상 생활을 지속하기가 어려워 현재의 시설로 동생과 함께 입소하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언제인가 자식들과 함께 생활할 수 있는 날을 소망하며 취직을 하였습니다. 가끔씩, 두 자녀를 만나려고 시설을 방문하기도 합니다. 아동은 엄마와 살게 될 날을 기다리며, 매일 엄마의 전화를 기다립니다.

윤정 아동은 2025년 현재 고등학교 1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학교에서 댄스부 활동을 통하여 리더쉽을 키우고, 특히, 영어에 남다른 소질과 열정을 가지고 자신의 생활 방향을 잘 잡아가고 있습니다. 또한 시설 내에서도 여러 동생들을 따뜻하게 보살펴 주는 언니로서의 역할도 잘 감당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시설내의 언니들에게도 바른 예의로 대하므로 모든 사람들에게서 칭찬받는 모범적인 학생입니다.
교민 여러분의 관심과 격려는 윤정아동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식을 기다립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박해철 선교사 드림.
1436호 34면, 2025년 11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