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 열사는 국제 정의·평화 강조한 선구자”

헤이그 이준 열사 기념관에서 순국 118주기 추모식 열려

한국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 ‘헤이그 특사 사건’의 현장, 네덜란드 ‘이준 열사 기념관’이 7월 12일 개관 30주년 기념식과 추모식을 열었다.

이준(1859~1907) 열사는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고종 황제의 특사단 부단장 격인 부사(副使)로 파견됐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로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국제사회에 알리겠다는 뜻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고 헤이그의 드용(De Jong) 호텔에서 순국했다.

네덜란드 교민 송창주(86) 기념관장, 이기항(89) 이준 아카데미 원장 부부는 1992년 이준 열사의 순국 현장인 드용 호텔이 재개발로 매각 위기라는 소식을 듣고 헤이그 시당국을 설득해 철거를 막았다. 이후 건물을 사들인 뒤 1995년 기념관으로 개장했다. 열사의 유품과 자료를 모아 전시했고, 당시 열사가 묵었던 방의 모습도 재현했다. 프랑스 파리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청사와 함께 유럽에서 드문 항일 독립 유적지인 이곳에 30년간 9만명이 방문했다. 이 공으로 부부는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기념관은 법관양성소 1회 졸업생 출신 검사이기도 했던 이준 열사가 정사(正使) 이상설, 통역관 이위종 열사와 함께 분투한 현장이다. 한국은 당시 만국평화회의에 초청받은 47국 중 12번째였다. 세 열사는 일본의 집요한 반대에 회의장 입장에 실패했지만, 세계 외교관과 언론을 상대로 제국주의 강대국의 ‘힘의 논리’에 맞서 국제법에 의거한 조선 독립과 동아시아 평화를 필사적으로 부르짖었다.

페터 판 덴 등헌 영국 브래드퍼드대 명예교수는 기념식에서 “전쟁과 핵 위협이 확산하는 오늘날, 이 기념관은 국제 정의의 회복이 왜 중요한지 다시금 일깨워준다”고 했다. 또 홍 대사는 “대한민국은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오늘날 세계 평화와 안보를 위한 책임 있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광복 80주년과 이준 열사 순국 118주기를 함께 기념한 이날 행사엔 홍석인 주네덜란드 한국 대사, 백기봉 국제형사재판소(ICC) 재판관, 얀 판 자넨 헤이그 시장, 네덜란드 한국전 참전용사회 대표 등 150여 명이 찾아 열사의 뜻을 기렸다. 일본 천황의 과거사 사과를 주장해 온 무라오카 다카미쓰(村岡崇光) 네덜란드 레이던대 명예교수도 참석했다.

이준열사 기념관은 1907년 6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고종 황제의 밀사로 파견된 이준 열사가 묵으며 활동했던 드용(De Jong) 호텔 건물에 조성 됐다. 이준 열사는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은 1905년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압으로 이뤄 졌음을 폭로하고, 국제 여론의 힘으로 이를 파기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의 방해와 강대 국들의 냉대로 회의에 참석조차 못 했고, 그해 7월 이곳에서 분사(憤死)했다.

이후 85년간 까맣게 잊혔던 이 호텔 건물을 네덜란드 교민인 송창주 관장과 남편 이기 항이준아카데미 원장 부부가 발굴했다. 두 사람은 1992년 이 건물의 사연을 적은 현지 신문 기사를 보고 “유럽 유일의 독립운동 유적지를 이대로 둬선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사재를 털어 건물 매입에 나섰고, 직접 이준 열사와 밀사단의 흔적과 자료, 유품을 찾아 1995년 8월 개관했다.

기념관은 1층부터 3층까지 각종 전시물이 빽빽이 들어차 있다. 2층에는 당시 이준 열사가 지내고 분사한 방을 재현했다. 코로나 직전인 2019년 7000여 명이 방문하는 등, 30년간 줄잡아 12만여 명이 방문한 것으로 추산된다.

한편 이준열사의 유해는 헤이그의 니우 에이컨다위넌(Nieuw Eykenduynen) 공동묘지에 가매 장됐다가, 1963년 9월 26일 서울 수유리로 이장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