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교의 귀띔, 천 년을 가라 한들 멀다 했으랴 (19)

Dipl.-Ing. WONKYO INSTITUTE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냉전 초기에는 미국과 동독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다. 전쟁 이후 미국 중심의 자본주의 진영과 소련 중심의 공산주의 진영간의 극심한 대립관계에 있었기 때문이다.

역사는 1947년 3월 12일에 있은 트루만 독트린(Truman Doctrine)부터 1991년 12월 26일 소련 붕괴까지를 칼트크릭 (냉전기, Kaltkrieg) 으로 보고 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전쟁발발국이었던 독일연방공화국(서독) 과는 새롭게 외교관계를 맺으면서도 동독과는 대사 교환조차 않고 있었다. 미국은 동독이 공산국가로서 독립적인 외교정책을 수행할 수 없는 하나의 소련 위성국가로 보고 있던 것이 이유였다.

그러다가 1973년 1월 동독의 유엔주재 “옵서버 (Observwer)”가 미국에 외교관계 수립을 위한 협상의 준비되어 있음을 알려왔다. “옵서버는 어떤 단체의 정회원이 아니지만 회의에 참석이 허용된 사람으로서 회의 중에 의견은 말할 수 있으나 의결권이나 문제의 발의권 등은 주어 지지 않는 참관인” 을 뜻한다

사실 이보다 1년 전인 1972년 11월 당시 서독 빌리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이 동서독간의 기본조약체결을 맺은 사건의 결과로 동독이 미국과 협상 의향이 있음을 알려온 것이다.

빌리 브란트 수상은 1969년에 발표한 동방정책에서 동구권 국가들과의 관계개선 정책을 밝혔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방국가들은 서독정부가 독일을 대표하고 있는 것으로 상대해왔다. 그러다가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으로 동서독간의 기본조약이 체결되자 나토 (NATO) 회원국이 개별적으로 동독과 수교의향이 있음을 밝히고 나섰다.

독일 나치 정권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결과로 독일은 미국, 영국, 불란서, 소련의 지배로 분단 통제되고 있었고 공장에서 생산되는 제품이나 지방정치 결정은 하나하나 통제본부에서 허가를 받아야만 제작할 수 있었다.

영국은 독일 제품을 사지 못하게 하기 위해 독일에서 생산되는 모든 제품에 “made in germany”를 붙이게 했다. 그 결과 영국은 “made in germany”가 붙은 제품 모두가 튼튼하고 고장이 없다는 것을 광고해 주는 꼴이 되었고 너도나도 찿게 하는 세계적인 상품으로 거듭나게 해주었다.

세계에서 문화예술과 국방 등 각 방면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미국이 동독 국민에게 영화나 음악을 통해서 문화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던 반면에 동독정권은 세계로부터 비인도적인 사회주의라는 이념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다가 1972년부터 동서독 두 나라 간에 외교적 변화를 보이기 시작하면서 우선 서독과 동독의 정상들이 만나 독일기본조약에 서명을 한 것이다.

독일기본조약 서명이 있기까지 서독이 경제적으로 부유하게 살면서 자유민주적인 서독인과 공산주의의 체제 속에 묶여 사는 동독인들에게 물질적인 지원을 해줌으로서 서로 같은 독일인이라는 동질성을 심어 주는 것에 노력해 왔다. 이런 물질적인 지원은 동서독간의 경쟁과 갈등, 주민들의 접촉 규제 등을 조금씩 완화시켜 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서독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총리는 적극적인 동방정책으로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폴란드를 방문할 당시 국립묘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제2차 세계대전 때 끼친 피해에 사죄했다. 한 나라의 재상으로서 처음 있는 일이었으며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장면으로 남았다.

특히나 필자 같은 경우는 당시 독일을 공식방문 한 조카사위가 빌리 브란트 수상과 함께 찍은 사진 속에 폴란드 국립묘지 앞에서 무뤂을 꿇고 용서를 비는 모습의 독일 2유로짜리 동전도 같이 자리하고 있어서 볼 때마다 가슴을 울리고 있다.

현재의 일본 왕 나루히토가 우리나라를 방문할 기회가 있다면 그도 현충원 국립묘지로 가서 그들이 대한민국 국민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해 무릎꿇고 용서를 비는 용기가 있을까?

기본조약체결 이후 첫 번째로 서독과 동독은 서독의 수도 본(BONN)과 동베르린(Ost-Berlin)에 서로 상설 대표사무실을 개설함과 동시에 미국과 소련의 관계도 완화해 가는 데에 노력했다.

1973년 1월 미국은 동서독이 유엔 동시 가입안을 제출했고 이것은 동독을 하나의 국가로 승인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1974년 9월 미국은 공식적으로 동독과 수교를 맺었다.

동독측 대표 쥐스 (Sues) 가 외교 조인식에 서명 했다. 이로써 미국은 전쟁참전 승리국(미국, 영국, 불란서, 소련) 중에서 마지막으로 동독을 인정하는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동독은 제2차 세계 대전 피해보상 거부를 들고 나와 어려움을 겪었는데 동독은 제3제국의 후계자가 아니라 새로운 독일국가이기 때문에 전쟁 보상을 할 수 없다는 배짱이었다.

미국과 동독의 수교를 가장 주의 깊게 주시하고 있었던 나라가 이스라엘이었다. 서독은 유대인 단체를 상대로 협상을 벌인 결과 이스라엘에 8억 2천만 달러의 전쟁 피해 보상비를 지불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서독은 전쟁 피해 보상비로 총 50억 달라를 책정하고 아직도 국가나 단체 또는 개인에게 보상했거나 하고 있다.

서독이 이스라엘에 8억 달라가 넘는 전쟁 피해 보상을 하고 있을 때 동독이 보상해야 할 금액은 4억 달러였고 그 외에 다른 나라 전쟁 피해 보상비로 40억 달러로 책정해 놓고 있었다.

두 나라간의 수교는 비록 서로 다른 경제적 상황과 정치적 환경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하더라도 관계정상화를 위한 희망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1961년 8월 13일부터 새워진 베를린 장벽은 1989년 11월 9일에 무너지면서 분단된 지 28년 만에 통일을 이루었다.

사진: 1972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와 빌리 슈토프 동독 수상이 기본조약을 체결하고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모습

1431호 22면, 2025년 10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