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교의 귀띔, 천 년을 가라 한들 멀다 했으랴
1821년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이후 멕시코는 정치와 사회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보수파와 자유주의 혁명세력이 서로 권력투쟁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멕시코는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내전(1858-1861)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고 자유주의 세력이 승리를 거두면서 베니토 후아레스 (Benito Juarez) 가 대통령으로 당선 되었다. 그러나 국가는 경제적으로 더 이상 구제할 수 없을 정도로 막다른 골목에 처하게 되었다.
후아레스는 유럽열강에 대한 대외채무 상환을 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면서 열강들이 정치에 개입하는 구실을 주고 말았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때 불란서의 나폴레옹 3세는 영국과 스페인과 함께 1861년 베라크루스Veracruz) 항을 봉쇄하고 채무상환에 관한 협상을 강요했다. 영국과 스페인은 멕시코와 채무지불에 관한 협상을 마친 후 바로 고국으로 철수했지만 나폴레옹 3세는 남아서 멕시코를 프랑스의 식민지로 만들기로 하고 유럽 왕가의 귀족 중에서 왕이 될 만한 인물을 찾고 있었다.
이때 합스부르크 (Habsburg) 황제 프란츠 요셉 (Franz Joseph)의 동생인 페르디난드 막시밀리안 요셉 마리아 (Ferdinand Maximilian Joseph Maria)가 눈에 띄었다.
나폴레옹 3세는 막시밀리안을 멕시코의 왕위에 앉히는 조건으로 멕시코로 초청했다.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이 마음속으로 정치적인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차남이었기 때문에 자기에게도 왕위에 앉을 기회가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는 가능성이 없는 허망한 일이었다.
그러던 막시밀리안에게 멕시코의 왕이 될 절호의 기회가 왔음에도 그는 나폴레옹 3세가 멕시코의 군주로 지명했을 때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막시밀리안은 나폴레옹 3세의 지명으로 왕위에 오르기보다는 멕시코 국민투표로 왕위에 오르기를 더 바랬다.
멕시코 국민들의 전폭적인 기대와 환영 속에서 왕이 된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고 그래야만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어려운 사회에서 국민들과 가까워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1864년 막시밀리안은 트리에스테 (Trieste) 인근에 있는 미라마레 (Miramare)성에서 멕시코 황제 즉위를 수락했다. 하지만 그의 그런 기대와는 달리 첫 시작부터 어긋났다.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로 멕시코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했을 뿐더러 멕시코에는 이미 베니토 후아레스(Venito Fuares) 라는 국민이 선출한 대통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정치적으로 불안한 상태에서 막시밀리안을 왕으로 앉히다 보니 왕과 대통령 두 명이 한 나라를 다스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나폴레옹 3세는 막시밀리안이 정치적인 안정 속에서 멕시코를 다스릴 수 있도록 뒤를 밀어 주고 싶었지만 군부를 장악하고 있는 후아레스 지지 세력을 무시하기에는 위험부담이 크다는 것을 알고 그를 왕위에 앉혀 놓기만 하고 서둘러서 불란서로 돌아가 버렸다.
멕시코의 정치, 문화, 사회에 문외한이었던 막시밀리안 왕은 농민의 편임을 강조하고 온정을 베풀면서 국민들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해 갔다.
당시 미국의 지원을 받기 시작한 멕시코 군대의 저항은 나날이 심해지기만 했고 1866년 오스트리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독일 프로이센의 압박마저 가해지자 불란서는 멕시코에서 완전히 철수해 버렸다.
멕시코를 점령하고 있던 나폴레옹 군사들이 고국으로 완전히 철수하자 막시밀리안은 멕시코에 혼자 남는 외톨이가 되었다. 혼자가 된 막시밀리안 왕은 후아레스 대통령의 정책을 따라 갈 수밖에 없었고 국내 경제를 일으키기 위한 후아레스의 개혁정책을 지지하고 나서자 대지주들의 저항을 받게 되었다.
개혁정책이 실시될 경우 대지주들에게 쏟아질 세금을 좋아할 리가 없기 때문이며 막시밀리안 왕 혼자서 멕시코 경제를 부흥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막시밀리안의 샬로테(Chalote) 왕비는 막시밀리안 왕이 안고 있는 어려움을 호소하기 위해 불란서까지 가서 나폴레옹 3세를 만나 남편에 대한 군사적이고 경제적인 지원을 요청해 보았지만 거절당하고 말았다.
멕시코 군부는 보호세력이 없어진 막시밀리안에게 왕의 자리에서 물러날 것을 종용했지만 이를 거부하자 군부는 그가 머무르는 성을 포위했고 결국 1867년 5월 15일에 막시밀리안 왕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친형인 프란츠 요셉 1세와 빅토르 위고 등 많은 저명 인사들이 베니토 후아레스 대통령에게 막시밀리안 왕을 살려 줄 것을 요청했으나 이듬해인 1867년에 멕시코 군사에게 체포되었다.
그 후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 받고 즉결 총살형 (1832-1867)을 받았을 때가 35세라는 젊은 나이였고 1864년부터 1867년까지 3년 동안 멕시코의 왕으로 있었다.
나폴레옹 3세가 채무상환 협상 때 보여준 군사적 위협으로 불란서가 막시밀리안 왕을 살려내려고 했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불란서에서 범선을 타고 멕시코를 가고 오는 거리가 너무 멀었기에 나폴레옹 3세도 예측할 수 없는 바다의 위험을 무릅쓰고 이웃집 다녀오듯이 할 수는 없는데다가 불란서 사람도 아니어서 구출을 포기했다.
이 일로 인해 불란서 정부의 부당한 태도를 비꼬는 그림들이 나타나는데 특히나 에두아르 마네(Eduare Mane)가 그린 “막시밀리안 1세의 최후”라는 그림에서는 막시밀리안을 총살하는 군인들을 불란서 군복과 비슷하게 그렸고 뒷줄에서 총알을 장전하는 군인의 얼굴은 나폴레옹 3세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
그의 시신은 비엔나로 옮겨져 사형 집행 7개월 후에 카푸치너 수도원 (Kapuziner Kloster) 지하 무덤에 안장되었다.
1438호 22면, 2025년 12월 1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