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의 도시 풍경 속에서 한국어를 읽다

― K-LL NRW 언어경관 프로젝트, 올봄 현장 연구 본격화

뒤셀도르프의 번화가, 쾰른의 골목 상권, 에센 지하도의 상점들. 그 유리창과 외벽에 붙은 한글 간판들은 언제부터 독일 도시의 일상 풍경이 되었을까. 그 물음에 학문적으로 답하려는 연구가 올봄 시작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Academy of Korean Studies)의 지원을 받아 진행되는 ‘독일 NRW지역 한국어 언어경관 조사와 연구기반 한국어 교육모델 개발 (Korean Linguistic Landscape Research in NRW Germany and Development of Research-Based Korean Language Education Model)’ 프로젝트가 4월부터 본격적인 현장 조사에 들어간다. 루르 보훔 대학교 윤재원 박사가 이끄는 연구팀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NRW) 지역 8개 도시 — 뒤셀도르프, 쾰른, 에센, 뒤스부르크, 도르트문트, 보훔, 본, 아헨 — 의 도시 공간 속에 나타나는 한국어 표지와 간판을 체계적으로 기록하고 분석한다.

언어는 단순한 소통의 도구가 아니다

간판 하나, 포스터 한 장. 우리는 흔히 이것들을 상업적 필요의 산물로 여긴다. 그러나 언어학에서는 이를 다르게 읽는다. ‘언어경관(Linguistic Landscape)’이란 거리와 건물, 공공기관에 등장하는 모든 시각적 언어 표현 — 간판, 표지판, 광고문, 포스터 등 — 을 연구하는 분야다. 어떤 언어가 선택되는지, 두 언어가 나란히 병기될 때 어느 쪽이 더 크게 인쇄되는지, 글자의 배치가 어떤 위계를 만들어내는지. 이 모든 것이 단순한 디자인 결정이 아니라 사회적•문화적 의미를 담은 선택이라는 것이다.

그 시각으로 NRW의 도시들을 들여다보면, 한국어의 존재는 새로운 의미를 획득한다. 한식당의 메뉴판, 한인 마트의 가격표, K-뷰티 숍의 쇼윈도에 새겨진 한글은 단순히 한국 손님을 겨냥한 상업적 문구가 아니다. 그것은 독일 사회 안에서 한국 커뮤니티가 어떻게 자리를 잡고,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존재를 가시화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기록이다.

ChatGPT로 제작된 가상의 거리

기록하되 평가하지 않는다

연구팀은 이 점을 특히 강조한다. 이 프로젝트는 특정 업소나 기관을 심사하거나 비교하는 작업이 아니다. 조사 대상이 될 레스토랑, 카페, 상점, 약국, 문화기관의 위생 상태도, 가격도, 서비스 수준도 연구의 관심 밖이다.

4월부터 6월 사이, 연구팀은 NRW 전역의 한국어 관련 공간들을 직접 방문해 외부 (혹은 내부) 간판과 표지의 사진을 촬영하고, 다언어 사용 방식을 기록하며, 짧은 인터뷰를 진행한다. 촬영과 인터뷰는 모두 당사자의 자발적 동의를 전제로 하며, 민감한 정보는 공개되지 않는다. 업주나 기관 관계자 역시 원할 경우 인터뷰에 참여할 수 있다.

인터뷰의 핵심 대상은 그 공간을 스쳐 지나는 일반 행인들이다. 연구팀이 던지는 질문들은 단순하지만, 그 답은 결코 단순하지 않을 수 있다. 저 간판에 쓰인 글자가 어느 나라 언어인지 아십니까? 읽을 수 없어도, 저 글자에서 무언가 느껴지는 것이 있나요? 어떤 인상을 받으셨나요?

이 질문들은 언어 능력을 테스트하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 언어가 만들어내는 ‘분위기’와 ‘느낌’을 포착하려는 시도다. 한글을 전혀 모르는 독일인이나 외국인 행인도 그 글자의 곡선과 획에서 ‘아시아적인 무언가’를 감지할 수 있다. 혹은 K-팝과 K-드라마를 통해 한글에 이미 노출된 젊은 세대라면 한국어임을 정확히 알아보기도 한다. 반면 오랫동안 이 거리를 걸어온 이웃 주민은 그 간판이 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조차 인식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연구팀은 바로 이 인식의 스펙트럼 — 무관심에서 친숙함까지, 이국적 낯섦에서 일상적 풍경까지를 기록하고자 한다. 한국어 간판이 독일 도시 주민들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그것이 어떤 연상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는 언어경관 연구의 핵심 질문 중 하나다. 더불어 그 공간을 이용하는 한인 커뮤니티 구성원들에게는 또 다른 질문이 주어진다. 모국어로 쓰인 간판 앞에 섰을 때, 이 도시 안에서 자신이 ‘보인다’는 느낌을 받는가. 그 한 줄의 한글이 낯선 도시에서 어떤 심리적 안도감이나 정체성의 닻으로 기능하는가.

도시의 언어를 디지털 지도에 새기다

수집된 자료는 ArcGIS 기반의 디지털 지도와 데이터베이스로 구축된다. NRW 지역 한국어 경관을 종합적으로 담아내는 최초의 기록이 될 이 아카이브는, 향후 이 분야 연구를 위한 토대가 된다.

연구 결과는 대학 내 학술 발표와 지역 커뮤니티를 대상으로 한 공개 강연, 그리고 사진과 분석을 담은 책자 발간의 형태로 공유될 예정이다. 이 책자는 독일 내 한인 커뮤니티는 물론 한국과 유럽의 관련 기관에도 배포될 가능성이 있어, 조사에 참여하는 업소와 기관에 자연스러운 간접 홍보 효과를 가져다줄 수도 있다.

NRW에서 시작해 유럽으로

연구팀은 이번 NRW 조사를 출발점으로, 향후 독일 전역과 유럽 주요 도시로 연구 범위를 확장할 계획이다. 유럽이라는 공간 안에서 한국어가 어떻게 존재하고,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지를 장기적으로 조명하려는 시도다.

올봄, 연구팀은 여러분의 공간을 찾아올 것이다. 그들이 기록하려는 것은 간판의 글씨이지만, 그 너머에는 이 도시를 함께 만들어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있다.

기사제공: 윤재원박사

1450호 17면, 2026년 3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