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 ‘잊혀질 권리’와 기억의 경제학

인터넷은 결코 잊지 않는다. 과거에 무심코 남긴 흔적, 한때의 경제적 어려움, 혹은 철없던 시절의 실수까지도 디지털 세상은 0과 1의 조합으로 영구히 박제해 버린다. 중세 시대 죄인을 광장에 묶어두고 온 마을 사람들이 모욕하게 했던 공개 처형대가 21세기 광통신망 위에서 ‘디지털 주홍글씨’라는 이름으로 부활한 셈이다.

유럽은 이 지점에서 GDPR을 통해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수준의 개인정보 보호 체계를 제공한다. 특히 최근 독일과 유럽사법재판소에서 잇따라 나온 판결들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사회적 신뢰를 위한 데이터 공유는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가. 그리고 인간은 과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권리가 있는가. 이 글에서는 최근 독일 통신사 데이터 공유 판결과 ‘잊혀질 권리’를 둘러싼 법적 쟁점을 통해 디지털 시대의 공익과 사생활 사이의 균형점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긍정 데이터(Positivdaten) 공유 논란: 신용 사회와 프라이버시의 충돌

최근 독일 법조계와 통신업계의 뜨거운 감자는 이른바 긍정 데이터(Positivdaten) 공유 문제였다. 일반적으로 신용평가기관인 SCHUFA에 전달되는 정보는 채무 불이행이나 연체 같은 부정적 정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독일의 통신사들은 고객이 연체 없이 요금을 성실하게 납부하고 있다는 사실, 즉 계약 체결 및 유지 정보 자체를 SCHUFA와 공유해 왔다.

이를 두고 개인정보 보호 전문가들은 오랫동안 강하게 비판해 왔다. 고객의 명시적인 동의 없이 대량의 계약 정보가 제3자에게 넘어가는 것은 과도한 데이터 처리라는 이유에서다.

반면 기업들은 GDPR 제6조 제1항 (f)항에서 규정하는 정당한 이익(berechtigtes Interesse)을 전면에 내세웠다. 사기를 예방하고 거래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신용도가 양호한 사람들의 데이터도 시스템 안에 존재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사회 전체의 금융 안전망 사이에서 어느 쪽에 더 무게를 실어야 하는지를 놓고 하급심 판결이 엇갈리며 오랫동안 혼란이 이어졌다.

오랜 논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2025년 독일 연방대법원(BGH)의 판결이었다. 연방대법원은 통신사가 일정한 조건 아래 긍정 데이터를 SCHUFA에 제공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고 판시했다. 개별적인 동의가 없더라도 경제 시스템 전체의 건전성을 유지하기 위한 정당한 이익이 개인의 프라이버시보다 우선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다만 법원은 이와 동시에 데이터 최소화 원칙을 강조하며, 필요 이상의 정보를 무분별하게 수집하는 행위에는 분명한 경계선을 그었다. 공익을 위한 데이터 공유는 허용하되, 그 범위는 최소한으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메시지였다.

잊혀질 권리의 태동과 구글 스페인 판결

긍정 데이터 공유가 현재의 신용 정보에 관한 문제라면, ‘잊혀질 권리’는 과거의 기록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관한 문제다. 이 논의의 출발점은 2014년 유럽사법재판소의 이른바 ‘구글 스페인’ 판결로 거슬러 올라간다.

스페인의 한 남성은 구글 검색창에 자신의 이름을 입력하면 15년 전의 집 경매 공고 기사가 그대로 노출된다는 사실에 오랫동안 고통 받아왔다. 이미 해당 빚을 모두 갚았음에도 불구하고 오래된 검색 결과가 자신의 현재 신용 상태를 왜곡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유럽사법재판소는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정보가 비록 사실에 기반을 둔다고 하더라도, 시간이 흘러 당초 수집 목적에 더 이상 부합하지 않거나 과도하게 느껴진다면 일정한 조건 아래 검색엔진이 개인 이름과 연결된 검색결과 링크를 비노출 처리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판결은 단순한 개인 승소 사례를 넘어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기본권을 세상에 공인한 사건이었다. 사실의 기록이 영구히 검색되고 유통될 수 있는 인터넷 환경에서, 개인이 과거로부터 벗어나 현재의 삶을 살아갈 권리, 즉 잊혀질 권리(Right to be Forgotten)가 공식적인 법적 권리로 자리 잡는 순간이었다.

공익이라는 이름의 방어선: 만니(Manni) 사건

그러나 ‘잊혀질 권리’가 모든 과거 기록을 지울 수 있는 마법의 지우개는 아니다. 2017년 이탈리아 사업가 살바토레 만니의 사례는 그 한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만니는 자신이 관여한 회사의 파산 기록이 공적 장부인 상업 등기소에 계속 남아 있다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했다. 이미 오래전에 정리된 사안인 만큼 삭제되어야 마땅하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유럽사법재판소의 판단은 구글 스페인 사건과는 정반대였다. 유럽사법재판소는 상업등기와 같은 공적 기록이 거래 안전과 법적 확실성을 위해 계속 공개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이 사건은 ‘잊혀질 권리’보다 공적 등록의 투명성과 제3자의 보호가 우선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두 판결을 나란히 놓고 보면 잊혀질 권리의 본질이 더 분명해진다. 과거의 기록이 현재의 삶에 불필요한 낙인을 찍을 때는 삭제가 허용되지만, 그 기록이 다른 사람들의 안전한 거래와 사회적 신뢰를 지키는 데 필요할 때는 보존이 우선한다는 것이다. 결국 ‘잊혀질 권리’는 절대적 권리가 아니라, 공익과의 끊임없는 균형 속에서 작동하는 권리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의 철학: ‘잊혀질 권리 I & II’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2019년 두 결정에서 디지털 시대의 기본권 충돌을 보다 정교하게 조정하는 기준을 제시했다. 이 판결들은 시간이 지나며 표현의 자유와 인격권의 비중이 달라질 수 있음을 확인했다.

‘잊혀질 권리’ I 사건은 살인 사건으로 복역한 뒤 사회로 돌아온 한 남성의 이야기다.

그는 자신의 과거 범죄 기사가 구글 검색 상단에 계속 노출되는 것을 막아달라고 요청했다. 헌법재판소는 그의 손을 들어주었다. 법원의 논리는 명확했다. 인간에게는 과거의 과오로부터 자유로워져 다시 사회의 일원으로 통합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언론 보도의 자유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정당성이 약해지고, 개인의 인격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두텁게 보호받아야 한다는 이른바 ‘시간의 경제학’을 헌법적 차원에서 인정한 판결이었다. 범죄자도 언젠가는 용서받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재통합의 가치를 법원이 정면으로 인정한 것이다.

반면 ‘잊혀질 권리 II’ 사건은 다른 결론으로 이어졌다.

한 기업인이 자신을 비판적으로 다룬 TV 인터뷰 영상이 검색 결과에 노출되는 것을 막아달라고 요청했으나, 헌법재판소는 이를 기각했다. 검색 엔진은 원정보를 생산하지는 않지만, 정보 접근을 매개하는 강한 영향력을 가지므로 삭제 요청을 기계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이 판결은 ‘잊혀질 권리’가 단순히 불편하거나 불리한 진실을 감추는 도구로 악용되는 것을 경계한 결정이기도 했다.

두 판결을 통해 독일 헌법재판소가 전하는 메시지는 일관된다. ‘잊혀질 권리’는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 인간의 존엄성을 회복하기 위한 권리이지, 공적 책임에서 도망치기 위한 방패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디지털 미래를 설계할 것인가

유럽과 독일의 일련의 사례를 관통하는 핵심 원칙은 결국 균형이다. 데이터는 현대 경제의 원동력이자 사회적 신뢰의 척도다. 긍정 데이터 공유가 일정 범위에서 허용되는 이유도, 파산 기록이 공적 장부에 보존되는 이유도, 결국 우리가 서로를 믿고 안심하며 거래할 수 있는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 시스템이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단 한 번의 실수로 개인을 영원히 낙인찍는 도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독일 헌법재판소가 거듭 강조한 사회적 재통합의 가치는 디지털 문명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시사 하는 바가 크다.

기록은 보존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인간에게는 잊혀질 자유와 용서받을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단순히 정보를 삭제하느냐 마느냐의 차원을 넘어, 디지털 낙인이 지배하는 사회를 방치할 것인지, 아니면 적절한 망각을 통해 인간의 회복 탄력성을 지원하는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인지를 결정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기술은 기억하게 하지만, 법과 윤리는 망각의 미덕을 가르쳐 준다. 그 균형위에 디지털 사회가 서 있다.

1453호 16면, 2026년 4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