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케네디와 닉슨의 TV 대결

Dipl.-Ing. WONKYO INSTITUTE

1960년 9월 26일은 새로운 미국 역사가 추가된 날이다.

대통령에 출마한 민주당의 존 F.케네디와 공화당의 리차드 닉슨 후보간의 한치도 물러설 수 없는 텔레비젼 토론이 벌어지는 날이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전체 인구의 1/3 에 해당하는 7천만 명이 시청할 정도로 관심을 모은 대통령 후보들의 정책 발표였고 미국 사상 처음이라는 것에 더 큰 관심을 모으고 있었다. TV 대결이 있기 전의 여론조사에서는 두 후보가 박빙의 승부를 펼칠 것으로 전망했었다.

1960년 9월 26일. 세계 역사상 최초로 미국 대통령 후보간의 TV 토론이 벌어졌다. 두 대통령 후보들이 TV 스튜디오에 나와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11월 선거 전까지 세 차례 더 있을 예정이었다. 각 후보에게는 먼저 8분 동안 자신과 자신의 공약을 소개할 시간이 주어졌다. 그 이후부터는 기자들의 질문이 이어졌고 후보들은 답변을 해야 했다.

닉슨과 케네디는 각각 3분 동안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다. 주최측은 이러한 엄격한 규칙을 통해 토론이 공정하게 진행되도록 노력했다. 양측은 내용상으로는 치열했지만 어조는 온건한 논쟁을 벌였다.

닉슨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행정부를 칭찬하며 그 노선을 따라 갈 것을 약속했다. 그는 부통령으로서의 높은 인지도와 노련함을 앞세웠다. 반면에 케네디는 미국이 다시 세계에서 더 강력한 리더십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역설했지만 일반적으로 닉슨의 정치적인 노련함이 앞서 보였다.

매사추세츠주의 상원의원이었던 케네디는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다. 닉슨은 드와이트 D.아이젠하워 대통령 정부에서 부통령으로 재직하며 정치적 입지를 굳혀왔고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케네디는 미국 상류층을 대표하는 케네디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서 아버지의 인맥으로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다. 소위 아빠찬스였던 것이다. 반면에 닉슨은 평범한 가정에서 자라 스스로의 실력으로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지만 가정 형편으로 졸업을 하지 못했다.

리차드 닉슨은 1913년 생으로 1917년 생인 존 F. 케네디보다 4살이 연상이었고 당파도 서로 달랐지만 대통령 후보로 나서기 전까지는 친구처럼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닉슨은 1953년 케네디가 재클린과 결혼할 때도 하객으로 참석했었고 때때로 서로 만나 점심을 나눌 정도로 가까운 선후배 사이였다. 심지어 케네디는 “내가 대통령 후보로 나서지 않았더라면 닉슨에게 투표했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가깝게 지냈다.

케네디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해군에서의 활약상으로 태평양 전쟁의 영웅으로 이름을 올리는데에 성공했다. 닉슨은 비전투 병력으로 “나도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던 사람”이라고 밝혔지만 케네디가 가지고 있는 인기를 넘지는 못했다.

케네디의 건강하고 유창한 언변과 자신감 있는 표현을 하고 있는 반면에 닉슨은 토론 중에 땀을 흘리고 유창하게 발언조차 하지 못하는 연약함을 보여 주기도 했지만, 부통령으로서의 정치적인 관록이 장점으로 부각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케네디는 텔레비전 화면에서 닉슨보다 더 강력하고 설득력 있게 작용했다. 토론 후 케네디 후보는 여론 조사에서 닉슨을 크게 앞섰다. TV 토론은 라디오로도 중계되었는데 토론 후 여론조사를 한 결과 젊음과 자신감을 보인 케네디가 TV 시청자들에게서 앞섰지만 라디오 청취자 조사에서는 닉슨이 앞섰다. TV 중계가 아니고 라디오를 통한 대결이었더라면 순위가 뒤바뀌었을 것이다.

그러나 케네디는 초조함을 보이지 않았다. 많은 시청자들이 닉슨의 정치적인 관록에 케네디가 긴장했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TV 대결 한 시간 전까지 참모들이 써준 예상 질문과 답변이 적힌 메모지를 얼굴에 덮은 채 잠을 자고 있을 정도로 여유를 보였다고 한다.

6주 후 케네디는 선거에서 닉슨 후보를 간발의 차이로 제치고 승리하여 43세라는 젊은 나이로 미국 제35대 대통령으로 선출될 수 있었다. 민주당 케네디 후보가 49,72 퍼센트를 얻었고 공화당의 닉슨 후보가 49,55 퍼센트를 얻어 0,17 퍼센트 차이로 케네디 대통령이 당선되었으니 실로 간발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당선된 케네디 대통령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민주당 대통령으로 암살된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대표적인 치적으로 제3차 세계 대전이 될뻔 했던 쿠바의 위기를 해결했으며 소련에 한 발 뒤져있던 우주 경쟁에서 아폴로 계획을 출발시켜 미국이 절대 우위를 갖게 한 것이다.

쿠바 위기는 1962년 10월 14일 첩보기 U-2 가 쿠바에 건설 중인 소련의 SS-4 탄도미사일 기지 건설현장으로 부품을 운반하던 배를 발견하면서 시작된 미국과 소련의 극한 대립을 말한다.

군사적 위기를 느낀 케네디 대통령은 “소련이 미국의 코앞에 있는 쿠바에 미사일 기지 건설을 계속 지원할 경우에는 이를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로 받아 들이고 제3차 세계 대전도 불사하겠다” 고 발표했다.

미사일 장비를 실은 선박은 계속해서 쿠바를 향해 운항하고 있을 때였다.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후루치쇼프는 미사일 설비를 싣고 쿠바로 향하던 배의 선미를 돌리게 할 수밖에 없었다.

케네디는 뉴 프론티어 정신을 주장하면서 “국가가 당신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지를 묻지 말고, 여러분이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를 물으라”고 한 연설로서 미국 국민들에게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고취시키듯 했다.

1963년 11월 22일 12시 30분경(현지 시간). 케네디는 유세지인 택사스주 달라스 시내에서 무개 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벌이다가 24세의 저격수 리 하비 오스월드 (Lee Harvey Oswald) 가 쏜 총탄을 목과 머리에 맞고 사망했다.

오스월드는 어려서부터 공산주의 신봉자였고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소련으로 건너가 민스크 (Minsk)에서 2년 반 정도 살 정도로 공산주의 신봉자였다. 오스월드가 체포된 이틀 후 재판정으로 가던 중 술집 주인인 잭 루비(Jack Ruby)가 쏜 총에 복부관통상을 입고 사망했다.

이 때문에 케네디 대통령을 살해한 정확한 범인을 밝혀 내지 못한 채 영원한 미궁으로 남게 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의 장례식은 11월 25일 워싱턴 국회 의사당에서 거행되었고 유해는 버지니아 주 알링턴 국립묘지(Arlington National Cemetery) 에 안장 되었다.

케네디 대통령과 닉슨 전 부통령은 출신 배경부터 정당-정치 성향-생활까지 정반대였던 두 사람이었지만 둘 다 서로 다른 정치적인 이유로 대통령 임기를 끝까지 마치지 못했다는 점은 미국 현대 정치사의 비극이라 할 수 있다.

1454호 22면, 2026년 4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