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이 남긴 한 획을 생각하며…

전성준

“ 이 분! 독일에서 유명한 분이야. 인터뷰 잘 해….”

2000년10월5일 세계일보 본사를 찾아 간 내 앞에서 편집실 문화부 기자를 향해 윤남수회장이 던진 일갈이었다.

제2회 재외동포문학상 소설부분 대상에 당선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나를 인터뷰하겠다는 세계일보 편집실 문화부 기자의 전화 연락을 받고 용산역 앞 부근 세계일보 본사 편집실을 찾아 간 자리에서 뜻밖에 윤남수회장을 만나게 되었다.

세계일보 구주 판 총괄사장인 윤남수회장이 주선한 자리인 줄도 모르고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있구나…> 우쭐하니 들뜬 마음으로 찾아 간 나를 무안케 했다.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해 하는 나를 윤남수회장은 미리 준비 해 온 듯 꽃다발까지 안겨 주며 내 손을 잡고 축하를 했다.

때마침 업무 차 잠시 귀국했던 길에 우연히 재외동포 문학상 수상자 명단에서 내 이름을 발견 수소문 끝에 내 연락처를 알아 내 인터뷰를 주선한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우쭐했던 자신이 쑥스럽고 부끄러워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들어 온 풍문 그대로 카리스마 넘치는 윤남수회장의 존재는 나를 다시 어리둥절하게 했다.

세계일보 편집실에서 윤남수회장의 파워는 보통이 아니었다. 외부 취재를 나갔다 돌아 온 기자들 이 한결 같이 윤남수회장 앞에 와서 깍듯이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 바람에 옆에 있던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편집 마감 시간이 가까워 온 탓인지 편집실 안은 연이어 들려 오는 요란한 전화 벨소리와 마감시간 전에 기사 작성을 끝내려는 기자들의 분주한 업무 활동에 편집실은 북새통을 이뤘다. 편집실을 벗어나 별실에서 사진도 찍고 인터뷰를 마쳤다. 나는 두둑하게 받은 상금도 있고 주머니 사정도 좋아 근처 유명 식당에서 취재 기자와 윤남수회장과 함께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말을 꺼냈으나 내 호의를 한사코 거절하며 그 돈으로 독일 가족들한테 줄 선물 살 때에 보태라고 했다.

오히려 우리를 초대했으니 자기가 식사를 대접하겠다고 세계일보 구내 식당으로 우리 일행을 안내 했다. 역시 구내식당에서도 윤남수회장의 파워는 보통이 아니었다. 심지어 청소부 아주머니까지도 윤남수회장 앞에 와서 “사장님 언제 독일에서 오셨는지요?”하고 인사를 극진히 했다.

아무튼 그 당시 나는 자전적 단편 소설 한편으로 졸지에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이러한 사연 뒤에는 윤남수회장과 얼킨 사연을 말하지 않을 수 없어 사족을 붙인다.

82년 뒤셀도르프 한국식당 한국관(대표 김정구)에 한식 요리사로 취업 평소에 동경 했던 독일 땅을 밟고 2년 동안 요리사로 경험을 얻은 나는 김정구사장의 배려로 로렐라이에 한국식당을 동생과 함께 운영하게 되었다. 행복하게 잘 살고 있던 동생을 끌어 다 로렐라이에 식당을 개업 했으나 첫번째 단추를 잘못 끼운 탓에 집주인 K씨와 송사가 벌어졌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고민에 쌓여 있던 동생이 교통 사고를 당해 운명을 달리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언제나 죄의식에서 벗어 나지 못하고 살아 오던 요리사 형은 틈틈이 자전적 소설을 써 왔다.

이 글이 재외동포문학상 소설부분에 명예의 대상을 받게 되자 구주 판 세계일보에 대서 특필. 졸지에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무명의 요리사 출신 재독 작가라고 나를 띄워준 분이 바로 윤남수 회장이었다. 윤남수회장은 내 지난 암울했던 독일 생활. 내 깊은 사정을 잘 알고 있기에 더욱 관심을 가지고 나를 동포사회에 부각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윤남수회장과 첫 상면은 1987년 봄 동생을 저 세상으로 보내고 로렐라이에서 동생 유족과 어렵게식당을 운영하고 있을 때 였다.

마침 건물 주인 K씨가 혼자 찾아 오기가 거북스럽고 혹여 당할지 모르는 봉변이 두려워서인지 윤남수회장을 대동하고 로렐라이 식당을 찾아 온 것이다.

아직 슬픔이 가시지 않은 때에 사기계약 건으로 소송이 진행 중인 문제를 해결하자고 찾아 온 집주인 K씨와 동행한 자를 내가 곱게 대 할리 만무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 오는 집 주인 K씨와 험상궂게 얼굴을 찌푸려 가며 언쟁을 하고 있을 때 같이 온 일행 중 양 어깨에 힘이 들어 간 조직 오야봉 인상을 주는 한사람이 대뜸,

“이 친구 보자 보자하니 막무가네군.. 다짜 고짜 큰 소리만 칠게 아니라 옳고 틀린 것을 순리적으로 대화를 통해 풀어 가야 하지 않아… 화만 내고 악을 쓴다고 해결 될 일이 아니지 않아..….” 하며 불쑥 집 주인 K씨를 두둔하는 말에 나는 말하는 그를 향해 발끈 화를 내며, ” 내용도 모르는 제3자인 당신이 참견 할 일이 아냐… 내용을 모르면 잠자코 아무 말고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상책이야.” 라고 무안을 주었다. 내 말에 발끈 했던 그 사람이 바로 윤남수회장이었고 뒤 늦게 사태를 짐작했는지 더 이상 언쟁에 끼어 들지 않고 집주인 K씨와 자리를 떴다.

그 후 몇 년 후에 프랑크푸르트에서 다시 그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동포사회에 무뢰한이었던 나는 윤남수회장의 명성을 프랑크푸르트로 자리를 옮긴 후 우연히 알게 되었고 몇 년전 로렐라이 식당에서 있었던 일을 사과하는 마음으로 세계일보를 꾸준히 구독하게 되었다.

이런 인연이 있었던 내가 뜻밖에 재외동포 문학상 소설부분 대상을 받고 작품 내용이 로렐라이 외진 곳에서 한국식당을 운영하며서 같은 동족한테 받은 설움과 모욕을 투견으로 해소시켜 가는 내 마음을 누구 보담 깊이 이해 했던 윤남수회장은 재독 동포사회에 나를 알리기 위해 인터뷰를 주선 했던 것이다. 그후 가끔 모임에서 만날 때 마다 “우리 술 한잔 같이 합시다.”하며 늘 즐겨 마시는 돈까트와 하덴베어그 술잔을 권했으나 술을 못 마시는 나는 한차례도 윤남수회장과 같이 술자리에 합석을 못했다.

부음을 전해 듣고 이글을 쓰면서 못 마시는 술이라도 사양 않고 흔쾌히 술 잔을 받아 들고 그와 같이 자리를 못했던 것이 가슴 아프게 후회스럽고 아쉬웠다.

언제나 넉넉하니 여유가 넘치는 듯 푸짐한 그의 주변에는 많은 후배와 친구가 떠날 사이 없이 진을 치고 있었다.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못해도 주눅 들지 않고 큰 소릴 치는 그의 보스 기질은 가진 자들 한테는 욕을 먹어 가면서 어렵고 힘든 자를 돕고 그들 앞에 방패막이 되어 주고 어느 때는 총대를 메는 해결사로 또 어느 때는 호통을 쳐 상대방의 기를 꺾는 호연지기는 동포 사회에 전설적인 화제의 인물로 영원히 화두에 오르내릴 것이다. 갑작스런 그의 영면은 정말 슬픔을 통감하게 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1224호 17면, 2021년 6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