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교의 귀띔: 천 년을 가라 한들 멀다 했으랴 (36)

Dipl.-Ing. WONKYO INSTITUTE

토마스 만은 독일을 명예롭게 한 노벨 문학상 (1929년) 수상 작가이였지만 1938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망명생활로 지내다가 1944년 귀화했기 때문에 미국 사람이다. 그는 나치정권에 반대하여 독일을 떠날 수밖에 없었지만 미국에 망명하면서도 독일을 걱정하고 독일 정신을 일깨우는 글을 쓰는 데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열일 곱 살 때 독일 최초의 학교 신문으로 기록되는 “봄날의 폭풍 (Der Frühlingssturm)”을 창간했고 이 신문은 1893년 뤼베크(Lübeck)의 카타리네움 (Katharineum)에서 발행되었다.

카타리움은 오늘날의 김나지움(Gymnasium)과 같은 말이다.

그 정도의 실력이라면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내는 모범생이었을 것도 같은데 모국어인 독일어(국어) 시험에서도 낙제 점수를 받아 올 정도였다면 공부를 썩 잘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동정 점수로도 얻을 수 있는 체육에서도 낙제했고 국어는 전치사를 동반한 격변화의 문장구성에서 어려움이 많아서 학교 신문에 에세이를 쓸 때는 애를 먹었다고 한다.

그의 독일어 (국어) 졸업점수는 베프리디겐트(Befriedigend, 우리 나라의 미)였다. 토마스 만이 이러한 국어 실력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었다면 맞춤법을 잘 아는 비서의 도움을 받았던지 아니면 출판사의 교정국에서 띄어쓰기나 전치사에 따른 변화 등의 교정의 도움이 있지 않았는가 싶다.

토마스 만의 학교생활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수능시험에서 만점을 받은 학생들의 이구동성이 “공부가 가장 쉬웠다” 또는 “과외는 한 번도 받아 본적이 없다” 학교생활이 재미있었음을 이야기 하지만 낙제 점수만 받는 학생으로 학교생활이 지루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남들은 6년만에 졸업하는 고등학교를 9년만에 졸업한 그는 뮌헨의 화재보험회사에서 인턴으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 인턴생활도 그에게는 고루하기만 느껴져서 군대에 지원했다.

토마스 만이 심한 평발을 가졌음에도 1900년 군입대 당시의 신체검사에서 적발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심한 평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훗날 소설 “친구 펠릭스 크룰의 고백, Bekenntnisse des Hochstaplers Felix Krull” 이라는 책에서 밝혔다. 토마스 만은 왕립 바이에른주 보병연대에 배치되었다.

그의 친구인 앙드레 포르트 르 루아 (Andre Port Le Roi) 는 “토마스 만은 대부분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냈고 군입대 당시 신체검사에서 문제가 없었던 평발로 인해 복무 부적격 판정을 받아 의병 제대했다” 라며 놀렸다. 학교생활이 지루해서 이에서 탈피하고자 군대에 지원 입대하고 불과 3개월 만에 쫏겨나게 되었으니 평발이 원수 같을 것이다.

그의 아버지 토마스 요한 하인릭히 만(Thomas Johan Heinrich Mann, 1840-1891)은 토마스만이 학교에서 공부를 못하거나 신문에 글을 잘 쓴다거나 하는 일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농산물 판매업으로 성공했고 뤼베크시의 상원 의원이기도 했던 그는 가문의 상속자가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했다.

그의 유언장에 따르면 “내가 죽으면 나의 곡물상 회사를 해산한다”고 명시해 두었는데 아들이 둘이나 있으면서도 그들이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면 우리들이 모르는 사연이 따로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식들이 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사업을 이어받아 경제적인 부를 누리면서 대를 이어 주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 마음일 것 같건만.

문학적 야망을 품은 그의 형 하인리히 만(Heinrich Mann)은 동생 토마스 만을 “어린 사랑의 영혼이 낳은 감정적 창작물에 매달리는 사람”이라며 놀렸다. “어린 사랑의 영혼이 낳은 감정적 창작물에 매달리는 사람” 이라는 시적이고 어려운 표현을 할 줄 아는 형 하인리히도 보통수준의 문학 실력을 갖춘 사람은 아니었나 보다.

토마스 만의 데뷔작인 중편소설 “만족 (Gefallen)” 이 대중에게서 호평을 받았으며 그는 이 작품을 ”떫은 맛 때문에 입을 오므리게 하는 작은 과일, Früchte , das einem den Mund zusammenzieht vor Unreife” 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필자가 80회 생일을 맞아 AIDA Cosma 쿠르즈 여행을 선택했던 뱃머리에는 여성의 커다란 파란 눈과 빨간 입술을 그려 넣은 18층 높이에 300m가 넘는 대형 유람선이었다. 매 식사 때마다 사용케 되는 흰 셀비엣(Selviett) 에는 “키스를 해주고 싶은 입술” 이라며 빨간 입술이 그려 있어서 아침-저녁 식사 때마다 그 입술에 뽀뽀를 해주고 나서 아침을 먹었다.

토마스만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머니는 아이들과 함께 뮌헨으로 이사를 했지만 토마스 만은 고등학교를 마저 마치기 위해 뤼베크시에 남았다. 어머니는 토마스와 하인릭히가 작가가 되려는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매달 학비로 180-200 마르크를 보내 주었다. 토마스 만이 소설을 쓰는 것에 열망을 갖게 된 것은 순전히 어머니의 응원 덕분이었다.

그는 22살 때 “꼬마 프리드만, Der kleine Friedmann” 을 출간했다. 1897년 토마스 만은 이탈리아에서 독일 곡물상인 집안을 바탕으로 한 첫번째 대하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평소 존경해왔던 테오도르 폰타네(Theodor Fontane)의 소설 “에피 부리스트, Effi Briest) 에 나오는 “부덴부룩스, Budenbrooks“ 라는 이름으로 제목을 정했다. 토마스 만은 1929년 부덴부룩스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 했으며 부제는 “어느 가족의 몰락” 이었다.

출판사 사무엘 피셔 (Samuel Fisher)는 토마스 만이 첫 번째 소설의 출판을 의뢰하고 싶다고 찾아오자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소설 내용을 절반정도 줄여야 한다며 그렇게 포괄적으로 난해한 작품은 현대사회에서 읽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토마스 만은 피셔를 설득시키고 1901년에 원본대로 출판할 수 있었다. 만일 출판사 피셔 사장의 말을 따랐더라면 노벨 문학상 수상은 날아갔을 것이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성인들은 상원의원의 아들에게 더러운 모욕을 당했다면서 뤼벡크시에 부끄러움을 준 소설이라며 흥분했지만, 소설속의 내용은 한자동맹의 부패된 내부를 잘 보여 주고 있었다. 뤼벡크시는 토마스 만이 죽기 직전인 1955년 5월 20일에 그를 명예시민으로 받아 들였다.

토마스 만은 나치 독일에 바대하고 망명 생활을 하면서 1933년에 먼저 체코 시민권을 얻은 후에 1944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1952년에는 독일 인접국가인 스위스에 시민권 신청을 했으나 허가가 나오기 전인 1955년 8월 12일 스위스 취리히에서 사망하고 말았으니 토마스 만은 독일이 낳은 미국인으로 남았다.

그는 독일과 가까운 스위스 시민권을 얻은 후에는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려고 했었을까 ?

1448호 22면 2026년 2월 2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