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정책의 계승
국가 수립 이후 고도성장을 구가하던 서독이 1973년의 1차 오일쇼크 등 세계경제 흐름의 변화로 경제불황과 저성장 기조의 정착, 실업의 급증 등 경제 문제에다 동독 슈타지의 간첩 귄터 기욤(Günter Guillaume) 사건으로 브란트 총리가 사임하였다.
이후 모스크바 조약을 비롯한 동방조약과 동서독 기본조약에 근거한, 소련을 포함한 동유럽 및 동독과의 관계는 1982년 사임 시까지 헬무트 슈미트(Helmut Schmidt) 총리가 이끄는 정부에 의해 그 궤도가 정착되었다.
슈미트는 브란트 총리의 사임 후 자유민주당과 연정, 74년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 위기에다 극좌 세력인 적군파(RAF)가 독일 사회를 테러 공포로 몰아넣은 격변기에 그는 격랑을 헤쳐가며 독일의 현대적 시스템을 정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외교적으론 미국과 협력을 유지하면서 동구권 국가들과 화해를 추구했다. 사회복지 재정 삭감 문제를 둘러싼 갈등으로 연정이 붕괴하면서 82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사민당에 이어 13년 만에 정권을 잡은 기민당의 헬무트 콜 총리는 1982년 취임연설에서 “지금까지 동독과 체결한 협정을 존중하고 진행 중인 협상도 계속 추진하겠다”며 동방정책 계승 의지를 드러냈고, 이를 현실에 맞게 발전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독일 정부는 대외적으로도 통일 독일이 세계 평화에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주변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에 끈질기게 설득했다.
1982년 당시 새로 출범한 콜 정부가 전 정부 즉 슈미트 총리의 사민당-자민당 정부의 독일정책 및 동방정책을 유지한 것은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동서독은 기본조약 체결과 함께 기본조약상 합의에 따라 모든 분야에서 교류를 뒷받침할 각종 협정을 체결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분단시대의 동서교역을 비롯한 각종 교류는 제도적 기초 위에서 대대적으로 확대되었다. 동서진영 간의 긴장과 이에 따른 동서독 간의 긴장에 따라 단속적으로 제한되던 동서독 간의 왕래 등 인적 교류는 일상화되었다.
1987년 9월 7일 동독의 호네커 서기장이 동독 국가 수립, 그리고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 이후 동독의 국가 최고지도자로서 처음으로 서독을 공식 방문하였다. 이 방문은 1981년 12월 11~12일 헬무트 슈미트 총리의 동독 방문에 대한 답방으로 당초 1984년에 계획되었던 것이었지만 당시 소련의 체르넨코 공산당 서기장의 반대로 취소되었다.
호네커 방문 시 동독은 국가수반 방문의 의전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하여 서독의 콜 총리 측은 실무방문이라는 이름 하에 국가수반에 준하는 의전을 제공하면서, 그 대가로 동독 지도부에 대하여 바트 고데스베르크 연회장에서 있을 독일문제에 대한 콜 총리의 기조연설을 동독에 생중계할 것을 요구하였고, 동독은 이를 수용하였다.
9월 15일 통일사회당 정치국은 호네커의 방문 성과를 브리핑을 통하여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방문은 기본조약 체결 후 양국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개별적 주권국가 수반에 대한 의전에 따라 두 개의 독일 국가의 독립과 대등한 지위를 세계에 알렸으며, 국제법에 따른 양국 관계의 성격과 양국의 주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콜 총리는 ‘법적 지위’와 ‘민족 통일’에 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동독에도 생중계된 콜 총리의 연설은 민족 문제와 재통일 그리고 인권 문제에 관한 서독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 방문이 민족문제를 포함한 근본적 문제에 대한 두 나라의 상이한 견해를 변화시킬 수 없으며 변화시키지도 않을 것이다. 연방정부의 입장에서 거듭 말하겠다. 우리 기본법 전문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 이는 우리의 신념에 부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유럽의 통합을 원하며, 전체 독일 국민에게 자유로운 자결권에 의해 독일의 통일과 자유를 완성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는 현존 경계선을 존중하지만, 평화적인 이해와 자유의 길에서 분단을 극복하고자 한다. 독일문제는 열려 있지만, 그 해결은 현재 세계사의 의제가 아니며 우리는 이웃 국가의 동의를 필요로 할 것이다.“
콜 정부는 이미 1983년과 1984년 두 번에 걸쳐 동독에 19억 5천만 마르크의 현금차관을 제공하였고 1987년 동독 호네커 서기장의 서독방문으로 동서독 간에 화해·협력 분위기가 다시 고조되기 시작했다.
1989년 11월 베를린장벽이 붕괴되고 그해 말까지 46만 여명의 동독주민이 서독으로 탈출하자, 콜 정부는 사민당과 각 주정부의 격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독 탈출자를 전원 수용하는 한편, 동독 공산정권의 「국가연합 통일방안」과 경제원조 요구를 단호히 거부함으로써 동독혁명을 통일로 연결시키는데 성공했다.
서독의 통일정책의 특징으로는 서독 양대 정당의 정책노선이 현저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대정부 정책에서 몇 가지 기본원칙은 일관성을 유지해왔다는 점이다.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기본법 23조(기본법 적용대상 지역)와 116조(국적조항)가 그대로 유지되어 왔고, 대외관계에 있어서도 친미·친서방 노선에 큰 변화가 없었으며, 내독정책에서 분단에 따른 인간적 고통완화와 동독 주민의 ‘삶의 질’ 개선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아 왔다는 점, 1968년 브란트의 동방정책 이후 모든 정권이 동독과의 교류·협력을 꾸준히 추진해 왔다는 점 등에서 일관성을 갖고 있었다.
이는 중도정당인 자유민주당(자민당, FDP)이 대연정 기간을 제외한 모든 기간 동안 기민당 혹은 사민당의 연립정부 파트너가 되었던 데다, 자민당 부총재인 한스 디트리히트 겐셔가 1974년 슈미트 정부 이후 1990년 독일통일 시까지 16년간 외무장관으로 재임했던 것도 중요한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2020년 7월 24일, 1180호 31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