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80주년 특집] 격변과 성취의 80년, 그리고 새로운 도전 (1)

교포신문에서는 2025년 광복 80주년을 맞아,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겪어온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변화의 궤적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그 성과와 한계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동시에 미래 한국사회가 직면한 도전과제를 살펴보도록 한다.
1945년 일본강점으로부터 해방된 후, 대한민국 현대사 80년은 ‘추격 산업화’와 ‘추격 민주화’라는 두 가지 거대한 흐름으로 요약된다. 짧은 기간에 선진국을 따라잡기 위해 모든 역량을 쏟아부었던 ‘압축 성장’의 시기였으며, 이는 경제적 성취와 함께 권위주의 체제, 사회적 불균형, 그리고 격렬한 민주화 운동이라는 양면적 결과를 낳았다.
교포신문사는 2회에 걸쳐 1945년부터 2025년까지의 대한민국 사회 변화를 네 개의 주요 시기로 구분하여, 각 시기별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변화를 종합적인 살펴보고, 격동의 시대를 헤쳐 나온 대한민국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해방, 분단, 그리고 정부 수립의 혼란

1945년 8월 15일, 35년간의 일제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한반도는 해방의 기쁨을 누렸다. 그러나 미·소 양국의 분할 점령은 새로운 국가 건설을 향한 노력을 좌절시키고 남과 북의 다른 길을 촉발하는 원인이 되었다.

남한에서는 좌우익 정치 세력이 통일 국가 수립을 위해 노력했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정읍 발언 이후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이 현실화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권은 장기 집권을 위해 헌법을 개정하며 독재 체제를 강화했다. 1952년에는 대통령 선출 방식을 간선제에서 직선제로 바꾸는 발췌개헌을 단행했고, 1954년에는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 제한을 없애는 사사오입 개헌을 통해 정권 연장을 시도했다.

이 시기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를 경찰이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 국가보안법이 제정되는 등, 권력 강화는 단순한 법적 절차를 넘어 독재 체제 구축을 위한 명백한 정치적 행위였다. 이는 국민 주권을 보호해야 할 헌법이 권력자의 장기 집권 도구로 전락했던 한국 민주주의의 초기 단계를 명확히 보여준다.

6.25 전쟁과 폐허 속 재건의 시작

정부 수립 직후인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한반도의 산업 기반은 철저히 파괴되었다.

1950년대의 한국 경제는 농림어업의 비중이 40% 이상을 차지하고 취업자의 60% 이상이 농업에 종사하는 전형적인 농업사회였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토는 미국과 유엔이 보내주는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여 ‘재건’을 시작했다.

이승만 정부는 수입 대체 산업화 정책을 추진하여 외국에서 수입하던 물품을 국내에서 생산하도록 촉진했고, 이를 통해 제분, 제당, 면직물 산업이 성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은 수출 증대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4.19 혁명, 민주주의의 불꽃

이승만 정권의 지속적인 부정부패와 독재, 언론 통제는 국민들의 불만을 증폭시켰다. 특히, 경제 성장 과정에서 발생한 분배의 불균형과 농촌 경제 파탄은 국민들의 상대적 박탈감과 사회적 적대감을 심화시켰다. 이러한 사회적 모순이 누적된 상황에서, 1960년 3.15 부정선거는 학생과 시민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폭발시키는 도화선이 되었다.

경찰의 무자비한 총격 진압에도 불구하고 , 4.19 혁명은 전국적인 시위로 확산되었고, 마침내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이끌어냈다.

4.19 혁명은 단순한 부정선거에 대한 일회성 항거가 아니었다. 이는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열망이 경제적 빈곤 및 사회적 불균형과 결합하여 발생한 구조적 모순의 결과였다. 비록 제2공화국이라는 과도기적 민주주의를 낳았지만, 이 혁명은 이후 군부 독재를 거쳐 19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이어지는 한국 현대사 민주화의 중요한 초석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압축 성장과 한강의 기적의 탄생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부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며 정부 주도의 강력한 산업 정책을 추진했다. 1967년에는 과학 기술을 전담하는 행정 기구인 과학기술처가 발족되어 산업 발전을 위한 기술적 기반을 마련했다. 이러한 정부 주도 전략은 수출을 핵심적인 성장 동력으로 삼았다.

한국은 1960년대에 섬유, 합판, 가발, 신발 등 경공업 위주의 수출 전략으로 경제 성장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후 1970년대에는 철강, 자동차, 조선 등 중화학 공업 육성 정책을 추진하며 산업 구조를 고도화했다.

이러한 전략은 1974년에 제조업의 비중이 농림어업의 비중을 상회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시기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지하철 시대 개막은 산업화의 혈관을 만들었으며, 수출 1억 달러 달성과 자동차 첫 수출은 ‘메이드 인 코리아’ 시대의 서막을 알렸다.

이 시기는 한국이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경공업에서 중화학 공업으로 급격히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급격한 산업 구조의 변화는 농촌 공동체의 해체와 도시 빈민 문제, 그리고 열악한 노동 환경에 대한 노동자들의 불만을 초래하는 사회적 비용으로 이어졌다.

군부 독재의 강화와 민주화의 투쟁

박정희 정권은 ‘4년 중임제’였던 제3공화국 헌법을 ‘6년 연임 무제한’의 유신헌법으로 개정하며 독재를 강화했다. 이는 경제 성장을 위해 절차적 민주주의를 희생시키고 모든 것을 성장에 종속시킨 ‘선성장 후분배’ 전략의 정치적 반영이었다.

이러한 독재 체제 속에서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은 노동 운동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했으며 ,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신군부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좌절되었으나,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의 불멸의 금자탑으로 기록되었다.

5.18 민주화 운동의 비극은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중요한 동력이 되었고, 결국 6월 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는 제도적 민주화로 이어졌다. 이는 단순한 제도 개혁이 아닌,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희생이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특징임을 보여준다.

사회 및 문화의 이중성: 도시화와 청년 문화

산업화 과정은 인구의 도시 집중을 가속화했다. 특히 서울 및 수도권으로의 인구 유입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며 수도권 집중 현상이 심화되었다. 이 시기에 경부고속도로 개통과 프로야구 개막은 시대의 활력을 상징했으며, <전국노래자랑>은 국민적 정서를 대변하는 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았다.

한편, 1960년대에는 한국 영화의 전성기가 찾아왔으며, 1970년대에는 청년 문화를 대변하는 포크 음악이 등장하며 사회 변화를 갈망하는 젊은 세대의 목소리를 담아냈다.

민주주의의 심화와 제도적 안정화

1987년 6월 민주 항쟁은 전두환 정부의 호헌 조치에 맞서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이었다. 이는 국민들의 거센 항쟁으로 노태우 정부의 6.29 선언을 이끌어냈고, 대통령 직선제 도입과 5년 단임제 개헌(제6공화국)으로 이어졌다. 1990년대 이후 군부의 영향력이 배제된 ‘순수 민정(民政)’ 시대가 시작되었고, 보수계열과 민주당계열의 거대 양당 체제가 정착하며 민주주의가 제도적으로 안정화되었다.

제1공화국부터 제6공화국까지의 역대 헌법 개정은 대부분 대통령 개인의 권한을 강화하는 독재 체제 강화의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제2공화국과 제6공화국의 헌법 개정만이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지 않고 민주적 절차를 도입한 예외적인 사례였다.

제2공화국은 4.19 혁명의 결과였으며, 제6공화국은 6월 민주 항쟁의 결과였다. 이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정치 엘리트의 결정이 아닌,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통해 획득된 민주주의라는 점을 보여준다.

IMF 위기 극복과 민간 주도 경제로의 전환

1997년 IMF 외환 위기는 ‘압축 성장’ 과정에서 누적된 재벌의 도덕적 해이와 경제 시스템의 구조적 문제 가 한꺼번에 표출된 사건이었다.

1980년대 후반부터 정치적 개방은 이루어졌으나, 경제적 개방은 상대적으로 더디게 진행되었다. 이 정치-경제 간의 ‘개방 격차’가 재벌의 무분별한 확장과 같은 구조적 문제를 심화시켰고, 이것이 IMF 위기의 한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위기 극복 과정에서 강제된 경제 개방과 구조 조정은 역설적으로 한국 경제가 정부 주도에서 민간 기업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민주화 이후 등장한 시민사회가 재벌의 기업 운영에 대한 통제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는 정치적 민주화와 시장경제적 자유화가 별개의 사건이 아닌, 상호 영향을 주고받으며 한국 사회를 성숙시켰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이다.

기술 발전과 한류의 전 세계 확산

1990년대 정부의 적극적인 투자와 민간 주도의 기술 개발 정책 에 힘입어, 한국은 초고속 인터넷 인프라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구축했다. 이러한 기술 인프라는 개인 간 소통 방식을 혁신하고, 원격 근무, 전자상거래 등 사회 전반에 혁명을 가져왔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K-pop, K-드라마, K-영화 등이 전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한류는 단순한 문화 콘텐츠 소비를 넘어, 한국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와 호감도를 높이고 , 한국인의 문화적 자부심과 긍지를 높이는 데 기여했다.

(다음 호에 계속 됩니다)

1423호 14호, 2025년 8월 1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