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어로서 독일어와 한국어 – 언어로 이어지는 두 문화의 다리

윤재원 박사와 둘러보는 문화와 문화 사이를 잇는 다양한 현장들 (27)

독일에서 한국어를 배우는 젊은이들이 늘어나고 있고 그들의 여정은 단순한 외국어 공부가 아니다. 두 문화가 만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시선과 목소리를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그동안 본 지면은 주로 독일에 온 한국 학생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문화의 경계를 비춰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방향을 달리하여 한국에서 독일로 건너와 학생이자 교사, 그리고 작은 스타트업의 실험가로 살아가는 민지를 중심으로, 그녀 곁에서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독일 학생들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민지는 한국에서 유명한 온라인 강좌를 통해 독일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자, 독일 시민학교에서는 한국어를 가르치는 강사다. 동시에 새로운 학습 굿즈를 기획하며 스타트업의 실험가로 살아간다. 강의실에서는 학생이고, 도서관 한켠에서는 원격으로 한국 학생들과 연결되는 교사이며, 현지 커뮤니티에서는 한국어를 알리는 다리 역할을 한다.

이 다채로운 삶은 이미 한 개인의 체험을 넘어선다. 유나와 미셸 같은 친구들과의 만남 속에서, 우리는 독일 사회 속에서 언어와 문화가 어떻게 서로를 잇고 확장하는지를 생생하게 목격하게 된다.

경계에서 시작된 길

2017년 2월, 민지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첫발을 내디뎠다. 낯선 공기와 언어가 한꺼번에 밀려오던 순간, 그는 알파벳조차 독일식으로 읽지 못하는 자신과 마주해야 했다. 길을 묻는 말 한마디조차 버겁고, 버스 안내판의 글자들이 낯설게 춤추던 시절이었다. 집 밖을 나설 때마다 그는 마치 전투 준비를 하듯 어깨를 펴고 고개를 세웠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의식적인 다짐이 없으면 한 발짝 내딛기조차 힘들었다.

그렇게 실수와 낯섦, 이방인이라는 이름을 견디며 보낸 시간이 어느덧 몇 해. 이제 그는 독일에서 독일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배우고, 또 가르치는 삶을 살고 있다. 강의실에서는 여전히 학생이지만, 도서관 한켠에서는 한국 학생들에게 독일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되고, 독일 시민학교에서는 한국어를 전하는 강사가 된다.

“나는 늘 경계 위에 서 있어요. 학생이면서도 교사이고, 배우면서도 가르치죠. 하지만 그 경계가 나를 불편하게 하기보다는 오히려 새로운 시선을 주는 것 같아요.” 민지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바로 그 경계 위에서, 그는 두 언어를 제3자의 눈으로 탐구할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을 발견했다.

국경을 넘나드는 교실

민지의 하루는 국경을 넘나드는 작은 여정의 연속이다. 오전, 강의실에 앉은 그는 다른 독일 학생들과 함께 시험 문제를 분석하며 평가 기준을 놓고 토론한다.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치열하게 의견을 나누는 순간, 그는 분명 학생이다. 그러나 강의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얼굴이 된다. 도서관의 조용한 구석에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열면, 화면 속에서는 7시간 시차 너머 한국 학생들이 독일어 문법을 배우고 있다. 누군가는 단어 암기를 힘들다며 투덜거리고, 또 누군가는 발음을 흉내 내며 웃는다. 민지는 그 웃음소리를 들으며 “지금 이 순간, 나는 분명히 독일과 한국 두 나라에 동시에 발을 딛고 있구나”라는 기분을 느낀다.

해가 지면 민지의 일상은 또 한 번 전환된다. 이번에는 독일어 학습 굿즈를 만드는 작은 팀의 회의실. 스티커 디자인부터 단어 달력, 온라인 퀴즈 아이디어까지 자유롭게 오간다. 노트북 화면에는 그래픽 프로그램과 AI 툴이 동시에 켜져 있고, 팀원들과의 대화는 ‘어떻게 하면 독일어 공부를 더 재미있게 만들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흘러간다. 실험실처럼 아이디어가 부딪히고 수정되는 자리에서 민지는 배우는 동시에 창조하는 또 다른 자신을 만난다.

주말이면 그의 역할은 다시 달라진다. 지역 시민학교의 작은 교실에서 초급 학습자들과 마주 앉아 세종학당 교재를 펼친다. “안녕하세요?”라는 짧은 인사가 교실 안에 울려 퍼지면, 민지는 이곳이 한국과 독일을 잇는 다리가 되는 순간임을 실감한다. 낯선 발음을 따라 하며 웃는 학습자들의 표정은 언어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사람과 문화를 잇는 힘임을 보여준다.

디지털 도구 덕분에 그는 한국어 교원 자격증까지 취득했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학생이면서 교사이고, 연구자이면서 실험가인 민지의 일상은 하나의 경계를 단단히 넘어선 삶이다. 언어와 기술이 교차하는 그 현장 속에서, 그는 매일 작은 다리를 놓는다. 그리고 그 다리 위를 걷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두 문화 사이의 거리를 좁혀 준다.

말복의 초계국수와 언어의 뉘앙스

올여름, 몇 안 되는 무더운 날이었다. 한국에서는 말복이면 닭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하지만 뜨거운 삼계탕은 엄두가 나지 않았다. 민지는 친구 유나와 미셸을 집으로 초대해 조심스레 제안했다.

“그럼 초계국수 어때? 닭고기에 식초가 들어간 차가운 면요리야. 괜찮겠지?”

차가운 음식이 독일에서는 흔치 않다는 걸 알기에 살짝 걱정했지만, 두 사람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주방에는 금세 김이 서렸고, 면을 삶는 동안 유나는 이마의 땀을 훔치며 물었다.

“근데 ‘초계’가 무슨 뜻이야?”
“‘초’는 식초, ‘계’는 닭. Essig und Huhn.”
민지가 답하자, 미셸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아! 수업에서 배운 한자네. 그런데 한국 사람들도 잘 몰라?”
“맞아. 요즘은 한국 사람들도 한자어의 뿌리를 잘 모르고 그냥 먹지.”

식탁에 둘러앉자 그동안 바빠서 못다 한 이야기가 쏟아졌다. 유나는 최근 한국에서의 교환학기를 마치고 돌아온 경험을 들려주었고, 미셸은 다가오는 학기에 독일 고등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게 된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대화의 풍경은 늘 비슷하다. 유나와 미셸은 한국어를 쓰려고 애쓰고, 민지는 독일어로 대답한다. 각자 상대 언어를 실제로 쓸 기회가 많지 않기에, 이 만남은 소중한 연습장이 된다.

대화는 자연스레 언어의 어려움으로 이어졌다.

“한글은 쉬운데 한국어는 어려워. 표현이 너무 많고 뉘앙스를 이해하기가 힘들어.” 유나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독일어 수업에서는 뉘앙스도 기본적으로 가르쳐주잖아. 표현이나 문법을 통해 유추할 수 있고, 제스처도 도움이 되고… 한국어 수업에서도 그런 걸 배우지 않아?” 민지가 물었다.
“그런데 실제로 한국 사람들이 쓰는 표현은 교실에서 잘 안 나오더라구. 문어체 중심으로 배우거든. 구어체는 한국 사람들과 직접 말하면서 배우는 수밖에 없어.” 미셸이 덧붙였다.
“맞아. 언어는 결국 써봐야 알 수 있어. 단어를 많이 아는 것보다, 그 언어가 담고 있는 문화를 이해해야 진짜 깊어지지.”

그 순간 민지는 깨달았다. 언어는 단순히 문법과 어휘의 집합이 아니다. 문화와 사고방식, 생활과 역사까지 담아내는 그릇이다. 초계국수의 새콤한 국물이 낯선 입맛을 깨우듯, 언어도 서로의 세계를 흔들어 깨우며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언어와 얼굴, 다양성 속의 독일 학생들

독일에서 살며 민지는 ‘독일인’이라는 단어가 결코 하나의 모습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유나는 아시아계 독일인으로서 한국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할 때 자주 이런 말을 들었다.

“독일에서 왔다고? 그런데 넌 한국인처럼 보여!”

겉모습 때문에 국적과 정체성이 단순히 혼동되는 순간마다, 그는 스스로의 자리를 다시 묻게 되었다.

미셸의 경험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독일인이지만, 한국에서 마주한 기대는 늘 같았다. “독일인이라면 모두 백인일 것이다”라는 고정관념이었다. 미셸은 그 기대와 실제 자신의 모습 사이에서 곤혹스러움을 느낀 적이 많았다.

민지는 두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독일어를 전공하고 가르치지만, “원어민처럼”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그 거리를 실감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문법을 익히고 발음을 다듬어도 원어민이라는 기준은 늘 손에 잡히지 않는 이상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세 사람은 이런 경험을 단순히 상처로만 남기지 않았다. 대화 속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했다. 언어는 완벽을 추구하는 시험 과목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라는 점이다. 유나는 외모와 정체성 사이에서 느낀 혼란을, 미셸은 기대와 현실의 간극을, 민지는 “원어민처럼”이라는 압박을 꺼내놓으면서, 결국 언어의 본질은 완벽한 발음이나 문법이 아니라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태도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언어의 얼굴이 하나가 아니듯, 사람의 얼굴도 결코 하나가 아니다. 세 사람은 각자의 차이와 경험을 공유하며, 다양성 속에서 오히려 서로에게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 순간들이 모여, 언어와 문화의 새로운 다리가 놓이고 있었다.

디지털 시대의 언어와 우리가 묻는 것

AI 번역기가 빠르게 문장을 바꾸고, 챗봇이 질문에 답하는 시대다. 하지만 이들은 언어와 인문학의 가치를 더 깊이 고민한다. 유나는 한국과 독일을 오가며 외교관으로서 다리가 되고 싶어 하고, 미셸은 한국어 교사가 되어 독일 청소년들에게 언어와 문화를 전하고 싶어 한다. 민지는 디지털 시대에도 인간적인 학습의 의미를 찾으며, 언어가 단순한 기술이 아닌 삶의 맥락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AI가 대신할 수 없는 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공감이에요.” 민지는 이렇게 말했다. 초계국수의 새콤한 국물이 낯선 입맛을 깨우듯, 언어와 문화의 만남은 여전히 세상에 새로운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기술은 위협이 아니라 실험의 파트너다. 언어를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세계와 연결되는 방법을 함께 발명하는 일이다.

세 사람의 삶이 보여주듯, 언어는 완벽한 문법이나 유창한 발음을 넘어선다. 그것은 서로의 정체성과 경험을 이해하려는 노력, 그리고 다양성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에서 비로소 빛을 발한다. 디지털 도구와 기술이 아무리 발달하더라도,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는 결국 인간의 목소리와 눈빛에서 시작된다. 민지와 유나, 미셸이 함께 놓아 가는 이 다리는, 한국과 독일을 넘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고 있다.

1429호 14면, 2025년 10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