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한국에는 이팝나무꽃이 하얗게 피고 있다며 풍경 사진을 지인이 보내왔다. 이팝나무는 서양사람들은 눈꽃나무(Snow flower)라고 하지만 우리는 쌀밥나무라고 부른다.
한국인들에게 밥은 삶이고 생명이다. 우리는 각자 자기 밥그릇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믿는다. 밥을 보약이라고 생각하며 챙겨 먹고, 밥심으로 살아가며 열심히 밥벌이하다가, 나중에는 직장에서 밥줄이 떨어지게 되면 노년에는 찬밥신세로 지내다가 밥숟가락을 놓으며 생을 마감한다. 한국인의 인생은 밥과 함께하는 희로애락의 여정이다.
한국인은 어떤 상황이든 밥과 연결하여 말한다. 나이 먹고, 마음먹고, 겁먹고, 욕먹고, 편먹고, 시간 잡아먹고, 더위도 먹는다. 밥과 연결된 말은 셀 수 없이 많다.
한국인에게 밥은 의사소통의 수단이다. 밥은 마음과 사랑의 표현이기에. ‘언제 밥 한번 먹자’, ‘밥은 먹고 다니냐?’라며 친근함과 다정함을 담아 소통을 시작한다. 한국인은 가족을 한 솥에 밥을 같이 먹는 식구라고 한다. 뜻을 같이하는 공동체의 일원도 확대하여 ‘우리 식구’로 부른다. 한국인에게 밥은 마음이며 삶이다.
한국인의 밥상은 코스요리가 아니라 한상차림이 기본이다. 국이나 찌개에 담긴 여러 가지 재료의 전체적인 조화를 맛보고 나서, 함께 차려진 많은 반찬을 곁들여 가며 각각의 반찬이 가진 재료의 맛을 음미하며 먹는다. 우리의 상차림에는 반드시 숟가락과 젓가락이 같이 놓여있게 마련인데 숟가락과 젓가락을 동시에 균형 있게 사용하는 민족은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이런 생활을 수천 년 동안 해왔기에 우리를 따라올 ‘손기술’을 가진 나라가 없다. K-문화의 출발은 우리의 밥상 문화에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해외 거주하는 우리 어르신 중에서 치매 환자와 거동이 어려운 독거노인, 특별히 입원환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도움은 한 끼 식사라도 한식을 맛있게 드시는 것이다. 특히 독일 요양원이나 병원에 입원하면 식사와 언어가 힘들어져 삶의 질이 급격히 떨어지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요양원에 가고 싶어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도 식사와 언어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말기 암으로 투병하고 계신 A 이모님은 항암치료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걸을 수만 있으면 내 손으로 밥 한 숟가락이라도 만들어 드시겠다면서 입원을 마다하고 집에서 요양하고 계신다. B 이모님은 심각한 저나트륨혈증과 오랫동안 변을 보지 못하여 병원에 입원하였다.
병원에서의 아침 식사는 빵과 치즈, 요거트가 전부였는데, 에너지와 단백질이 많이 부족해 보였다. 국이나 찌개, 그리고 여러 가지 반찬이 나오는 한식이 건강 회복에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치매를 앓고 있는 C 이모님은 요양원에서 생활하고 있는데, 간호사들은 이모님이 요즘 식사를 잘 드시지 않는다고 하셨다. 우리 봉사자가 가지고 간 즉석 미역국과 누룽지 밥을 따뜻하게 데워서 드렸다. 첫 숟가락을 드시고 나서 누구 생일이냐고 물으셨다. 미역국이 생일에 먹는다는 것을 기억하셨고, 입맛이 나셨는지 한 그릇을 뚝딱 다 드셨다. 그리고는 과거의 회상과 어릴 적 이야기 등으로 대화가 이어졌다. 치매를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음식과 한국말로 나누는 대화가 얼굴에 생기를 돋게 하고 어제와 오늘, 마음과 마음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였다.
파독 60년이 되면서 파독 1세대 어르신들이 고령이 되셨고, 환자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특별히 인지능력이 떨어져 혼자서 생활하기 힘든 치매 어르신들이 늘고 있어 봉사에 대한 특별한 대책이 필요한 상황이다. 해로의 봉사자가 이분들을 매일 방문할 수 없는 상황이다 보니, 일주일이나 보름 만에 찾아 뵙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미역국이나 작은 한식 도시락을 가져다 드리면 바닥까지 싹싹 긁어 드시는 것을 본다. 약해진 체력에 입맛이 없었지만, 한국 음식의 익숙한 냄새와 맛은 종종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치매를 앓고 있는 많은 노인에게 한식은 단순히 음식을 섭취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이분들에게는 음식은 단순한 영양공급이 아니다. 기억을 잃어가는 질병에 걸려서 모든 것이 낯설어지는 환경이 되었지만, 어렸을 때부터 먹던 음식은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어서 오늘과 과거를 이어주는 마지막 다리가 되기도 한다. 어릴 때 먹던 음식의 맛은 우리의 뇌가 가장 오래 기억한다고 한다. 어르신들에게 음식은 기억이고 추억이기에 더 소중하다. 음식을 먹을 때 과거를 추억하며 자신을 기억하게 된다.
<해로하우스>가 오픈한 지 한 달이 되었다. 해로하우스를 시작하면서 우리 파독 1세대 어르신들이 한국말과 한국 음식을 마음껏 나눌 수 있는 집과 같은 역할을 하려고 하였다. 그동안 환자를 방문할 때마다 부정기적으로 음식 서비스를 진행해 왔는데 이제는 식사를 직접 만들어 드시지 못하는 분들이 해로하우스에 오시면 언제나 집밥을 드실 수 있게 되었다.
일단 3개월 동안 시범적으로 운영해보면서 식사와 프로그램 등을 새롭게 만들어 가는 중이다. 계속 홍보하고 있지만 아직은 찾아오시는 분이 많지는 않다. 3개월의 기간 동안 주방에서 봉사하는 분들을 세우는 일과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식사와 프로그램을 계속 개발하고 있다.
해로하우스에 오고 싶지만, 몸이 불편하여 나오시지 못하는 분들을 위한 차량 서비스와, 그마저도 어려운 분들을 위해 도시락 배달 서비스도 기도하며 준비하려고 한다. 여름이 지나면 더욱 틀이 잡혀서 이용하시는 분들의 기대를 충족할 해로하우스가 되리라고 믿는다. 새롭게 시작한 해로하우스에 많은 격려와 성원을 부탁드린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태복음 6:11)
박희명 선교사 (호스피스 Seelsorger)
1410호 16면, 2025년 5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