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초의 국산 흑백 TV는 금성사(현 LG전자)가 생산한 VD-191 모델로, 1966년 8월에 처음 출시되었습니다. 19인치 화면의 진공관식 제품으로, 당시 6만원(중급 기술자의 월급이 7,000원, 자장면 한 그릇 15원)이 넘는 고가였음에도 추첨 판매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때, 제 나이 22살 저는 눈감으면 코 베어간다는 서울 땅을 밟았습니다. 시내버스의 소음, 바쁘게 걷는 서울 사람들의 발걸음을 눈으로 보면 현기증이 날 정도였습니다. TV의 등장과 함께 새로운 직업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서울 간다는 소식을 듣고 가깝게 지내던 친구가 나에게 <서울 올라가면 여기를 한 번 찾아가 봐라. 일자리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해 주어 저는 을지로 6가에 어느 사무실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그 좁디좁은 사무실에 시골에서 올라온 듯한 처녀들이 십여 명 구석 바닥에 앉아 있고, 친구가 소개해 준 이춘봉이라는 여사장은 의자에 앉아서 고급스러운 차림을 하고 있는 한 여자와 면담을 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곳은 식모 소개소였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땅에 새롭게 TV가 등장하자 이춘봉 여사는 믿을 수 있는 식모를 소개해 주는 업체라고 TV 광고를 낸 것입니다. 그러자 서울 장안의 내노라하는 집안에서 TV 광고를 보고 그곳을 통해서 일 잘하고 믿을만한 식모를 소개 받으려 하고 있었고, 한쪽 구석 바닥에서 기다리고 있는 처녀들은 시골 여기 저기서 식모살이를 하려고 올라온 처녀들이었습니다.
나는 이춘봉 여사장에게 인사를 하고 <광주의 친구 소개로 왔는데 혹시 일을 좀 할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오늘은 대단히 바쁘니 내일 다시 오라>는 말을 듣고, 그 다음날 그곳을 다시 찾았습니다. 사무실의 풍경은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냄새로 가득 차 있었고, 시골에서 올라온 처녀들 중에는 어제 보였었든 처녀들도 있었습니다.
이춘봉 여사장은 나를 보더니 대뜸 <총각, 오늘 부터 일 좀 해 주어야 겠어. 여기 앉아 봐.>라고 말을 하더니, 한 처녀를 손짓 하여 불렀습니다. <이 아이와 함께 가서 그의 친척 이모에게서 도장을 받아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듣지 못하고 조금은 어안이 벙벙 하고 있는 중에, 이춘봉 여 사장의 총무 역활을 하는 남자가, <이 처녀가 장충동의 어느 부잣집 식모로 가기로 되어 있는데, 신원 보증이 필요해서, 서울에 살고 있는 처녀의 이모에게 함께 가서 이 종이에 식모살이 가는 처녀의 신원을 보증한다는 도장을 받고, 그 집을 한 번 잘 살펴보고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나는 서울에 올라와서 일자리는 찾고 있었지만, 이렇게 생각지도 못한 희한한 일자리를 얻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나 역시 광주 시골에서 이제 막 서울로 상경해서 서울 지리도 전혀 모르는 판인데, 식모살이를 하려는 처녀를 데리고 주소 하나만 들고 찾아가야만 되는 너무나 황당한 일자리였습니다. 나는 그 처녀를 데리고, 버스를 멎번씩 갈아타고 걷고, 또 묻고 물으면서, 그 일을 하기 시작 했습니다. 정말, 나에게는 서울에서 김 서방 찾는 일과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TV 광고를 보고 신뢰감이 있어서인지 식모를 데려가려는 부자들은 많은데 비해서, 나는 신원보증 받아오는 일을 겨우 하루 한 건 밖에 할 수 없었기에 공급이 딸리는 상황 이었습니다. 나와 함께한 처녀도 시골 출신이요, 나 또한 서울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그 희한한 직업은 나를 심히 곤혹스럽게 하였습니다.
그 당시 나는 20대 초반이기는 했지만, 어린 시절 부터 쉬임없이 보아온 외국 영화 덕분에 패션에 민감했고, 특히 미국 스타일의 청바지와(그 당시 청바지 입은 사람 없었음) 자켓 등, 나름대로의 모습에 무척 신경을 쓰며 살던 시절이었는데, 시골에서 보따리 들고 올라온 시골처녀를 데리고 하루 종일을 같이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창피하다는 생각과 함께 나를 많이 피곤하게 했습니다.
매일 새로운 처녀들이 들어오고 그에 따라서 나의 업무도 점점 더 바빠졌습니다. 어느날 아침에 출근을 해보니, 어제 보지 못했던 새로운 얼굴들이 보였는데, 특별히 내 눈길을 끄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18세쯤으로 보이는, 고등학교 2학년쯤 되어 보이는 아이인데, 명찰은 달지 않았지만, 그냥 교복 같은 것을 그대로 입고 있는 단발머리의 단정한 모습이었는데, 얼마나 그 학생이 신선하고 상큼하게 보였든지 나는 그만 온 마음을 그 학생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맑고 큰 유난히도 검은 눈동자가 바닥에 앉아 있는데도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이 무엇인가를 계속 보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날, 그 여학생을 데리고 흑석동에 있는 그녀의 작은 삼촌 집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평소에는 버스에 자리가 남아도 나는 시골 처녀들과 같이 앉는 것이 창피해서 일 부러 다른 자리에 앉았었는데, 그 소녀에게만큼은 내가 일부러 다가가 말을 걸기도 하고, 눈치를 살피기도 하면서 길고 긴 하루 해가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행복 했습니다. 그 학생은 묻는 말에는 친절하고 분명하게 대답하면서도 대화가 없을 때는 항상 책을 보고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은 아주 작은 성경책 이었습니다.

우리가 찾아간 그의 삼촌은 중앙대학교 학생이었고, 그는 그 소녀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너 처럼 실력이 뛰어난 아이가. 학교를 그만두고 식모살이를 해야 하다니,>하면서 안타까워했지만, 그 소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담담하게 미소를 띈 채로 삼촌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 소녀의 이름은 이필신 이었습니다. 그날 나는 돌아오는 길에 중국집에 들려 필신 학생에게 식사 대접을 했습니다.
그리고 필신이는 서울 어느 대형 신문사의 편집국장 집으로 식모살이를 갔습니다. 떠나기전 필신이는 나에게 아름다운 미소와 함께 고맙다는 말을 남겼고, 내가 일하는 사무실 주소로 편지를 보내오기도 하였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나에게 오빠라는 호칭을 붙여 주었는데, 그녀는 편지의 본문을 쓰기 전에 제일 먼저 십자가와 함꼐 <예수 찬미>라고 썼습니다. 필신이가 보내준 편지의 내용은, 담담하지만, 오직, 에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절대 구원자이심을 강조 하고 있었고, 편지 전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강물이 차고 넘처 편지 밖으로 흘러넘치는 듯 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부터 교회에 다녔던 나는 필신이를 통해서 신앙의 업그레이드가 이루어 졌고, 그녀의 고고하고, 잔잔하지만, 절대 예수라는 확고 하고 흔들림 없는 신앙과 만나 나는 더 깊은 신앙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로부터 수년이 흘러 나는 월남에서 귀국하고 제대를 한 후 서울로 올라 왔는데, 수년 동안 소식이 끊겼었든 필신이를 우연히 만나게 되었습니다. 서울의 대형 신문사의 편집국장 집으로 식모로 팔려간 그녀는 얼마 되지 않아 주인으로 부터 총명함을 인정받고 그 집의 수양딸이 되었고, 유수의 대학 불문과를 졸업하고, 불란서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담담하게 들려주었습니다. 식모 소개소에서 처음 만났을 때나, 부잣집의 수양딸이 되어 불란서 유학을 앞두고 있는 지금이나, 필신이는 별로 달라진 것 없이 겸손하고 잔잔한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그로부터 6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이 글을 쓰면서, 하늘에서 펑펑 쏟아지는 흰 눈 사이로, 필신이의 잔잔한 미소가 보이는 듯 합니다.
오늘 소개드리는 임우근 아동의 어머니는 미혼모로 교제 중 이던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임신 사실을 알게 되어 남자친구에게 연락을 취하였으나, 무책임하고 무성의한 태도를 보인 남자친구와는 추가 연락을 하지 않고 출산을 계획하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출산이 가까워지자 모는 모자보호시설의 도움을 받고 아동을 출산하게 되었습니다.

모는 임신과 출산으로 경제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한 어려운 생활 환경, 아동의 건강한 성장 등을 고려하여 아동을 입양하기로 결정하여 양육시설에 맡기게 되었습니다.
아동은 2026년 현재 만 6세입니다. 자전거, 킥보드 타기와 같이 바깥 놀이를 매우 좋아하는 활동적인 아동입니다. 요즘은 어린이집 하원 후에는 매일같이 보조바퀴가 달린 자전거를 타는데 빠져 있습니다.
교민 여러분의 사랑과 격려는 우근 아동에게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소식을 기다립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박 해 철 드림.
1445호 34면, 2026년 2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