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교의 귀띔: 천 년을 가라 한들 멀다 했으랴
Dipl.-Ing. WONKYO INSTITUTE
영국은 18세기 후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국내에서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범죄자들을 국내 형무소에 가두어 두지 않고 오스트레일리아로 추방시키기로 결정했다.
영국의 범죄자를 싣고 오스트레일리아로 향하던 제1함대는 아서 필립(Ather Phillip) 선장이 휘하는 11척의 함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독일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외동아들로 태어 난 그는 해군이라는 신분으로 정치가이기도 했으며 오스트레일리아 최초 총독이 된 사람이기도 하다.
함선에는 756명의 범죄자와 550명의 선원이 타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범죄자들은 경범죄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에서 오스트랄리아로 영구히 추방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음식을 훔쳐 먹었다거나 소매치기 또는 폭행죄 정도의 경범죄였고 여성 범죄자도 포함되었으며 가장 나이 어린 사람은 13살 소년이었다.
영국 정부는 경범죄라고 하더라도 본보기를 보인다는 입장에서 남녀노소 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무조건이다 싶을 정도로 오스트레일리아로 추방시켰다. 이 수송선의 목적지는 오스트레일리아의 보타니 (Botany) 항구였는데 이곳을 처음 발견했던 제임스 쿡이 이곳이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곳이라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제임스 쿡 (James Cook)이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를 첫 발견한 뒤 귀국하고 나서도 영국은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이전까지 오스트레일리아를 중요한 땅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미국은 청교도인들이 대거 이민해서 정착한 곳이지만 오스트레일리아는 범죄자를 추방해 보낸 곳이기 때문일 것이다.
17세기에 들어와서야 영국은 유죄 판결을 받은 범법자들을 유배지의 땅 오스트레일리아로 추방시키기로 했다. 그 이전까지는 영국의 범죄자들을 미국으로 보내고 있었다.
영국 정부는 범죄자 문제 해결책으로 미국으로 유배를 보내서 그곳에서 자기의 죄를 뉘우치고 개과천선의 빛을 보일 경우에만 영국으로 귀환시키고 있었지만 아주 드문 경우였다.
하지만 미국이 영국과 벌인 독립전쟁 (1775-1783) 에서 승리한 이후에는 죄수들을 미국으로 더 이상 보낼 수 없게 되었다.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이 성공하면서 사회적으로는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형사적인 강력범죄가 빈번히 발생하기 시작했다. 1760-1820년대까지 영국에서 일어 난 산업혁명은 기술혁신과 생산 공정을 통해 일어난 상황 등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특히나 섬유산업은 현대적인 방법으로 좋은 품질이면서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기술이었다.
영국은 사회적이고 형사적인 범죄를 원천적으로 근절시키겠다는 목적으로 경범죄라 하더라도 엄중하게 다스릴 것을 법으로 정했다. 영국정부는 벌이 무서워서라도 죄가 없어질 것으로 보았고 사형이 무서워서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그렇지 않았다. 빈부의 격차가 심해질 수록 범죄는 늘어만 갔고 훔치거나 폭력으로만 끝나지 않았을 뿐더러 살인과 납치 같은 강력범죄도 자주 벌어지고 있었다.
올리버 크롬웰 (Oliver Cromwekk)에 의한 청교도 혁명은 “탄압적 정치는 오히려 시민들의 반발만 불러 온다” 면서 경범죄자에게는 적당한 벌을 내리고 중범죄자에게만 사형케 하자는 주장을 하고 나섰다.
그러자 영국내 형무소는 범죄자들로 넘쳐나게 되었다. 영국 정부에서는 미국으로 더 이상 유배시킬 수 없게 된 범죄자를 추방시킬 새로운 유배지를 찿지 않을 수 없을 때 떠오른 곳이 제임스 쿡이 발견한 오스트레일리아였다.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과 너무 먼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범죄자의 가족들의 반발이 심했다. 형무소를 방문할 수 없을 뿐더러 사식이나 옷가지 등속을 보낼 수 없다는 항의에도 불구하고 범죄자를 오스트레일리아 유배지로 보내게 하는 법안이 상원에서 통과 되었다.
1787년 5월 13일 영국의 범죄자들을 실은 첫 함선이 영국 포츠머스(Portsmouth) 항구를 출발했다. 그들은 스페인의 테네리파 (Tenerifa), 남아프리카의 케이프 타운 (Cape Town)을 거쳐 항해를 했는데 그곳에서 식민지 건설에 필요한 자재와 식량 등을 보충하기 위해서였다.
영국을 떠나 오스트레일리아로 가는 항해는 8개월 이상이 걸리는 험로여서 선장을 구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고 배에는 필수의 요리사 이외에도 목수, 농업, 수공업, 어부 등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필요로 했다. 긴 항해를 하는 동안 선상에서 일어 날 수 있는 모든 사고와 고장을 스스로 고쳐야 했고 자급자족으로 항해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1788년 1월, 영국의 범죄자들을 실은 함선이 오랜 항해 끝에 제1함대가 오스트레일리아 보타니 (Botani) 항구에 도착했다. 그곳에 도착한 필립 선장 (Pillip)은 보타니 항구에 닻을 내리기 전에 지역순찰부터 먼저 했다. 제임스 쿡이 알려 주었던 보타니 지역은 사람살기가 좋은 곳이기는 커녕 토양이 척박하고 물 공급도 쉽지 않아 사람이 살기에 적당한 곳이 아님을 확인 할 수 있었다.
그래서 필립선장은 목적지였던 보타니에 입항하지 않고 계속 항해를 해서 자연적으로 만들어져 있는 잭슨 항구 (Port Jackson)에 범죄자들을 풀었다. 이곳이 오늘 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는 시드니(Sydney) 이다.
유배지로 보내진 죄수들 중에 어느 한 사람이라도 잭슨 항구가 오늘날과 같은 세계적으로 아름다운 항구가 되리라고 생각이나 했었을까 ?
넘쳐나는 죄수들을 처리하는 데에 골머리를 앓게 되자 멀리 오스트레일리아로 보낸 유배지가 오히려 젊은 죄수들의 노력으로 토지가 개간되고 도로가 만들어지는가 하면 활발한 건축 등으로 마을이 변해가고 있었다. 이후에도 범죄자들은 쉬임없이 유배지로 보내졌으며 잭슨항구는 차츰 영국 범죄자들의 집단촌락으로 발전해 가기 시작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겪는 죄수들의 생활이 고향과 친인척들과의 만남이 어럽다 뿐이지 편하고 즐겁게 지내고 있는 것이 가족들의 입소문으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영국 청교도인들이 미국으로 건너가 개척해 나갔듯이 이번에는 유배지라고 생각했던 오스트레일리아로 집단 이민으로 들어가 개척해 나가기 시작하면서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을 <애보리진 (Aborigine)> 이라고 하는데 영국인들이 옮긴 전염병으로 거의 전멸하다시피 줄었다가 현재는 약 80만 명에 이르고 있다.
1445호 22면, 2026년 2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