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교의 귀띔: 천 년을 가라 한들 멀다 했으랴
Dipl.-Ing. WONKYO 연구소장
1939년 9월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공격하자 영국과 불란서는 빠르게 연합하여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고 나섰다. 만약 독일 나치세력이 영국이나 불란서를 공격할 경우에는 두 나라가 연합해서 싸울 것이니 침범할 생각을 말라는 엄포였다.
영국과 불란서 두 나라는 100년 전쟁을 치렀듯이 사이가 좋은 관계가 아니었음에도 이제는 서로 뭉치지 않으면 삼자로부터 당할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기에 동맹관계를 맺지 않을 수 없었다.
두 나라가 나치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국경은 평온했으며 이 시기를 짓쯔크릭 (Sitzkrieg) 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상황은 1940년 봄, 독일의 서부지역 공세가 시작되면서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나치 독일은 먼저 중립국으로 있던 네덜란드와 벨기에 그리고 룩셈부르크를 공격한 뒤 불란서를 공격하려는 작전이었다.
네덜란드의 방어체계는 로테르담, 덴 학(헤이그), 암스테르담 등의 도시를 포함한 <요새 네덜란드>를 지키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나치 독일은 로테르담 지상공격이 쉽지 않음을 알고 항복하지 않으면 이 도시를 폭격하겠다고 협박했다, 전투기의 폭격 목표는 지상에서 싸우고 있는 육군을 지원하고 속전속결로 네덜란드를 항복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네덜란드는 나치 측에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나치 독일은 네덜란드의 협상요청을 무시하고 1940년 5월 10일부터 14일까지 닷 새 동안 로테르담을 무차별 폭격하기 시작했다. 총 57대의 폭격기가 투입되어 97톤 가량의 폭탄을 시내 중심부에 투하했다.
이 때 감행된 폭격으로 역사적인 도시 로테르담 중심가는 초토화되어 사라져 버렸다. 지상에서 싸우는 나치군을 지원하고 네덜란드의 지하조직을 파괴하고 나아가서는 네덜란드에게서 항복을 받아 내어 불란서를 침공하는 길목을 열기 위해서였다.
이 폭격으로 로테르담 시내의 약 25000 채에 달하는 아파트와 주택이 파괴되고 900 명 정도의 희생자와 수천 명에 달하는 이재민을 내게 했다. 로테르담에 닷 새 동안 감행된 나치 독일의 대규모 공격은 <로테르담 공습> 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로테르담을 완전히 파괴시킨 나치 독일은 이렇게 본보기를 보였는데도 항복하지 않는다면 다음에는 우트렉히트 (Utrecht)를 초토화 시킬 것이라고 협박했다. 우트렉히트는 네덜란드의 주 이름이면서 도청소재지 이름이기도 하다.
5월 14일, 네덜란드는 더 이상의 전쟁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나치 독일에 항복할 것을 통보했다. 항복을 통보한 다음 날 즉 5월 15일, 앙리 빙켈만 (Henri Winkelmann) 사령관이 네덜란드를 대표해서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나치 독일군의 침공에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으며 닷 새나 버틸 수 있었다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무방비 상태였다. 빙켈만이 서명한 항복문서로써 네덜란드 로테르담 이외의 도시들이 전쟁의 피해에서 모면할 수 있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한창 전쟁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불란서나 벨기에보다도 더 늦게 방어준비를 했다는 것은 1936년에 들어서야 국방예산을 증가시키기 시작한 것으로 알 수 있다.
네덜란드가 국방을 소홀히 했던 것은 독일의 중요한 무역 상대국을 설마하니 폭격을 하겠느냐는 안일한 생각 때문이었다. 만약 군비를 늘리고 군사훈련을 강화할 경우에 독일의 심기를 건드려서 화를 자초하는 것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우도 있었다.
심지어 1933년부터 1939년까지 7년 동안 네덜란드 수상으로 지냈던 헨드리퀴스 콜린 (Hendrikus Colijn) 은 “독일이 네덜란드의 중립을 지켜줄 것을 확신한다”고까지 공언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을 때 중립을 취하고 있었던 것처럼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을 때에도 중립국으로 처신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치 독일이 193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 병합과 체코의 주데텐란트 (Sudetenland) 위기를 조성할 때도 그들의 전쟁준비를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치군이 1939년 보헤미아-모라비아 (Bohemia-Morabia)를 점령할 때까지도 네덜란드의 고위급 장성들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나치군을 막아내기 위해 국방력 향상을 위한 훈련을 강화해야 한다는 의견조차 내는 사람이 없었다. 오로지 무역을 통한 중요한 나라이니 독일의 식량 자급자족을 위해서라도 침공은 없을 것이라는 불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네덜란드의 빌헤미나 ( Wilhelmina) 여왕 (1890-1948)은 네델란드가 항복하지 않으면 우트렉히트를 공격할 것이라고 협박하던 전날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피신했다. 1890년 빌렘 3세가 사망하자 빌헤미나 여왕은 10 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다보니 어머니 엠마(Emma)가 1890년부터 1898년까지 9년 동안 섭정을 했다.
19세가 되던 1898년부터 친정을 시작한 빌헤미나 여왕은 네덜란드 상류층의 계급 대립과 국제적 분쟁이 끊이지 않던 시기로 복잡한 국내사정에 처해 있었음에도 국민들은 여왕을 지지하고 있었다.
빌헤미나 여왕은 영국에서 저항운동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선언했지만 네덜란드는 나치 독일이 공격을 시작한 닷새 만에 항복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자 네덜란드로 돌아 온 여왕을 국민들이 열렬한 환영으로 맞이한 것은 여왕을 제2차 세계 대전을 반대하던 의용군의 상징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빌헤미나 여왕은 왕위를 외동딸이었던 율리아나(Juliana)에게 물려주고 퇴위하였으며 1962년 11월 28일 아펠도른 (Apfeldorn) 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독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로테르담 도시 파괴 및 전쟁보상으로 6000만 마르크를 지급했으며 네덜란드 정부는 만족할만한 보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추가 보상을 요구하지 않았다.
폴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소련과 “배상 면제 협상”에서 별도의 피해보상을 청구하지 않기로 했다. 독일은 종전 후 국경선 재확정 과정에서 독일영토였던 단찍히 (Danzig) 등 국경 지대가 대거 폴란드 영토가된 점을 들어 실질적 배상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서도 연방 보상법에 따라 1억5천만 마르크를 지급했다.
그런데도 폴란드에서는 선거가 있을 때마다 전쟁 보상비를 제대로 받아 내지 못했다면서 한 때는 1770조원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리스도 선거 때마다 단골 이슈로 등장하는 것이 독일로부터 전쟁 피해보상을 받아 내겠다는 것이다. 독일은 그리스와 협상하던 1960년에 1억 1500만 마르크를 전쟁 보상비로 지불했다.
그럼에도 보상비가 적었다며 오늘날까지 선거 때마다 더 받아내겠다고 아우성이다.
네덜란드의 앗쌀한 (어떤 상황에서 뒤끝 없이 깨끗하게 처리 됨) 이해와 비교되는 일이다.
1444호 22면, 2026년 1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