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재원 박사와 둘러보는 문화와 문화 사이를 잇는 다양한 현장들
도시의 간판을 따라가는 한국어 언어 경관 조사 첫 현장조사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여러 도시에서 한국어가 어떻게 보이고 읽히는지를 살피는 한국어 언어 경관 조사(Korean Linguistic Landscape Research)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그 출발점은 뒤셀도르프였다.
한국학 중앙연구원의 지원을 받아 실시하는 이번 조사는 단순히 한국 상점의 숫자를 세는 일이 아니라, 도시의 시각적 언어 공간 속에서 한국어가 어떤 위치를 차지하며 다른 언어들과 만나 어떤 풍경을 만들어내는지를 묻는 연구다.
첫날 현장에는 총 12명의 학생이 참여해 뒤셀도르프 중심 구역을 함께 걸으며 조사했고, 중앙역 일대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은 짝을 이룬 소그룹으로 나누어 조사 범위를 넓혔다. 이날 전수조사한 가게 수는 총 53개로,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독일어, 영어가 얽힌 다양한 간판과 표지들이 학생들의 눈과 카메라에 차곡차곡 담겼다. 상점 간판과 창문 표지, 파사드 문구, 메뉴판, 임시 안내문과 거리 광고물까지 도시 곳곳의 언어 흔적을 촘촘히 기록하는 일이 이번 초기 조사 단계의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왜 하필 뒤셀도르프인가
뒤셀도르프는 (독일을 잘 모르는 분들이게는) 다소 의외의 선택처럼 보일 수 있다. 베를린이나 프랑크푸르트 같은 더 널리 알려진 대도시가 있는데, 왜 한국어 가시성 연구의 중심지로 이 도시를 택했을까. 그 이유는 뒤셀도르프가 독일에서 가장 독특한 방식으로 아시아 언어와 문화가 응축된 장소이기 때문이다.
뒤셀도르프는 오랫동안 “라인 강변의 작은 도쿄(Little Tokyo am Rhein)”로 불려 왔다. 이 별칭은 단순한 관광 홍보 문구가 아니다. 뒤셀도르프시와 지역 자료에 따르면 이 도시는 8,400명 이상 일본인이 거주하는 곳이며, 뒤셀도르프 광역권에는 수백 개의 일본 기업이 활동하고 있다. 일본 관련 공식 소개 역시 뒤셀도르프를 독일 내 일본의 핵심 거점으로 설명하며, 약 400개의 일본 기업과 잘 구축된 일본어 생활 인프라를 강조한다.

이처럼 일본어와 일본 문화가 도시의 일상 풍경 속 깊이 들어와 있는 곳은 유럽 어느곳에서도 흔치 않다. 일본 상권의 규모뿐 아니라 한국어와 중국어, 그리고 다른 아시아 문화들이 나란히 가시화되는 장면을 한 도시 안에서 비교적 밀도 높게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뒤셀도르프는 특정 민족 공동체 하나의 생활권이 아니라, 아시아 문화가 겹겹이 쌓이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복합적 공간이다.
그래서 이번 연구에서 뒤셀도르프는 단순한 “한국 상점 밀집 지역”으로 보기보다, 한국어가 일본어, 중국어, 독일어, 영어 및 다른 다언어들과 함께 놓일 때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읽어낼 수 있는 이상적인 현장이다. 한국어가 독립적으로 드러나는지, 다른 언어와 함께 쓰이는지, 혹은 어떤 문화적 이미지를 불러오는지를 살피기 위해서는 이런 다언어적 상권이 필수적이며, 뒤셀도르프는 바로 그 조건을 넉넉하게 갖춘 도시다.
무엇을, 어떻게 조사하는가
현장조사는 간판 몇 장을 사진으로 남기는 수준의 답사에 그치지 않는다. 초기 조사 단계의 핵심은 상점 외관과 거리 표지에 드러난 시각적 언어를 가능한 한 체계적으로 수집하는 데 있다. 학생들은 가게 정면의 간판뿐 아니라 유리창 스티커, 포스터, 메뉴판, 문 옆 안내문, 임시 배너와 파사드 문구까지 살피며, 한국어가 어디에서 어떤 방식으로 등장하는지 꼼꼼히 기록했다.

이번 조사의 이론적 토대는 언어경관(linguistic landscape) 연구다. 도시 공간에 드러난 언어를 단서 삼아, 한 도시의 문화 지형과 사회적 관계를 해석하는 접근이다. 어떤 언어가 더 크게 보이는지, 어떤 언어가 보조적으로 사용되는지, 특정 언어가 정보 전달을 위해 쓰이는지 아니면 분위기를 위한 상징으로 쓰이는지 등을 살피면, 한 도시의 변화 방향이 의외로 선명하게 드러난다. 한국어의 가시성을 조사한다는 것은 곧 독일 도시 공간 안에서 한국 문화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읽는 일이기도 하다.
이번 조사는 성급한 결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후 연구를 위한 탄탄한 출발선을 그리기 위한 것이다. 앞으로는 단지 “언어가 보이는가”를 넘어서, 사람들이 그 언어를 어떻게 느끼는지도 함께 조사할 계획이다. 연구팀은 향후 길거리 인터뷰와 서면 인터뷰를 통해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사람들이 한국어 간판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한국어를 보면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는지, 다언어적 공간을 흥미롭게 느끼는지 혹은 낯설게 느끼는지까지 살펴볼 예정이다. 도시 속 언어의 “존재”와 그 언어를 둘러싼 “인식(perception)”을 함께 다루는 연구라는 점에서 이번 프로젝트의 범위는 자연스레 넓어진다.
지리학 도구를 인문학 연구에 도입하다
이번 프로젝트가 특별한 이유는 연구 대상뿐 아니라 연구 방법에서도 드러난다. 연구팀은 원래 지리학•도시계획•환경 분석 등에서 주로 사용되는 지리정보시스템(GIS) 소프트웨어인 아크지아이에스(ArcGIS)를 현장조사에 도입했다. 지도 위에 위치 정보를 얹어 데이터를 기록•분석하는 이 도구를 활용해, 간판과 언어, 상점 정보를 단순한 사진이 아닌 공간 데이터로 축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간판과 상점, 언어와 이미지를 단순한 사진으로만 남기는 대신, 위치 정보와 함께 구조화된 데이터로 기록함으로써 한국학과 언어•지역 연구가 디지털 인문학의 방법론과 만나는 새로운 형식이 만들어졌다. 학생들은 연구자가 설계한 앱과 아크지아이에스 설문123(ArcGIS Survey123)을 통해 스마트폰으로 현장에서 사진과 좌표, 조사 항목을 곧바로 입력했고, 데이터는 실시간으로 도시 지도 위에 차곡차곡 쌓여 갔다.

학생들이 만든 첫날의 현장
학생들은 연구 대상지를 함께 걸으며 서로가 발견한 언어적 장면을 나누고, 예상보다 훨씬 다채로운 언어 조합을 마주할 때마다 길 위에는 작은 토론이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교실에서 배운 개념이 도시의 간판과 표지판 위에서 실제로 살아 움직이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그날 가장 큰 환호를 받은 장면은 원래 조사 목록에 없던 붕어빵 스탠드를 우연히 발견해, 그 자리에서 곧바로 조사 대상으로 편입했을 때였다. 한국어 ‘붕어빵’이 일본어, 독일어, 영어와 함께 쓰이고, 상인은 한국인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한국 문화가 이제 다른 언어권과 배경 안에서도 자연스럽게 수용되고 재해석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붕어빵 앞에서 터져 나온 웃음과 환호는, 도시의 언어를 연구한다는 일이 결국 사람들의 정서와 문화적 상상력을 함께 읽어내는 일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전해 주는 장면이었다.
연구이자, 커뮤니티를 향한 초대
이 첫삽을 바탕으로 이번 프로젝트는 학생들의 학술 연구이면서 동시에 도시와 상인, 주민을 한자리에 초대하는 커뮤니티의 실험장이 될 것이다.
학생들이 기록한 간판과 표지는 상인들에게는 “우리 가게의 언어가 도시 문화의 한 장면”이라는 사실을, 주민들에게는 “매일 지나치던 거리도 연구가 되는 텍스트”라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워 줄 것이다.
숫자와 결과를 먼저 나열하기보다는, 왜 뒤셀도르프에서 시작했는지, 이 프로젝트가 앞으로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오전 현장조사를 마친 뒤 학생들이 즐겁게 김밥을 나누어 먹으며 반나절을 정리하는 모습은, 도시를 걸으며 수집한 한국어의 풍경이 앞으로 어떤 연구로 이어질지를 조용히 예고하는 듯 했다.
일본 이민의 역사와 아시아 상권, 한국 문화의 부상으로 그려진 뒤셀도르프의 언어 풍경이 디지털 도구를 통한 학생들의 꼼꼼한 조사를 통해서 지금 독일 속 한국어의 가장 생생한 현재를 차분히 기록해 나갈 것이다.
1457호 14면, 2026년 5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