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회: 첫사랑 편지
“샤이-쎄-에-..”
편지를 읽던 70대 중반의 여류 화가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한숨인지 욕설인지 모호한 소리를 흘린다.
오늘은 언니가 치매 요양원으로 들어간 날. 언니를 요양원에 데려다주고 빈 집으로 돌아온 그분은 나와 침실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이사랍시고 요양원으로 가져간 것은 작은 서랍장 하나와 옷 가방 달랑 하나. 살던 집은 한 달 안에 짐을 다 빼기로 집주인과 얘기가 마쳐진 상태다.
1964년, 고향 신부님의 권유로 새 삶을 찾아 독일로 날아온 스물네 살의 카타리나는 한 수녀원이 운영하는 병원에서 일을 시작했다. 아직 한국인 간호사가 드물던 시절이라 동양인 여자가 병실에 들어서자 침상에 누워있던 도미니크 수사는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고 했다. 그 둘의 첫 만남이었다.
눈에 생긴 감염이 심해져 입원까지 해야 했던 그는 신학을 공부하며 사제가 되길 희망하던 수도회 수사. 심성이 고우며 친절하고 독실한 구교 신자였던 카타리나와 도미니크 수사는 국적을 뛰어넘어 금방 친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속한 프란치스코회는 청빈, 정결, 순명이 무엇보다도 우선시 되는 곳. 그 둘이 친해지자 그가 속한 수도회와 카타리나가 일하던 병원의 수녀님들을 그 둘을 떼어내기 위해 무척 애썼다고 여류 화가는 회상한다.
“그래서 우리 언니는 이곳 베를린으로 보내졌고 도미니크 수사님은 멀리 페루로 선교하러 떠나야 했지.”
그 후에도 그 둘을 계속해서 편지를 주고받았다. 빈집의 벽에는 안데스 인디오의 복장으로 짐을 실은 나귀를 끌고 있는 도미니크 수사의 사진이 붙어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산 여든의 카타리나는 50여 년 동안 받은 도미니크의 편지를 한 장도 버리지 않고 간직해두었다. 그 후 카타리나는 남자친구가 생긴 적도 있지만, 결혼까지 가지는 못했다고 한다. 도미니크 수사는 사제 서품을 받고 수도원 신부님이 되셨다고 했다.
“우리 언니는 도저히 도미니크를 잊을 수가 없었던 거야. 그래서 한스의 청혼도 받아들일 수 없었어. 한스가 우리 언니를 얼마나 쫓아다녔는데…”
언니의 생활상이 고스란히 남겨진 침실의 책장에는 도미니크 수사가 보낸 엽서들을 날짜별로 스크랩해둔 앨범이 꽂혀 있었다. 그 엽서들을 읽으며 노화가는 신음을 연신 뱉어낸다.
“샤이-쎄-에-..”
치매가 생기자 카타리나는 집안 곳곳에 숨긴 비상금을 더 이상 찾아내지 못하였고 월 말이 되면 생활비가 모자라 연금이 나올 때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곤 했었다. 혼자 사시는 분이라 정리 정돈은 물론 청소, 요리, 빨래 등 모든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내가 처음 방문하였을 때는 “나는 아무 문제없이 잘 살고 있으니 내 걱정을 마세요.”라는 말을 반복하셨지만, 막상 집안을 살펴보자 세탁기가 고장 난 지 오래되어 밀린 빨래가 침실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사단법인 <해로>의 일상생활 지원 자원봉사자가 방문하며 도와드렸으나 병의 진전과 함께 방문봉사의 한계가 드러났다. 그래서 적절한 요양병원을 찾아 그쪽으로 입소하도록 도와드렸고 멀리서 언니를 방문하여 친히 요양원으로 모시고 간 동생은 집의 정리까지 도와달라고 우리에게 요청했다.
우리는 그분이 숨겨둔 비상금이 혹시라도 버리는 짐에 쓸려갈까 봐 책장 가득 꽂힌 책을 하나하나 다 훑어보아야 했다. 그리고 책갈피 곳곳에서 찾아낸 첫사랑의 편지들.
“이 선생과 그 자원봉사자 친구는 언니의 첫사랑을 영양가가 없다고 비웃었지만, 우리 언니야말로 참사랑을 한 거라고!”
우리는 요양원의 새 방에 가져갈 추가 짐에 그 편지들을 보태었다. 비교적 최근까지 성탄절 카드가 온 것을 본 나는 도미니크 신부님에게 이사한 새 주소를 알려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타리나 할머니는 이미 책을 읽거나 글을 쓰지 못하셨다. 비교적 최근 편지의 봉투를 챙겨 와 봉투에 적힌 주소로 편지를 써 보냈다.
“친애하는 도미니크 신부님,
베를린에서 사시는 카타리나 자매님이 요양원으로 이사하셨음을 알려드립니다. 새 주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
두 달 뒤 편지는 수취인 불명으로 내게 되돌아왔다.
이정미/ 해로 호스피스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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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8호 16면, 2021년 7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