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교의 귀띔: 천 년을 가라 한들 멀다 했으랴 (10)

Dipl.-Ing. WONKYO 연구소장

미국의 공학자 로버트 풀턴 (Robert Fulton)은 재봉사의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에는 보석 세공의 일도 해보고 화가로도 활동하다가 영국으로 유학을 가서는 운하 개발과 선박 개량에 관한 공부를 했다.

폴턴이 미국에서 영국으로 유학을 갈 때는 증기선이 없었을 때여서 돛단배를 타고 몇 달이 걸리는 대서양을 건너야 했을 텐데 웬만한 용기가 아니고서는 엄두를 못 낼 일이었을 것이다. 이 경험으로 인해 그는 더욱 증기선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지 않았는가 싶다.

1797년 불란서 정부는 풀턴이 쓴 <운하와 항해 개선> 이라는 논문에서 밝힌 운하개발의 가능성을 보고 빠리로 초청했다.

그는 빠리에 체류하면서 운하개발과 항해에 관한 기술자문 이외에도 불란서가 잠수함을 만들어 볼 것을 건의하자 1800년 나폴레옹의 재정적 지원으로 바다에 띄어 보지도 못한 <노틸러스 (Nautilus)>라는 최초의 잠수함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노틸러스>는 그리스어 및 라틴어로 <항해자>를 의미 한다. 그 후 150여 년이 지나 미국 해군에서는 세계 최초의 잠수함이었던 노틸러스 이름을 딴 첫 원자력 잠수함 노틸러스를 진수시켰다.

1958년 8월 3일 이 노틸러스 원자력 잠수함은 세계 최초로 북극의 빙하밑을 항해한 잠수함이 되었다. 커크 다글러스 (Kirk Douglus)가 주연한 <해저 2만리 (20000 Meilen unter dem Meer)> 라는 영화에서 <노틸러스> 라는 이름의 괴물 잠수함이 등장한다.

이 잠수함에는 <새치>처럼 창칼같이 긴 톱니를 가진 주둥이가 있어서 적의 함선을 만나면 정면으로 돌진해서 톱니가 달린 부리로 배를 반토막 내어 버리는 노틸러스였다.

그 후 폴턴은 불란서의 부당한 처우에 불만으로 가득 차 있을 때에 영국의 초청장을 받고 영국으로 건너갔다. 영국으로 건너가서 어뢰를 만들어 불란서와 전쟁 때 사용해 보기도 하지만 큰 성과를 얻지 못하자 1806년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미국으로 돌아간 풀턴은 이듬해인 1907년에 세계최초의 상업용 증기선인 클리먼트호를 진수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세계 최초의 상업용 증기선은 시속 4 크노텐(시속 8킬로미터)의 속도로 항해할 수 있었으며 모터가 꺼지는 사고를 대비해서 추가로 돛을 달고 있었다. 클리먼트 증기선이 허드슨강에 정기여객선으로 투입되는데 이는 돛단배에서 증기선으로 바뀌는 혁명적인 순간이 되는 것이다.

미국 시민들은 풀턴이 증기선을 만든다고 할 때 실패할 것으로 보았다. 풀턴의 시작 이전에도 많은 엔지니어들이 증기선 제작에 실패하는 것을 보아 왔기 때문이다. 증기선은 복잡한 기계이다. 증기를 공급하는 보일러, 증기를 활용하는 기관, 배의 추진장치 선체의 설계 등이 빈틈없이 움직여야 한다.

이중에서 어느 한 기능이라도 다른 장치와 맞지 않게 작동하게 되면 고장이 나거나 폭발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미국 뉴욕 허드슨강 (Hudson River)을 당시에는 노스 리버 (North River) 라고 불렀기에 증기선을 노스리버라고 불렀다. 클러먼트라고 하는 이름이 증기선의 공식적인 이름은 아니었음에도 클러먼트라고 불리운 것은 그 지역을 다니는 정기선이었기 때문이다.

클러먼트 증기선은 선객들을 뉴욕에서 허드슨강을 건너 알버니(Alberny) 까지 건너다 주는 역할을 했다. 독일에도 롤레라이(Lorerey)가 있는 상트 고아하우젠(St.Goarhausen)과 상트 고아(St.Goar) 사이를 왕래하는 정기선과 같은 것이다.

허드슨과 알버니까지의 거리는 약 240 킬로미터였으며 약 이틀 만에야 도달할 수 있는 먼 거리이기는 했지만 이 증기선이 투입되기 이전에는 약 일주일정도가 걸린 거리였다.

노스 리버 증기선은 발명가 로버트 풀턴(Robert Fulton)이 로버트 알 리빙스톤(Robert R. Livingston) 의 재정적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실 풀턴이 기능성 증기선을 최초로 만든 사람은 아니다. 풀턴이 몇몇의 엔지니어들과의 작업과정에서 아이디어를 얻어서 실험에 성공한 사람이다. 풀턴은 증기선의 필요성을 제일 먼저 인식하고 새로운 해운시대를 개척해 나가기로 했다.

사실 풀턴의 증기선은 미국의 허드슨강에서 보다 불란서에서 먼저 운항될 뻔 했었다. 1803년에 훌톤은 빠리 세느강에서 첫 증기선을 시운전해보려고 했다. 당시 불란서 공화국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eon Bonaparte)는 증기로 배를 움직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그래서 풀턴이 빠리 세느 (Seine) 강에서 시운전을 해보겠다는 신청서를 냈을 때 허가를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풀턴은 4년 뒤인 1807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첫 시운전을 하게 된 것이다.

불란서에서 증기선 엔진을 끌고 미국으로 건너간 것은 그가 얼마나 집요하고 자신의 발명품에 자신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일이다.

그 결과 불란서는 세계 최초의 증기선 발명이라는 명예를 미국에 빼앗기고 말았다.


교포신문은 6월부터 1년간 정원교선생의 “천 년을 가라 한들 멀다 했으랴” 글을 연재합니다.
이 연재가 독자들의 인문학적 지평을 넓혀줄 것을 확신하며 독자들의 많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편집자주

1422호 22면, 2025년 8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