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독일 글리닉커 다리(Glienicker Brücke)의 스파이 교환

Dipl.-Ing. WONKYO INSTITUTE

글리닉커(Glienicker) 다리는 베를린 남서쪽에 위치하면서 두 나라의 경계를 잇는 다리로서 하벨강을 가로지르고 있으며 1961년 동독이 쌓기 시작한 베르린 장벽 때문에 통행이 금지된 다리이다.

즉 동독과 서독을 잇는 다리였으며 다리 이름은 부근에 있는 글리닉커 성에서 따온 것으로 한 쪽은 글리닉커 호수가 있고 다른 한 쪽에는 융훼른 호수 (Jungfernsee) 가 있다.

1960년대 미국이 소련과의 첫 스파이 교환을 할 때 어떤 건물안에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보내고 저쪽에서 이쪽으로 건네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보다 드라마틱한 장소에서 포로가 교환되기를 바랬다. 그래서 역사적 장소로 결정된 곳이 1907년에 완공된 이 글리닉커 다리이다.

사실 이 다리는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이 베를린 지역을 분할지배하고 있을 때 이 다리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었다.

1962년 2월 10일. 미국 전투기 U-2 조종사 게리 파워스 (Gery Powers) 와 소련 스파이 루돌프 아벨 (Rudolf Abel) 을 맞교환한 장소가 이 글리닉커 다리이며 동서독 분단 후 13년만의 일이다.

이 다리 위에서 포로들이 서로 맞교환될 때에는 다리위에는 오직 맞교환 될 사람만 건널 수 있게 했고, 맞교환될 때는 동행하는 사람 없이 그들만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걸어 왔고 서쪽에서 동쪽으로 걸어가게 했다.

U-2기 조종사 파워스는 1960년 5월 1일 파키스탄에서 출발해서 소련의 군사기지를 촬영하다가 격추되었다. 그는 10년 형을 받고 복역 중이었다.

이후 이 다리를 “간첩의 다리(Brrücke der Spionge)“ 라고 하거나 이태리 베니스의 “두칼레 성 (Palazzo Ducale)“ 과 형무소를 잇는 다리 이름을 따서 “한숨의 다리(Brücke des Seufzen)”라는 별명을 붙이기도 했다.

1962년 우리나라의 정치사정은 제4대 윤보선 대통령이 제1-3였던 이승만 대통령 권한대행에서 물러나고 제5-9대 박정희 대통령이 그 뒤를 이어 제3공화국 시대가 시작되던 때다.

독일 국민들은 포로들이 글리닉커 다리에서 서로 맞교환 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이 고국으로 귀국하고 있을 시점에서야 뉴스를 통해서 알 수 있을 정도로 철저한 보안 속에서 포로교환이 이루어졌다.

글리닉커 다리는 동서독 냉전시대의 상징이었다. 글리닉커 다리는 목재로 된 다리였으며 세월이 지나면서 인구도 늘어나고 교통량도 많아지다 보니 좁고 위험한 다리가 되었다. 결국 목재다리는 넓고 튼튼한 철재다리(1907년 11월 16일 개통)로 교체되어야 했다.

이 다리는 냉전 초기에만 하더라도 연합군이 베를린과 포츠담을 오고가는 다리로 이용되었었다. 그러다가 동독이 1952년 동서독을 잇는 이 다리를 폐쇄시켰고 이 후 시민들은 이 다리를 이용해서 베를린으로 가거나 포츠담으로 가는 길목으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부터는 동서독을 넘나들려면 국경경비소인 체크 포인트(Check Point) 라는 곳에서 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동서 베를린 국경에 설치된 모든 체크포인트에서 검열을 받고 나면 동서독으로 넘나들 수 있었지만 유일하게 이 글리닉커 다리의 체크 포인트만은 소련군의 통제 하에 있었기에 다리를 넘나들 수 없는 폐쇄된 다리로 남아 있었다.

1907년에 건설된 글리닉커 철교는 전체적인 수리보수를 받지 않으면 안 될 상태가 되었다. 동서독 간에는 국경사이에 놓인 이 다리의 보수비용을 분담하는 일이 문제가 되었다.

1980년에 서독정부는 글리니커의 다리 서쪽인 절반의 수리보수를 먼저 끝냈다. 하지만 동독에서는 많은 경비가 들어가는 이 다리보수를 위해 넉넉지 않은 재정에서 부담할 마음이 없었다.

수리보수하고 싶으면 너희가 하고 우리는 안 해도 괜찮으니 우리 보고 보수를 하라마라, 돈을 내라마라 하지 말라는 듯 성의없이 상담에 임했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파야잖느냐” 는 식이다.

결국 경제사정이 좋은 서독 정부에서 “브리지 오브 유니티(Bridge of Unity)” 라는 다리 이름을 “글리닉케”라는 이름으로 바꾸는 것에 동의하는 조건으로 동독측에서 해야 할 나머지 절반의 동쪽 수리보수를 끝내 주었고 경비지불도 마쳤다.

두 강대국 간의 두 번째 포로교환도 1985년 6월 11일에 글리닉커 다리에서 이루어졌다. 1차 교환 때와는 달리 모두 27명이 맞교환되었는데 미국인 23명과 동독인 4명이었다.

세 번째이자 마지막 교환은 1986년 2월 10일에 있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3년 전이고 통일되기 4년전의 일이다. 세 번째 포로교환은 첫 번째 교환과 두 번째 교환처럼 비밀리에 맞교환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각 언론사 대표들을 초청해서 포로들이 서로 걸어가고 오는 맞교환 장면을 TV로 생중계할 수 있게 했다.

이 때 소련은 1970년대에 언론의 자유와 인권을 위한 캠페인을 벌렸다고 구속했던 인권운동가 아나톨리 수크란스키(Anatoli Schtschranski) 를 석방했다. 그는 1968년 소련에서 스파이 혐으로 형을 선고 받았지만 서방에서는 인권문제로 영웅으로 추앙 받던 인물이었다.

이 세 번째 포로교환에서 미국은 CIA의 통역관이었던 체코의 스파이 카렐 쾩혀(Karel Koecher)를 소련에 넘겨주었다.

당시 동서방 스파이들이나 중요인물들을 교환한 마지막 교환은 냉전시대의 “데탕트 (Detente)의 신호” 로 여겨지기도 했다. 데탕트는 미국과 소련과 같은 강국이 만든 동서간의 긴장이 완화되어 화해의 분위기가 조성되는 상태나 정책을 말한다.

빌리브란트 수상의 비서로서 고정간첩이었던 기욤(Guillaume) 부부는 1981년 포로교환으로 동독에 인계되었고 빌리브란트 수상은 그 책임으로 사임하였다.

1436호 22면, 2025년 11월 2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