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페르티낙스(Pertinax) 황제 암살

Dipl.-Ing. WONKYO 연구소장

서기 193년의 로마제국은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운 시기를 맞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혼란스러웠던 이유는 당시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Marcus Aurelius)의 아들인 콤모두스(Commodus) 황제가 나라 일에 신경 쓰지 않고 환락생활에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그의 통치말 경에는 나라 경제가 파탄지경에 이르렀고 황제의 권위는 땅에 떨어 질 대로 떨어진 상태가 되었다. 경제가 어려워지고 사회질서가 문란해지자 로마 시민들은 각종 음모와 스캔들에 휩싸인 부패한 정권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서기 192년 12월 31일, 무능했던 콤모두스 황제는 가장 가까운 측근들의 암살모의로 살해되었다.

‘적은 항상 최측근에 있다’는 말이 맞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그의 후임으로 원로원 의원들 사이에서 높은 명성을 누렸고 게르만 민족과의 싸움에서도 큰 공을 세워 로마 시민들로부터 인기를 얻고 있던 푸블리우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Publius Helvius Pertinax)가 후계자로 추대 되었다.

그는 코모두스 황제가 암살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원로원이 자신을 황제로 선출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황제의 자리를 고사했다. 하지만 원로원의 간곡한 부탁과 동료들의 요구에 못이겨 결국 황제에 오른다.

페르티낙스는 암살과 정치적인 술수를 이용해서 황제에 오른 것이 아니라 완전히 합법적인 추대방식으로 황제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리고 전임 황제 때의 폭정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고 그 보다 먼저 코모두스 황제에게 재산과 목숨을 잃었던 사람들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고 적자가 된 국고를 흑자로 만들기 위한 개혁을 일으키면서 로마시민으로부터 많은 지지와 호응을 얻어 나갔다.

페르티낙스는 해방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그는 비록 해방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훌륭한 자질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 인물이다. 그는 전투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어서 파르티아, 브리타니아, 도나우강 전투에서 승승장구한 이유로 로마의 속국이던 다키아 (Daccia)의 총독-원로원 자리에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법정문제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일어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자 중안 정부의 부름을 받게 되었고 정치적인 입지를 다져갈 수 있었다.

그러나 페르티낙스는 로마의 혼란속의 정치상태를 진정시키지는 못했다. 취임 후 그는 그를 지키기 위해 존재하는 친위대마저도 믿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친위대를 개혁하고 경제부흥의 일환으로 필요한 군재정을 대폭 삭감시키면서 조직을 축소시켰고 친위대의 일부가 콤모두스 황제 암살 사건에 관여 했다는 이유로 처형시키기도 했다.

이런 과정에서 친위대의 불만을 사게 되었고 이런 이유로 레토(Leto)가 이끄는 친위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친위대는 그들이 누리고 있던 특권을 빼앗길까봐 두려웠고 결국 파르티낙스 반대파와 결탁하여 코모두스 황제가 암살된 지 86일이 되던 날에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서기 193년 친위대의 기마병들이 테르티낙스 황제가 머물고 있는 성 안으로 처들어갔다. 역사가 카시우스 디오(Cassius Dio)에 따르면 페르티낙스 황제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혼자서 반란을 일으킨 친위대와 맞섰을 것이라고 했다. 페르티낙스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몸을 피신하기 보다는 반란군 앞에서 설명을 하며 자신의 정책을 설득시키려고 했을 것이라고 했다.

당연히 위험을 수반한 헛수고였다. 친위대 반란군들은 그의 설명이 다 끝나기도 전에 페르티낙스 황제를 살해했다. 황제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야할 친위대가 황제를 암살한 것으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지 불과 3개월만에 벌어진 일이다.

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른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에 의해 명예가 회복되고 황제로서의 권위를 인정받았다.

<다섯 황제의 해> 는 로마제국의 내전을 말하는 것으로 로마가 한창 정치적인 혼란기에 놓여 있을 때 페르티낙스(Helvius Pertinax)-디디우스 율리아누스 (Didius Julianus)-페르켄니우스 니게르(Niger)-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Cladius Alvinus)-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가 서로 자기가 로마의 진정한 황제라고 주장하고 있을 때를 말하며 이 권력투쟁에서 세베루스가 최후 승자가 되어 세베루스 왕조를 세운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아들 카라칼라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줌으로서 로마 황제의 자리를 사실상 세습화시킨 황제가 되었다.

“어느 날 알렉산더 대왕이 친한 친구로부터 사냥 개 두 마리를 선물로 받았다. 사냥을 즐겼던 그는 토끼사냥에 개를 데리고 나갔다. 하지만 토끼를 보고도 좇아 갈 생각을 안 했다. 화가 난 알렉산더 대왕은 사냥개 두 마리를 죽여 버렸다. 그리고 멍텅구리 개를 선물로 주었다면서 친구에게 불평했다.

친구는 알렉산더의 말을 듣고 실망스러운 빛으로 말했다. ‘그 개들은 토끼 사냥에 훈련된 개들이 아니라 호랑이나 사자를 사냥하기 위해 훈련된 매우 비싸고 용맹스러운 사냥개였다’고 하면서 알렉산더 대왕의 경솔함을 나무랬다. 알렉산더 대왕은 친구의 말을 듣고 성급했던 자기의 행동에 땅을 치며 후회했다.”

만일 페르티낙스를 살해하지 않고 3개월이 아닌 3년이라는 치적을 쌓을 기회를 주었더라면 로마의 역사는 달라졌을까 ?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 지지 않았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1439호 22면, 2025년 12월 1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