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중언어 사용과 한국어의 위상
영국 여왕이 타계하셨다. 여왕은 오랫동안 대중과 복잡한 관계를 이루면서 법적으로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리고 왕실의 힘을 즐기며 대중 앞에서는 스타성을 오랫동안 유지하며 생애를 살아왔었다.
영어의 쓰임도 그와 비슷한 점이 있다. 세계인들 사이에서 원어민의 수와는 별개로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이고 그러기에 사랑을 많이 받는다고 할 수 있지만 영어 공부하기 싫은 사람들에게 적잖이 미움도 받으며 세계적인 대표 공통어 (링구아 프랑카)로써 공고하게 자리매김을 했고 인터넷의 발달과 함께 점점 더 널리 사용되고 있다.
영어라는 하나의 언어가 이렇게 세계를 정복했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전 세계에 몇 개의 언어가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세어 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인데 세계의 언어에 대해 샅샅이 조사해서 정기적으로 업데이트를 하는 민족학 (Ethnologue: Languages of the World) 홈페이지에 보면 2022년 가을 현재 전 세계에는 7,151개의 언어가 존재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7,151개의 언어는 비슷한 언어끼리 몇 개의 언어 계통, 즉 어족으로 분리할 수 있는데 학자마다 의견은 분분하지만 전체 언어 수의 1% 이상을 차지하는 어족만 세면 14개의 어족으로 나눌 수 있다. 일일이 14개의 어족을 다 소개하는 것은 지면 낭비이겠으나 우리가 알만한 어족, 인도 유럽어족, 중국 티베트 어족, 오스트리아 어족, 아프로 아시아 어족을 위시하여 매우 생소하게 느껴지지만 사실상 어족의 개수로는 제일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니제르 콩고 어족 (20.6%), 오스트로네시아어족 (16.8%)까지 14개의 커다란 대표적 어족이 지구상에 존재한다.
전 세계 언어의 뿌리에 대해 얄팍하게 살펴보자면 먼저 우리가 잘 알고 학교에서 배우던 언어 영어 독일어 등은 게르만어파, 그리스어파, 발트 슬라브어파 등이 소속된 인도 유럽어족이고 오늘날 세계 인구의 46퍼센트에 달하는 32억 명이 인도 유럽어족 언어를 모어로 사용한다.
한국어는 과거에 우랄 알타이 어족으로 분류되었었는데 요즘에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는 고립어(language isolate)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알타이어족에 속하는 언어들과 문법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지만 알타이어족에 대한 자료가 부족하기에 한국어는 고립어라 주장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럼 7천 개가량의 언어는 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잠시 세계에 몇 개의 나라가 존재하는지를 생각해 보자.
현존하는 나라의 개수를 따지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올림픽 대회를 개최하는 기준으로는 지구상에 206개국의 나라가 있다. 또 다른 기준인 UN을 기준으로 보면 지구상의 나라의 개수는 195개이다. 이는 UN 가입국 193개국과 참관 회원국인 바티칸 시티와 팔레스타인 2개국을 합친 결과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일부 국가들로부터만 국가로 인정받는 나라들이 있는데 예를 들어 대만이나 아프리카 북부의 서사하라, 코소보 (세르비아로부터 독립선언했고 100개 이상의 나라가 인정한다), 남오세티야와 아브카지아 (둘 다 조지아로부터 독립선언했다) 북 키프로스 (남키프로스부터 독립선언을 했으나 유일하게 터키만 인정하는 나라이다)를 합치면 전 세계에는 201개의 나라가 있다.
대륙별로 보면 아프리카에 54개의 나라가, 아시아에는 48개국, 유럽에는 44개국, 북미 2개국, 남미와 카리비안해 22개국, 오세아니아 에는14개국이 분포되어 있다.
세상에 이렇게 약 195개국의 나라가 있고 지구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7000개나 있다는 사실은 지구상에 단일 언어를 사용하는 국가는 드물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가 아는 강대국들은 대부분 단일 언어 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상은 그렇지 않거나 혹은 세상에는 단일어 사용국보다 그렇지 않은 나라들이 훨씬 많다는 이야기이다.
7천 개의 언어와 200개의 나라…이 계산으로만 봐도 사실 전 세계에서 단일 언어만 구사하는 나라는 손에 꼽을 수 있고 나머지 대부분의 나라들은 다중언어 국가라는 결론을 쉽게 도출할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이중언어자의 비율은 벌써 단일 언어 사용자를 넘은지 오래다. 단일 언어 구사자는 세계 전체 인구의 40퍼센트, 이중언어 구사자는 43퍼센트, 삼중언어 구사자는 13퍼센트, 다중언어 구사자, 즉 4개 이상의 구사자는 세계 전체 인구의 3퍼센트이다. 즉 이중 다중 언어자의 비율은 60퍼센트로 단일 언어 사용자의 인구를 훌쩍 넘었다.
그것에 비해 아직 우리의 세계는 많은 부분이 단일 언어 사용자를 기준으로 만들어져 돌아가고 있다. 그 나라에서 가장 힘이 세고, 가장 많이 쓰이는 말 이외의 다른 말이 병행되어 사용되는 것이 마치 커다란 국가적 손해인 듯 생각하고 반응한다.
영어와 한국어 병행은 어디든 괜찮고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 한국어에 베트남어 등의 동남아시아의 언어를 함께 쓰자 하면 저 사람들이 한국어를 배워야지 왜 우리가 필요 없는 말을 표지판에, 간판에 써야 하냐고 되물을 사람들이 아직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힘이 센 말은 무엇일까?
“언어의 힘이 세다”는 것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사용한다는 의미와 특히 권력과 힘을 가진 사람들이 쓰는 말임을 의미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언어는 명실 공히 영어이고 가장 많은 원어민을 가진 언어는 중국어 (만다린)로 압도적인 숫자이다. 중국어를 뒤따라 스페인어가 2위이고 그 뒤를 영어, 힌디어가 뒤따른다. 원어민 숫자와 관계없이 많이 쓰이는 언어의 순서를 보면 영어, 중국어(만다린), 힌디어, 스페인어의 순서이다.
한국어는 사용자의 숫자로 세계 22위이다. (2021년에는 20위였는데 올해 조사에서는 22위에 등극했다.) 20위까지의 순위를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유럽 언어 중 프랑스어가 5위, 포르투갈 어가 9위, 독일어가 12위이고, 아시아권에서는 뱅갈어 7위, 인도네시아어 11위, 일본어 13위, 중국 광동어 19위, 베트남어가 20위이다.
시각을 살짝 돌려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언어를 쓰고 있는 나라는 어디일까? 정답은 파푸아 뉴기니로 800개의 언어를 사용한다. 대단하지 않은가, 한 나라가 800개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의사소통이 된다는 것이. 한국어만을 공통어로 사용하고 있는 한국인으로서 800개로 소통해가는 나라가 어떻게 운영되는지는 상상하기도 힘들다.
인도네시아 역시 다언어 국가로 700개의 언어를 사용하고, 나이지리아는 522개의 언어를, 인도는 454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영어만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진 미국의 경우도 사실상 이민자의 언어를 모두 포함하면 326개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과거에 미국에 이민 간 사람들이 영어 한 마디도 사용 안 하고 한인타운에서 무리 없이 잘 살아가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다.)
800개의 언어가 사용되는 파푸아뉴기니, 326개의 이민자의 언어들이 사용되는 미국… 세계는 이미 다언어 세상이다. 7천 개 가량의 언어가 195개국에 걸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은 사실 대부분의 나라가 다중언어 사용국이라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만 해도 독일에서 독일어를 사용하고 살면서 매일 한국어 뉴스와 신문을 읽고 한국 티브이 프로그램이나 유투브를 시청하며 한국어를 다음세대에게 계승하려 애쓰고 있지 않은가. 독일내의 계승어 학교들의 종류만 보아도 터키어, 아랍어, 폴란드어를 위시하여 러시아어, 그리스어, 크로아시아어, 일본어, 중국어 등 여러 이민자언어들을 공교육 안팎에서 직, 간접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나름 다언어 세계라고 생각하는 유럽은 사실 아시아나 아프리카에 비해 사용하는 언어 수가 적다는 것이다. UN 회의에 20개가 넘는 언어로 동시통역 되는 것을 보고 역시 유럽은 다언어 사용국이라 생각하지만 유럽은 경제적 강대국이 많아 힘 있는 언어들을 많이 쓰기에 그렇다고 느껴질 뿐 실상 위에 소개했듯이 다른 대륙에 비해 다언어 사용 대륙은 아닌 것이다. 스물몇 개의 언어가 아닌 수백 개의 언어를 사용해가며 살아가는 나라들이 있지 않은가.
이와 더불어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다중언어자의 증가 추세이다.
내가 어릴 때만 하더라도 한국어에 영어만 잘해도 신기한 일이었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조기교육으로 영어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국어 스페인어 등 ‘쏼라쏼라’ 다른 나라말을 어려서부터 배우고 발음도 근사하게 원어민처럼 낸다. 독일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이태리어 등 김나지움을 졸업하는 동시에 습득하고 있는 언어의 수가 세 개를 훌쩍 넘긴다 (물론 배운다고 다 이 언어들을 잘 사용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예전에는 유럽권 이웃나라의 언어를 중점적으로 배웠지만 요즘은 중국어, 일본어 심지어 한국어를 김나지움에 AG로 도입한 학교들이 있다 – 독일 학생들이 공교육 기관에서 한국어를 배우다니 멋진일이다!
“언어 제국주의”라는 말이 있다. 한국어의 확산에 대해 즐겁게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제국주의는 웬 말인가 싶겠지만 언어의 힘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보다 확실한 표현이 있을까 싶다.
1979년에 발행된 영어 사립교육기관의 브로슈어에 보면 “과거에는 군함과 대사를 보내 다른 나라를 정복했었지만 현대사회에서는 영어 선생을 보내서 다른 나라들을 언어로 정복한다”고 되어 있다. 즉 군사력으로 다른 나라를 정복하는 방법 외에 언어의 힘, 문화의 힘으로도 다른 나라를 정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로
버트 필립슨(Robert Philipson)이라는 학자는 1992년 자신의 저서에서 현대 사회에서 영어는 식민화의 패턴이라 주장하였다. 우리나라를 위시하여 영어로 정복된 나라들은 영어 사용자들에 의해 구조적, 문화적 불평등을 만들어내고 그것의 지속적인 재구성에 의해 지배력이 유지되도록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언어는 또 다른 형태의 제국주의이고 특정 언어가 국제적으로 군림하면서 지배하는 것은 언어 제국주의라는 것이다.
특히 영어는 엘리트 집단을 형성하는 중요한 언어로 자본주의, 신 제국주의적 언어로 발전하였고 우리나라의 영어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도 이에서 기인된 것이라 하겠다.
조기 유학, 영어 유치원, 기러기 아빠 등 영어 열풍으로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을 영어로 얼마나 괴롭히고 있으며 또한 그 비용을 마련하고 교육을 지원하기 위해 부모들은 얼마나 고생하는가. 아이들, 학생들, 부모들만 그러한가, 힘들게 하루를 마친 직장인들의 발걸음은 영어학원으로, 혹은 사무실을 떠나지 못하고 전화영어를 수강하며… 우리는 얼마나 더 영어 공부를 해야 하고 영어학원, 영어 시험에 돈을 쏟아 부어야 하는가… 힘 있는 영어 앞에 우리는 그동안 너무 당했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영어에 이렇게 등골이 부서지고 파 먹히기만 하는 시대는 지났다. 우리 문화의 눈부신 성장과 발전으로 이제 세계의 젊은이들이 한국어에 손을 들어주기 시작했다.
2021년 10월 옥스퍼트 영어사전에 20개의 한국어 단어가 등재되었다. K-pop, K-drama, K-beauty, K-food, K-style 외에도 Banchan(반찬), Bulgogi(불고기), kimbap(김밥), Hallyu(한류), K-drama(K-드라마), Manhwa(만화), Mukbang(먹방), Daebak(대박), 및 한국어 호칭 ‘noona(누나)’, ‘oppa(오빠)’, ‘unni(언니)’에 한국식 영어 표현인 ‘skinship(스킨십)’, ‘fighting(파이팅)까지 20개의 단어가 영어사전에 올랐다. 한국어가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파고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뿐이랴 지금 전 세계적으로 대학을 위시하여 한국어 배움의 열풍이 불고 있음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국제 언어로서 한국어의 위상이 높아지니 가슴이 뜨거워지고 한국어를 더 사랑하게 된다. 영어사전에도 등재된 단어를 가진 언어, 다른 나라 사람들이 애써서 배우고자 하는 언어가 되어 가고 있기에 우리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전승할 이유도 더 확실해졌다. 우리 언어를 더욱 자랑스럽게 느낄 수 있는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이 고맙기 그지없다.
언젠가 우리말도 영어와 같은 힘을 얻어 국제 사회에 공용어로 쓰이는 날이 있을 수 있을까 희망해 본다.
1289호 14면, 2022년 11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