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교과서 밖의 한국 – 독일 대학생 야닉의 1년

예상치 못한 여정의 시작

“내가 한국에 가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야닉(Janik Höllander)은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루르 보훔대학교에서 동아시아의 경제와 정치를 전공하던 그는, 2024년 여름부터 1년 동안 전남대학교에서 교환학생으로 머물렀다. 다른 친구들처럼 오래전부터 K-팝이나 한국 드라마에 빠져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의 전공 과정에서 한국은 늘 ‘분석의 대상’이었다. 정치적 사실들, 경제 통계, 국제관계론 강의 속의 한국—그것이 그가 아는 한국의 전부였다.

하지만 실제로 발을 내딛은 한국은 전혀 달랐다. “머리로 배운 한국은 질서정연하고 계산적인 나라였는데, 제가 마주한 한국은 따뜻하고 불완전했어요. 사람 냄새가 나고, 매 순간이 예상 밖이었죠.” 그렇게 그의 이야기는 시작된다.

여수 낯설음이 언어가 되는 곳

야닉이 처음 머문 곳은 전라남도 여수였다. 바다가 도시의 경계를 품고, 언덕과 바람이 어우러진 남도의 해안도시. 그는 전남대 여수캠퍼스의 한국어 집중과정에 등록해 매일 수업을 들었다. 이미 독일에서도 한국어를 수강했지만, 한국에 도착한 지 며칠 만에 “이건 전혀 다른 차원의 언어다”라는 걸 깨달았다.

여수의 시장 골목에서 상인들이 던지는 빠른 말, 카페에서 손님이 주문하는 짧은 문장, 버스 정류장에서 들리는 방송—모든 것이 수업과는 매우 다른 교재였다. “한국어는 문법이 아니라 리듬이었어요. 사람들의 억양 속에서 단어가 살아 있었죠.” 그는 그렇게 언어를 통해 도시의 호흡을 배웠다.

하지만 여수에서 그가 만난 것은 한국만이 아니었다. 수업을 함께 들은 대부분의 학생들이 우즈베키스탄 출신이었다. 그들은 중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먼 길을 건너와 이 낯선 해안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처음엔 놀랐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우즈베키스탄이 어디에 있는지도 제대로 몰랐어요.”

야닉은 곧 그들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우즈베키스탄은 한국보다 훨씬 가난한 나라였고, 많은 학생들이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을 병행해야 했다. 기숙사 식당에는 할랄 음식이 제공되지 않아 모두 사비로 방을 따로 구해야 했고, 이는 월세 부담을 가중시켰다. 집을 구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고, 때로는 까다로운 집주인과의 마찰도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생활비만이 아니라 고향 가족에게 송금까지 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부유한 한국에서 돈을 보내길 기대하는 가족들. 그래서 그들은 건설 현장에서 중노동을 하거나 편의점 야간 근무를 했다. 현장 감독에게 구박받는 일도 있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어제도 못 잤어?”가 슬픈 농담처럼 반복되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늘 웃었다. 야닉은 그 웃음에 놀랐다. “저보다 훨씬 어려운 상황인데, 늘 농담을 던지고, 저를 챙겼어요.” 그들과 함께 여수 주변을 탐방하다 여러 번 산에서 길을 잃기도 했다. 함께 할랄 고기를 사서 우즈베키스탄식 양고기 요리를 만들어 먹기도 했다. 맵고 짠 한국 음식과 달리 부드럽고 진한 맛이었다. “이 친구들과 함께 산에 오르면 그곳이 한국이 아니라 중앙아시아에서 바람을 맞는 것 같았죠.”

야닉은 어느새, 자신이 한국을 배우는 동시에 우즈베키스탄이라는 또 다른 세계를 배우고 있음을 깨달았다. “한국은 지리적으로 독일에서 멀고 독특한 문화를 가졌지만, 선진국으로서 여러 면에서 비슷하기에 비교 가능했어요. 하지만 우즈베키스탄 친구들은 달랐어요. 어떤 친구는 시골 출신이라 혼자 돌아다닐 때 들개를 조심해야 했대요. 경찰에 신고하는 게 제대로 된 선택지가 아니던 시절에 자랐고요.”

야닉의 교환학생 경험에서 한국은 무대였고, 그 안에서 그는 세 개의 문화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었다.

문화의 교차점에서 배운 것들

여수는 작은 도시였다. 외국인은 드물었고, 서양 학생은 캠퍼스 전체에 단 두 명뿐이었다. 유럽인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한국인들은 자주 그에게 말을 걸었다. 대학에서도, 거리에서도. 운이 좋으면 대화는 저녁 식사로 이어졌다.

“대부분의 만남은 짧고 소박했어요. 그런데 그 작은 대화가 하루를 바꿨죠.”

영어가 거의 통하지 않는 환경은 처음엔 불편했지만, 오히려 그 덕에 한국어 실력이 놀라울 만큼 빠르게 늘었다. “문법책을 펴는 대신 식당 아줌마와 대화를 했어요. 사람들과의 대화는 최고의 수업이었죠.”

그의 일상은 단조롭지만 따뜻했다. 매일 같은 언덕길을 걸어 학교에 가고, 점심엔 김치찌개나 비빔밥을 먹었다. 밤에는 기숙사 방에서 창문을 열고 바다 바람을 맞으며 독일 친구들에게 메일을 썼다. 그 시간들이 쌓여, 그의 한국은 어느새 ‘유학 장소’가 아닌 ‘삶의 공간’이 되어 있었다.

광주 청춘의 도시에서의 또 다른 배움

두 번째 학기, 야닉은 광주로 옮겼다. 여수에서 익힌 언어와 적응력 덕분에 이제는 자신감이 생겼다. 광주는 여수와 달리 활기차고 넓었다. 그는 “그제야 전형적인 교환학생의 삶을 살 수 있었다”고 웃었다. 여행을 다니고,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때의 저는 그저 행복했어요. 공부보다 삶을 배우는 시간이었죠.”

광주에서는 수백 명의 국제 학생들이 있었고, 많은 서양 학생들도 만날 수 있었다. 비슷한 동기와 환경에서 온 친구들이었다. 그는 한국 친구들과 함께 매주 새로운 곳을 여행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담양의 금성산성이었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지금도 눈에 선해요. 계곡이 끝없이 이어지고, 바람이 얼굴을 스칠 때 ‘아, 여기가 진짜 한국이구나’ 했죠.”

광주 곳곳에서 그는 민주화운동의 흔적을 발견했다. 대학 주변의 작은 가게들, 술집들, 식당들, 그리고 도심의 문화전당… 광주 자체가 그의 마음에 깊이 자리 잡았다.

그는 막걸리를 사랑하게 되었고, 김밥나라에서 거의 매일 먹던 김치볶음밥을 독일에 돌아와서도 자주 해먹는다. “한국에서는 음식이 사람을 이어줘요. 밥 한 끼가 관계의 시작이었어요.”

떠남의 순간, 그리고 남은 마음

귀국을 앞둔 여름, 여수의 친구들이 그를 다시 불렀다. 작별을 고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잠깐 들를 생각으로 가방 하나만 들고 갔다. 하지만 도착하자, 친구들은 하루 종일 함께 보낼 일정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정말 생각도 못했어요. 친구들은 저의 마지막 하루를 위해 한 달 동안 계획한 것처럼 성대한 환송식을 준비했더라고요.”

마지막으로 그들은 함께 여수의 검은 모래 해변에서 수영을 했다. 해가 지고 모래 위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서로의 언어로 인사를 나눴다.

한국 유학이 남긴 것

독일로 돌아온 지금, 야닉은 종종 여수의 바다를 떠올린다. “한국은 제게 ‘또 다른 세상’이었어요. 그리고 그 안에서 저는 ‘새롭게’ 세상과 사람을 배우는 학생이 되었죠.”

그는 한국 유학을 통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을 배웠다. 진짜 배움은 교실이 아니라 삶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한국에 가기 전, 저는 아시아를 ‘연구 대상’으로만 봤어요. 이론적인 개념들만 있었죠. 하지만 실제 일상의 문화에 대해선 거의 몰랐습니다. K-팝이나 드라마에도 관심이 없었고요. 그래서 제 한국 경험은 같은 대학에서 온 다른 친구들과는 많이 달랐던 것 같아요.”

한국 유학은 그에게 문화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식을 가르쳐주었다. 통계와 이론으로 이해했던 아시아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살아 있는 현실’이 되었다. “머리로 배운 것과 몸으로 배운 것은 완전히 달랐어요. 한국에서 만난 사람들—한국인이든, 우즈베키스탄 친구들이든—그들은 제게 문화란 책에 적힌 것이 아니라, 매일 살아 숨 쉬는 것임을 가르쳐주었어요.”

그리고 문화와 문화 사이에는 언제나 또 하나의 ‘사람’이 있다는 것을. 한국 유학은 그에게 세계를 보는 새로운 눈을 열어주었다.

1433호 14면, 2025년 11월 7일